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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청룡봉사상 시초, '제주4·3, 인혁당' 인물들 요정만남



사건/사고

    [단독] 청룡봉사상 시초, '제주4·3, 인혁당' 인물들 요정만남

    조선일보 사주·주필·국회의원·경찰총수 고급요정서 만나 첫 논의
    상 제정 논의한 경찰 총수는 '1차 인혁당 사건' 담당 검사
    금암 최치환 제주 4·3 사건 당시 토벌대 지휘, 김무성 장인
    역사계 "민갑룡 청장 4·3 사죄하더니 진정성 의심돼"

    지난 1967년 조선일보 청룡봉사상 탄생 과정에서 '제주 4·3 사건' 당시 경찰 부대를 지휘한 인물과 '인혁당 사건' 검사 출신 경찰 총수가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조선일보 고(故) 방우영 전 회장과 모인 사모임 자리에서 청룡봉사상을 만들기로 결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민갑룡 경찰청장이 제주 4·3 사건을 공식 사과하는 등 적폐 청산에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논란이 되는 상을 경찰이 그대로 강행하는데 대한 학계 비판도 거제지고 있다.

    ◇'고급 요정'에서 논의 시작된 청룡봉사상, 제주 4·3 진압한 최치환도 참여

    청룡봉사상은 경찰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포상제도로 만들어졌다. 왼쪽은 1회 청룡봉사상 내용에 대한 요강. 오른쪽은 제3회 청룡봉사상 시상식. (사진=청룡봉사상 홈페이지 캡처)

     

    조선일보 고(故) 방우영 전 회장이 지난 2008년 발간한 회고록<나는 아침이="" 두려웠다="">에는 청룡봉사상 제정 과정이 자세히 나온다.

    회고록에 따르면 청룡봉사상은 1967년 1월 방 회장과 조선일보 최석재 주필, 국회의원 금암 최치환, 내무부 치안국장 한옥신 등 네 명이 고급요정에서 만남을 가지면서 처음 논의됐다.

    조선일보 사주와 주필, 유력 정치인과 경찰 총수가 모인 장소는 바로 서울 종로구 청진동 '장원'이었다. 이 곳은 60~70년대에 '요정(料亭) 정치'라는 말을 낳은 고급 한정식집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은 물론 정치인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던 곳이다.

    이날 만난 네 사람은 모두 경찰과 인연이 있었다.

    방 회장은 "최(치환) 의원은 32세에 경찰 보안과장을 거쳐 서울 시경국장을 지냈고, 최(석재) 주필은 해방 후 경찰서장까지 했다"면서 "나는 대학 졸업 후 1·4후퇴 때 최 의원 덕분에 경찰에 특채되어 지리산지구 전투경찰본부에 근무했다"고 썼다.

    이들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경찰 이야기로 모아졌고, 경찰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포상제도를 만들자고 뜻을 같이하는데 이것이 청룡봉사상의 시초였다.

    금암(錦巖) 최치환(1922~1987)은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 1년 후배로 알려졌다. 해방 후 경찰 요직을 거쳐 1958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비서관도 맡았다. 1960년 4·19 혁명 당시엔 공보처장이었고, 박정희 정권에서 3선의원을 지냈다. 1962년 조선일보 상담역을 맡으면서 조선일보와 연을 맺었다.

    특히 그는 군·경의 무력 진압으로 수많은 양민이 희생된 '제주 4·3 사건'의 경찰 토벌대 지휘관이기도 하다.

    내무부 치안국이 지난 1972년 발간한 '한국경찰사'에는 최 의원(당시 총경)이 1948년 4월3일 제주 진압 토벌대의 작전참모를 맡았다고 나온다. 금암회(기념사업회)가 밝힌 최 전 의원의 약력에도 최 의원이 제주 사태 진압 작전참모로 수백명을 소탕했다고 돼 있다. 최 의원은 자유한국당 김무성 의원의 장인이기도 하다.

    ◇ 1차 인혁당 담당검사 한옥신도…"독재정권에 부역한 인물들이 만든 상"

    (사진=청룡봉사상 홈페이지 캡처)

     

    한옥신 치안국장은 '1차 인혁당 사건(1964년)'의 담당 검사였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이 반대자들을 반국가단체(인혁당)로 조작해 재판하고 징역살이를 시킨 사건이다. 당시 한옥신은 다른 검사들이 증거가 부족하다며 기소를 거부하는 가운데 이 사건을 맡아 항소 끝에 13명의 유죄 판결을 이끌어냈다.

    이후 중앙정보부는 1974년 유신반대 투쟁을 벌인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의 배후로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하고 1차 사건 연루자들을 다시 잡아들였다. 8명의 사형을 선고한 뒤 18시간 만에 형을 집행했는데, 이게 '2차 인혁당 사건(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다.

    1975년 4월 9일, 서대문 형무소 앞의 시노트 신부. 시노트 신부는 인혁당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앞장섰던 인물이다. (사진=MBC제공/자료사진)

     

    두 인물이 관여한 '제주 4·3 사건'과 '인혁당 사건'은 모두 역사의 재평가를 받았다.

    국방부는 지난 4월 3일 제주 4·3사건에 대해 71년 만에 처음 유감을 표명했다. 민갑룡 경찰청장도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추념식에 경찰총수 최초로 참석해 민간인 희생자를 애도했다. 민 청장은 "무고하게 희생된 분들 영정에 머리 숙여 애도한다"며 "경찰의 행위에 대해서도 반성적으로 성찰하면서 오로지 국민을 위한 민주·인권·민생 경찰이 되겠다"고 했다.

    2차 인혁당 사건은 이미 2002년 대통령 직속기구인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중앙정보부의 조작극임이 밝혀졌으며 기습 사형 당한 8명은 2007~2008년 재심에서 모두 무죄를 받았다. 1차 인혁당 사건의 피해자 9명도 2013년 재심에 걸쳐 무죄를 선고받았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기획실장은 "경찰이 최근 임시정부를 자신들의 뿌리라고 선포하고 올해 4·3 추모식에는 민갑룡 청장이 참여해 당시를 반성하는 글도 썼다"면서 "그런데 독재 정권이 했던 일에 부역한 인물들이 만든 상 하나도 폐지하지 못하고 있다. 진정성이 의심되는 지점"이라고 강하게 질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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