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에 전시돼 있는 불탄 전동차. 류연정 기자| ▶ 글 싣는 순서 |
①잔인한 범죄, 희생 키운 대처, 주먹구구식 수습 과정 ②2.18공원 이름 병기 하세월…일부 희생자 묻힌 묘역 이름 없이 방치 ③수 년간 이룬 것 없는 재단…아물지 않은 부상자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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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2월 18일 오전 9시 53분. 수백 명이 타고 있던 대구 지하철 1호선 1079열차가 중앙로역에 다다랐을 즈음 객실 내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당시 56세였던 김대한이 삶을 비관해 낸 불이었다. 뇌경변으로 치유할 수 없는 장애를 얻게 돼 죽음을 결심한 그는 '혼자 죽기 억울하다'는 생각으로 범행을 준비했다. 미리 샴푸통에 넣은 휘발유와 라이터를 준비한 채 열차에 탑승한 그는 결국 되돌릴 수 없는 참사를 저질렀다.
당시 대구지방법원의 판결문에 따르면 김대한은 이 범행을 저지르기 전에도 수차례 난동을 부리는 '범행 전조 증세'를 보였다. 다리 위에서 자살 시도를 한 적도 있고 병원과 파출소에서 자신을 죽여달라고 여러 차례 소동을 벌였다. 지하철 참사를 저지르기 2주 전에는 담당 의사를 죽이겠다며 휘발유를 사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1심은 김대한이 실행 직전까지 범행을 망설였던 점,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 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던 점 등을 이유로 "사형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특별한 사정이 없다"며 김대한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는 항소심에서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 사고로 사망한 사람은 192명. 부상자는 151명에 달했다. 또 세월이 지나면서 부상자 가운데 치료를 받다가 숨진 이들도 크게 늘었다. 김대한은 사고를 낸 지 불과 1년 6개월 뒤인 2004년 진주교도소 수감 중 갑자기 사망했다.
당시 사고로 크게 다친 여고생의 어머니 A(65)씨는 "아직도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한 가정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 놓은 인간"이라며 20년 동안 품어온 분노를 표현했다.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에 마련돼 있는 기억공간 내 불탄 공중전화. 류연정 기자희생을 키운 부적절한 대처도 희생자들과 남은 가족들의 고통을 더 가중시켰다.
불이 난 열차는 1079호. 하지만 대부분의 사상자가 반대 방향으로 운행하던 1080호에서 발생했다.
당시 대구도시철도공사(현 대구교통공사)의 대처가 미흡했기 때문. 제대로 된 '안전 매뉴얼'이 있고 그대로 '실천'만 했더라면 사고가 1080호 열차로까지 번지지 않았을 것이다.
먼저 화재 발생 유무를 알릴 의무가 있었던 1079호 열차 기관사는 당시 불을 끄려고 노력했지만 곧바로 사령실에 상황을 보고하지 않았다. 20년 전에는 긴급 상황 발생 시 기관사의 역할이 명확하게 정립돼 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보고가 조금 더 신속·정확했더라면, 대처 역시 달라지지 않았을까'하는 안타까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사령실의 대처는 대구지하철공사 직원들의 '안전불감증'을 여실히 보여줬다. 불이 났다는 신고를 접수받고 정확한 화재 규모도 모른 채 1080호 기관사에게 "조심히 운행하라"는 지시를 한 것. 화재가 발생했을 경우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 뒤 전 열차 운행을 중단해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지만 직원들은 안일했다.
결국 대구역에서 출발한 1080호가 맞은편 선로로 들어왔고 불은 1080호 열차가 몰고 온 바람을 타고 더 확산했다. 여기서 1080호 기관사 역시 잘못된 선택으로 사고를 더 키웠다. 출발 전 열차 운행을 정지하거나 무정차 통과시켰다면 화를 면했을 텐데 그러지 않은 것이 첫 번째 잘못이다.
결국 아수라장이던 중앙로역사로 진입한 1080호 열차는 화마에 휩싸여 움직이지 않게 됐다. 기관사는 어떻게든 열차를 움직여보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사령실은 대피를 지시했다. 그러나 이미 7분의 시간이 지나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 이때 1080호 기관사는 두 번째 잘못된 판단을 한다. 그는 승객들이 다 대피했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하고 열차 내부를 확인하지 않은 채 키를 뽑아들고 대피했다. 전동차는 키를 뽑으면 출입문이 모두 닫히는 구조. 그 탓에 열차 내에서 기관사의 지시를 기다리던 많은 승객들이 숨지거나 다쳤다.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에 마련돼 있는 기억공간 내 불탄 ATM 기계. 류연정 기자주먹구구식 수습 과정은 피해자들뿐 아니라 많은 시민들에게도 충격을 안겨줬다.
대구시가 낸 지하철 백서 등에 따르면 사고 당일 밤, 대구지하철공사는 불에 그을린 1079호 열차와 1080호 열차를 견인했다. 그리고 다음날 화재 현장에 '물청소'가 실시됐다. 사망자 신원과 유류품도 확인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사고 현장을 하루 만에 훼손하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당시에는 현실에서 일어났다.
사고 이후 지하철 전동차 소재의 난연(難燃) 성능이 기준 미달로, 불에 잘 타는 성분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점도 많은 시민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화재의 직접적인 원인은 방화지만 문제가 있는 내장재를 사용한 탓에 불이 더 커진 것으로 드러난 셈이다.
A씨는 "잘못된 판단들이 사람을 그만큼 많이 죽이고 다치게 했다. 사령실에서 열차(1080호)를 출발만 안 시켰어도, 기관사가 무정차 통과만 했어도, 지하철공사가 열차 자재만 좋은 것을 썼어도…"라며 눈물을 보였다.
이외에도 대통령이 방문한다는 이유로 부상자 전원을 사고 2주 만에 강제 퇴원시키는 등 당시엔 상식 밖의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이동우 부상자 대책위원장은 "대구시가 대통령에게 부상자가 모두 완쾌됐고 사고 수습이 잘 되어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아직 몸이 아픈 사람들을 2주 만에 병원에서 퇴원시켰다. 대통령이 간 뒤 모두 재입원했다"고 전했다.
잘못된 대처들 가운데 일부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특히 상당수 유족들이 지난해 발생한 이태원참사를 언급하며 여전히 사회의 '안전 매뉴얼'은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압사될 것 같다"는 신고 전화가 쏟아지는데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경찰 대응 등에서 20년 전 사고를 키운 원인을 그대로 엿볼 수 있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