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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0년만에 이름 되찾은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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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중원 2대 원장 존 헤론 기념관 9일 개관

    존 헤론 박사 옛 묘비(사진=연세대 제공)
    2010년까지만 하더라도 연세대학교 용재관 뒷편에는 워싱턴 기념탑을 사람 키높이만큼 축소해놓은 비석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이 비석이 어떤 비석인지, 어떤 사연을 갖고 있는지, 왜 연세대에 세워졌는지 알지 못했다.

    교정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있던데다 비석에 새겨진 글씨도 심하게 마모돼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곳저곳이 부서지고 깨진 모습에 한국 근현대사의 풍상을 함께 했을 것이라는 추정만 해볼 뿐이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 2010년 어느날 비석은 거센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박물관 직원이 쓰러진 비석을 살펴본 끝에 희미한 각자 더미에서 'JOHN W. HERON, M.D.'이라는 글씨를 어렵게 찾아냈다.

    존 W 헤론. 미국의 북장로회 소속으로는 최초의 조선 의료선교사로 임명돼 1885년 조선에 입국한 뒤 5년간 제중원을 이끌다 조선 땅에서 숨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처음 안장된 인물이다.

    영국에서 태어난 헤론은 테네시 의대와 뉴욕대 의대를 졸업한 뒤 선교사명을 자각하고 조선행을 결심한다. 1884년 교단 최초로 조선 파견 의료선교사로 임명됐지만 같은 교단 속으로 중국에서 역시 의료선교 활동하고 있던 호레이스 알렌이 조선으로 선교지를 바꾸면서 조선 입국은 1885년 6월에야 하게 된다.

    헤론은 미국에서 함께 온 아내와 조선에서 두 딸을 낳으며 조선 최초 근대식 의료기관인 제중원에서 환자 치료에 전념한다.

    그러나 1890년 7월 헤론은 이질에 걸려 보름만에 사망한다. 헤론의 동료들은 조선 정부에 헤론의 묘지를 마련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조선 정부는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

    한여름 땡볕에 헤론의 시신이 부패할 것을 염려했던 동료들은 급한대로 그가 살던 서울 정동의 집 뒷마당에 가매장하려 했으나 인근 주민들이 격렬하게 반대하면서 무산됐다.

    결국 외국 사절들까지 나서 조선 조정에 묘지 마련을 강력히 촉구한 끝에야 양화진 묘소를 마련할 수 있었다. 양화진 외국인 묘지의 첫 출발점이었다.

    헤론 사망 뒤 조선에 남아 있던 부인도 1908년 사망해 두 부부는 합장됐다. 그리고 부인도 묘비에 추가됐다.

    묘비에는 '我儕若信耶穌死而 復活也當信神因耶 穌必將那死了的人 和耶穌一同領來'(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데살로니가전서 4:14)라는 성경 구절이 한자로 새겨졌다.

    헤론 부부와 함께 있던 묘비는 일제와 해방정국,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부서지고 깨졌다.

    한국전쟁의 상흔이 어느 정도 치유되던 1959년 외국인 선교사 일행이 헤론 부부의 묘소에 새 묘비를 세우면서 옛 묘비는 연세대로 옮겨졌다.

    하지만 이후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이름모를 묘비'로 다시 잊혀졌다가 2010년 비바람 속에서 이름을 찾게 됐다.

    연세대는 오는 9일 오후 3시 의과대학 임상의학연구센터 1층에서 헤론기념관 개관식을 갖고 헤론의 옛 묘비와 유품을 공개한다.

    연세대 박형우 의과대학 교수는 "헤론 박사는 자기희생의 모범"이라며 "이같은 차원에서 헤론기념관을 열게 됐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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