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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희 감독 "그럼에도 우리는 재밌게 살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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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초희 감독 "그럼에도 우리는 재밌게 살아야죠"

    [노컷 인터뷰] '찬실이는 복도 많지' 김초희 감독 ②

    지난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내자동의 한 카페에서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김초희 감독을 만났다. (사진=우상희 스튜디오 제공)

     

    ※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스포일러가 나옵니다.

    지난 5일 개봉한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감독 김초희)는 예상을 묘하게 빗나가서 더 재미있는 작품이다. 뒤풀이 자리에서 술 게임을 하는 것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그림이지만, 그 자리의 우두머리가 흥에 겨워 놀다가 갑자기 죽어버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들다. 여성인 주인공은 우연히 만난 낯선 남자에게 호감을 느끼고 꿈까지 꾸지만, 솔직함을 가장한 끈적함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우리 집에서 자고 갈 거냐는 질문과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누워만 있겠다는 답은 숱한 영화에서 본 집적거림을 조롱하는 것처럼 보인다.

    찬실(강말금 분)이 주변 사람과 관계 맺는 것도 마찬가지다. 왠지 모르게 살갑지 않은 태도에, 무언가 사연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주인집 할머니 복실(윤여정 분). 큰 잘못은 아니지만 곱씹을수록 기분 나쁜 상황이 등장해 둘 사이에 균열이 생기려고 하면, 싹둑 잘라버린다. 상황을 질질 끌지 않고 정면 돌파하기에 불필요한 오해가 생길 틈이 없다. 평소에 별로 깊이 생각하는 타입이 아닌 여성 배우 소피(윤승아 분)도 전형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찬실이 생계 곤란을 겪자 바로 자기 집에서 일하게 하고 생색내지 않으면서 자존감을 북돋아 준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궁금한 점이 많았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 세계의 인물들이 탄생한 배경도, 이 장면을 이렇게 연출한 까닭도 묻고 싶었다. 지난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내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초희 감독에게 질문을 쏟아낸 이유다. 김 감독의 답변은 구체적이면서도 흥미로웠다.

    일문일답 이어서.

    ▶ 찬실뿐 아니라 주변 인물들의 성격도 특색 있고 재미있더라. 소피가 당연히 영어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근심을 피한다는 뜻의 한자 이름일 줄이야!

    소피는 깊이 생각하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사람이고, 스스로 타고난 성정이 건강한 사람이다. 너무 생각이 없으면 민폐를 끼칠 수밖에 없지만, 적어도 이 영화 안에서만큼은 그런 인물이 있어야 찬실의 숨통을 틔워줄 거라고 생각했다. 좌절에 빠진 찬실에게 소피가 "이제 뭘 할 수 있겠어? 돈이라도 벌 수 있겠어?" 이렇게 평가를 했다면 얘긴 달라지지 않았을까. 근데 소피는 "언니가 돈을 왜 못 벌어?" 하면서 좋은 영향을 주는 거다. 찬실은 그런 소피를 부러워하고. '뭐든 잘 까먹는 소피가 부러워요' 하면서.

    결국 왜 괴롭겠나. 자의식이 너무 강해서 그런 거다. 정말 가까운 사람을 잃었다거나 불의의 사고로 몸을 못 쓰게 됐다거나… 세상에는 예기치 못한 끔찍한 불행이 깔려 있다. 살 이유가 엄청나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죽고 싶어 하고. 왜 그러겠나. 지나친 자의식과 성과주의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진짜 성과를 중시한다. 자본주의 자체가 성과주의니까. 거기서 누구 한 명 자유로운 사람이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살아있는 한 행복하게 살 권리와 의무가 있다. 찬실 같은(뜻밖의 불행을 겪은) 사람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재밌게 살아야 한다. 이 이야기가 사람들한테 위로가 되길 바란다. 좀 못 살아도. '그냥 이렇게 살면 어떻습니까' 그런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린 열심히 살고 있으니까, 각자 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주인공 찬실 역을 연기한 배우 강말금 (사진=지이프로덕션, 윤스코퍼레이션 제공)

     

    ▶ 찬실은 소피의 가사도우미로 일하면서 소피의 불어 선생님 김영(배유람 분)을 만나고 호감을 느낀다. 함께 성벽에 오르는 장면은 꿈인가.

    꿈인지 모르더라, 사람들이. 그 꿈 장면 앞이 회상 씬이라 시간대가 붕괴되어 있으니까 헷갈려 하는 것 같다. 모과나무를 보고 회상 장면으로 갔다가 바로 꿈으로 연결됐으니, 그 사이 물리적인 시간이 생략돼 있다. 익숙하지 않은 전개이긴 했다.

    ▶ 김영과는 결국 이루어지지 않는데 처음부터 그렇게 설정했나.

    아니다. 둘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결말도 있긴 했는데 이 시나리오 붙들고 있을 때쯤에 '안 이뤄지는 게 맞는 거구나!' 깨달았다. 어려운 시기에는 누구든지 위로나 의지를 필요로 한다. 그때 남자만큼 좋은 게 어딨겠나 싶지만 그게 진정한 위로라고는 할 수 없다. 그보다 중요한 건 정말 뭘 원하는지,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문제이지 않나. 그 시간을 지나야 한다. 사실 김영이라는 사람을 진짜 좋아한 것도 아니었다. 안 이뤄지는 게 맞다고 생각했고 결과적으로 안 이뤄져서 좋아했던 것 같다, 사람들이. 이뤄졌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선택을 했구나 하고, 기억조차 남지 않는 영화가 됐을 거다.

    ▶ 김영이 초반에는 로맨스 상대로 나오다가 찬실을 '누나'라고 부르면서 관계가 재설정된 것도 재밌었다.

    (찬실은) '누나' 소리에 정신이 확 들었을 거다. 차이길 잘한 거다. (웃음)

    ▶ 찬실이 새로 이사 온 집의 주인 할머니 복실은 왠지 모르게 미스터리하게 그려진다. 그렇게 캐릭터를 잡은 이유는.

    처음에는 좋은 할머니같이 안 보이지 않나. 잘 모르겠지 않나. 신경질적인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사연이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근데 그런 할머니가 사실은, 찬실이와 가장 깊게 연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안 지인한테 위로받기도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데서 새로 만난 인연이 위로가 될 때가 많다. 자기를 많이 아는 사람은 '많이 알아서' 제대로 된 위로를 못 해준다. 저는 할머니가 처음은 미스터리하고 츤데레(* 기자 주 : 속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 냉랭하게 구는 것)같이 하다가, 찬실이만큼 힘들었던 세월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서로 의지하는 인물로 바뀌는 게 더 좋지 않을까 했다. 전형적인 인물은 다 피하려고 했다. 할머니가 처음부터 따뜻하게 나오는 영화는 백만 번도 더 본 얘기 아닐까.

    ▶ 찬실과 복실 두 사람은 서로 오해할 상황이 생기는데도 그게 오래가지 않고 해소되더라. 그렇게 연출한 의도가 있나.

    캐릭터가 개성 있게 보이려면 성격의 특징이 빨리빨리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피상적이더라도. 저는 그림에 비유하면서 시나리오를 고쳤다. 사진 같이 세밀한 그림이 있는가 하면 캐리커처는 몇몇 선만 써도 이해할 수 있지 않나. 각 인물의 성격 특징이 빨리 씬 안에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보여주려는 게 많으면 그렇게 (시나리오를) 못 고친다. 소피가 생각 없고 잘 까먹고 뭐든 많이 배우려고 한다면, 복실은 딸 잃은 상처가 있고 한글 공부를 하고… 그런 게 씬 안에서 빨리 소개되는 거다.

    ▶ 극중 장국영(김영민 분)은 신비한 존재로, 찬실에게만 보인다. 그렇게 둔 이유가 궁금하다.

    이 영화가 개봉하기 전까지는 장국영이라는 캐릭터를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해 줄지 몰랐다. (웃음) 생각보다 이 캐릭터를 많이 재밌어해 주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내러티브가 강한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캐릭터가 독특해야 이 이야기를 끝까지 끌고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 더 독특한 캐릭터가 뭐가 있을까 하다가 판타지적인 인물을 생각했다. 영화에서만 할 수 있는 인물이라면 개연성이 좀 없더라도 개성이 뚜렷해야 한다고 봤다.

    장국영은 (영화 안에서) 실존 인물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시치미 뚝 떼고 들어와야 사람들에게 재미있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 이 영화 시나리오 쓸 때 제가 처음 영화 (일) 하려고 결심했던 그 언저리의 초심을 엄청 많이 생각했다. 영화를 그만두려고 했던 때라서. 내가 언제부터 영화를 좋아했나 하고 보니 중학교 때 홍콩 영화에 열광했던 세대더라. 장국영을 제일 좋아했고. (개인적으로는) 초심을 되찾기 위한 저의 소망도 있고, 그런 게 다 합쳐져서 나온 인물이라고 보시면 된다.

    찬실(강말금 분)은 친하게 지내는 여성 배우 소피(윤승아 분)의 불어 선생님인 김영(배유람 분)을 우연히 만나고 호감을 느낀다. (사진=지이프로덕션, 윤스코퍼레이션 제공)

     

    ▶ 찬실 역에 강말금 배우를 캐스팅한 이유는.

    이찬실이라는 역을 누가 맡는가, 하는 건 이 영화가 어떤 운명을 가지는가에 준하는 중요한 문제이지 않을까. 촬영이 임박해올 때쯤, 운명적인 만남이 성사되지 않는 한 이 역할을 과연 누가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 유명한 배우가 올 수도 있지만 제가 가장 중점에 뒀던 건 '모르는 얼굴이어야 한다'는 거였다. 그래야 찬실이를 찬실이로 봐줄 것 같았다. 찬실이는 여성 배우랑 같이 나오면서도 이질감이 없어야 했다. 일단은 모르는(낯선) 얼굴이어야 했고, 거기에 열심히 잘 살아온 듯한 얼굴이어야 했다. 저 사람은 자기 꿈이 있어서 개고생했지만 참 잘 살아온 인물이겠구나 하는.

    정동진영화제에서 우연히 강말금 배우가 연기하는 '자유연기'(단편)를 보았는데 지금의 찬실이랑은 굉장히 많이 다른 캐릭터였다. 독박육아에 시달리는 되게 힘든 캐릭터였는데, 그 얼굴에서 저는 찬실이를 봤다. 되게 열심히 살았고 뭔가 자기 꿈을 열망했던 사람! 강말금 배우가 찬실이가 되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서울 와서도 계속 생각나서 연락처 수소문해 메일 보내고 만났다. 30분 정도 지났을 때 이 영화를 같이 해 보겠다는 이야기를, 둘이 자연스럽게 하고 있더라. 너무 물 흐르듯이. 부산 사투리,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할 줄 아는지 저는 심지어 몰랐는데, 얘기하다 보니까 부산 출신 배우더라. 그때 찬실이를 사투리 쓰는 역할로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 다른 배우들이 어떻게 합류하게 됐는지도 궁금하다.

    윤여정 선생님은 제가 PD였을 때부터 친분이 두터운 배우였다. (연출자에 대한) 믿음으로 출연하신 게 아니라 그냥 '김초희 한 번 도와주겠다' 그렇게 생각해서 출연하시게 된 거다. 김영민 배우는 우연히 '라디오스타'를 봤는데 사람들이 중화권 배우 닮았다고 하더라. 그분 외모에 장국영, 유덕화, 양조위가 있더라. 실제로 뵀을 때는 연기를 너무 잘하셔서 제가 써 놓은 장국영보다 훨씬 더 귀엽게 만들었다. 날개 달고 날갯짓을 해 주셨다. 이 자리를 빌려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한다.

    김영 역할은 저의 단편영화 '산나물처녀'에 출연해 준 배유람 배우가 했다. 제가 프로듀서였을 때 같이 작업도 했다. 이 시나리오의 초고부터 계속 모니터하면서 저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줬다. 김영은 원래부터 유람이가 하기로 돼 있었다. 제가 단편에서 사람이 아니라 사슴 역할을 시켰는데 다음에는 사람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다음에 시나리오 쓰면 멋있는 역할 줄게, 했고. 시나리오 보여줬을 때 하겠다고 하더라.

    ▶ 영화 프로듀서와 감독 두 가지를 다 겪어봤는데, 어떤 일을 하는 직업인지 이제는 정리할 수 있나.

    어쨌든 영화를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포지션만 다른 거지. 이 일을 할 수 있는 가장 큰 동력은 자기가 그 일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이지 않을까.

    ▶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장편영화 데뷔작이다. 어쩌면 조금 늦은 나이(46세)에 데뷔한 건데 장편영화를 내놓은 소감은 어떤가.

    확실히 나이가 주는 지혜가 있다. 엄청 기다려 왔다면 기다려 온 순간인데 그 감상에 빠지지는 않는 것 같다. 꿈을 이뤘다기보다… 제 영화를 세상에 내놨더니 이런 평을 듣는구나, 이런 반응이 있구나 하고 있다. (관객 반응이) 감사하면 더 열심히 하는 거고, 정말 재능이 없으면 그만두는 거고, 그건 저도 가봐야 알 것 같다. 많은 사람이 (영화를) 자유롭게 볼 수 있는 환경이 안 주어졌고, 어려운 시기에 개봉했다는 안타까움은 있다. 지금 이 시기엔 큰 용기를 내어야만 극장에 갈 수 있는데, 그래서 (관객) 반응도 더 센 것 같다. 감사한 마음이 크다. 기쁘다.

    ▶ 이번 영화를 만들면서 내가 얼마나 영화를 사랑하는지 깨달았나.

    제가 앞으로 영화를 계속하고 있다면, 여전히 영화를 사랑하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앞으로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인생이 계획대로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지 않는 한 해볼 생각이다. <끝>

    왼쪽부터 장국영 역 김영민, 복실 역 윤여정, 소피 역 윤승아 (사진=지이프로덕션, 윤스코퍼레이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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