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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마지막까지 '평화통일'기원한, 민주와 평화의 동역자 이희호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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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마지막까지 '평화통일'기원한, 민주와 평화의 동역자 이희호 여사

    지영한 칼럼

    1일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이희호 여사의 빈소. (사진=이한형 기자)

     

    10일 오후 97살의 일기로 별세한 고 이희호 여사만큼 우리 현대사에서 다양한 수식어로 평가받는 인물은 많지 않다.

    우리에게 익숙한 고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하며 얻은 'DJ 동역자'로서의 삶은 민주화 운동의 역사 그 자체로 기억된다.

    1962년 정치인 김대중과 결혼한 이희호 여사에겐 박정희, 전두환 등 독재정권의 압박과 탄압이 그림자처럼 뒤따랐다.

    끊임없이 고통과 고난이 이어졌만 오히려 국외 망명중인 남편에게 "더 강하게 투쟁하라"고 독려할 만큼 고 김 대통령의 강력한 지지자이자 조언자로 역할 했다.

    오죽했으면 김 대중 대통령이 "아내가 없었더라면 내가 오늘날 무엇이 되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다. 모두 내 아내 덕분이다"고 이 여사에게 감사를 표했을까.

    하지만 '민주주의자'로서 이 여사의 철학과 신념을 잘 보여주는 것은 양심수가족협의회 등 민주화운동 단체를 조직하고 독재정권에 직접 맞섰다는 데 있다.

    단순히 정치인 남편을 내조하는 데 머물지 않고 우리 정치사의 한 장을 차지하는 '민주화 운동의 동역자'이자 '민주진영의 대모'로 자리매김 했던 것이다.

    (사진=연합뉴스)

     

    아직도 여성 국회의원의 비율이 17%에 불과한 우리의 척박한 정치 현실을 타개하는데 무엇이 필요할지 시사한다.

    정치사 못 않게 '1세대 여성운동사'에 까친 고인의 족적은 더 넒고 깊다.

    미국유학을 마친 뒤 YWCA 총무 등을 역임하며 줄곧 여성운동에 나선 이 여사는 평생을 여성 권리를 높이는데 헌신했다.

    1989년 가족법 개정을 비롯해 가정폭력방지법 제정, 여성가족부 창설 등 수 많은 여성 인권 운동의 성과에 고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한다.

    집 앞 대문에 '이희호 김대중' 문패를 나란히 게시한 일화처럼 스스로 남녀평등의 이념을 실천하려는 의지와 추진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보여진다.

    페미니즘에 정통한 김 대중 전 대통령도 "아내 덕에 인류의 반쪽을 찾았다"고 했을 정도이다.

    무엇보다 이희호 여사는 '평화의 전도사'로서 통일운동에 큰 기여를 한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사진=연합뉴스/자료사진)

     

    2009년 9월에 김대중 평화센터 이사장직을 맡은 고인은 고령의 나이에도 김정일 사망 방북 조문과 김정은 초청 평양 방문 등 남북간 화해와 협력 분위기 조성에 힘을 쏟았다.

    이희호 여사는 11일 공개된 유지를 통해서도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국민을 위해,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밝혔다.

    격변기 선각자로서의 활동 속에서 얻은 혜안과 통찰력으로 이 시대 우리 민족이 나가야 할 길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한 것이다. 뜨거운 조국애에 옷깃을 여미고 고개를 숙인다.

    이제 영원한 동지 '인동초'의 곁에서 영면하시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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