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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노년의 고백, '마음속 빈방으로의 초대'



책/학술

    박완서 노년의 고백, '마음속 빈방으로의 초대'

    신간 '빈방'

     

    “빈방이 많아 사는 게 이렇게 매일매일 허전하고 허망한 줄 알면서도 남에게 내줄 빈방은 없습니다.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빈방이라면 잠긴 방과 무엇이 다르리까.”

    죄 없는 고통 앞에서 인간은 ‘왜’를 묻는다. ‘왜 하필 나인가?’ ‘이런 끔찍한 일은 왜 벌어지는가?’ ‘신은 왜 이런 부조리를 눈감는가!’ 고 박완서 작가 또한 그랬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누구보다 아름답게 살아낸 친구의 죽음이나 숱한 사람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은 대형 참사 앞에서 그는 극심한 분노와 의혹에 시달리고, 다리 없는 몸을 바닥에 끌며 구걸하는 이의 찬송을 들으면서는 “주님, 저 불쌍한 이한테까지 찬양을 받으셔야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너무 잔인하십니다.”라며 원망하기까지 한다.

    스스로를 “차가운 이기주의자”라 칭한 박완서 작가는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천주교 '서울주보'에 그 주일의 복음을 묵상하고 쓴 ‘말씀의 이삭’과 이를 엮어낸 산문집 '빈방'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제가 예수에게…사로잡혔다고는 하나 곧이곧대로 믿은 건 아니었습니다. 이건 분명히 위선일 것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예수의 위선을 까발리기 위해서 성서를 통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서를 읽는 동안 작가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그토록 냉랭하게 말할 것은 없지 않느냐, 귀신 들린 딸을 구해달라는 여인에게 그렇게 야박하게 구는 법이 어디 있느냐며 예수께 따지고 든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산상수훈에 대해서도 그랬다. “예수님이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의 옹호자로 오신 것은 알겠지만 마음까지 가난하라니요?…그건 당신이 일관되게 설하신 사랑이나 나눔의 정신과도 앞뒤가 안 맞아 더욱 혼란스럽습니다.”라며 의문을 표한다. “가난한 마음이란 혹시 빈자의 창고처럼 열린 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 끝에 그는 가난한 마음이란 곧 “겸손한 자유인”을 뜻함을 스스로 깨친다.

    박완서 작가는 의심했기에 오히려 곳곳에서 마주할 수 있었던 예수의 사랑을 '빈방'을 통해 증언한다. 이불을 널다 발견한 봄날 들꽃에서 부활을, 지하철역 앞에서 떡을 파는 아주머니의 옷깃에 달린 어버이날 종이꽃에서 생명을 목격하며, 일 못하는 파출부가 남기고 간 일거리를 기쁨으로 정돈하는 친구에게서 예수와도 같은 연민의 정을 발견한다.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성서 속 예수의 행적을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읽고 고민한 끝에 작가는 인간의 의지를 정련하는 생의 고난이 곧 신의 사랑임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비극 앞에서조차 보다 견결해지고야 만다.

    “당신의 시신을 지상으로 내려서 널 위에 뉘었을 때 피 묻고 찌그러지고 너덜너덜해진 당신의 육신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비참의 극치군요.…그걸 피하지 못했으니 당신은 철두철미 인간이었고, 그걸 피하지 않았으니 당신은 정말로 인간도 아니군요. 당신의 참혹한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하느님이 계신가 안 계신가는 그닥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이란 바로 제 자식도 이렇게 죽일 수 있는 아버지, 엄혹 그 자체라는 깨달음이 전율처럼 등줄기를 스쳤습니다.”

    박완서 작가에게 성서-예수를 이해하는 일은 곧 삶의 이치와 자연의 섭리를 알아가는 일이었다. “오십이 넘어서 가톨릭 신자가 되었는데도…너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였던 게 아닌가.” 했던 것 또한 그 때문이었다. 그는 백화점에선 암말 않으면서 노점에서는 깎아달라 조르는 자신을 “죄인 중에도 가장 얼굴 가죽 두꺼운 죄인”이라 나무라며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부끄러움이 뭔지 깨닫게 하소서.”라고 기도했고, 성서 속 예수와 같이 소박한 식사를 나눔으로써 모든 생명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자리를 꿈꾸었다. 연민과 사랑, 그리고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겸허한 마음으로 써 내려간 '빈방'은 노년기 박완서 작가의 내밀한 고백이자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신과 인간에게 올리는 헌사다.

    책 속으로

    세상을 환하게, 그리고 샅샅이 비추면서 어둠을 몰아낸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우쭐해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 어떻게 빛이 되죠? 저더러 촛불이나 횃불, 등잔불처럼 제 몸을 태워 빛을 내라고는 마옵소서. 어떻게 태어난 인생인데 제 몸을 태우라 하십니까. 허나 아무리 찾아봐도 몸을 태우지 않고 빛을 발하는 물건은 눈에 띄지 않는군요. 우리가 거저 진정한 빛이 될 수 없는 거라면, 빛이 되라는 말씀은 이웃을 위한 자기희생을 돌려서 그렇게 말씀하신 게 아닌가 싶어집니다.
    그렇다면 주님, 빛이 되는 것도 사양하겠습니다. 그 대신 제 언행이 주님의 빛을 기리며, 부지런히 따라 움직이는 해바라기가 되게 하소서. 금력이나 권력을 따라 움직이는 해바라기가 안 되는 것만도 저로서는 얼마나 힘든 일인지 헤아려주소서.
    「차라리 해바라기가 되게 하소서」 중에서, 32쪽

    시청 앞에서 전철을 타고서야 내가 아침에 기도한 생각이 나면서 마치 주님을 온종일 내 심부름꾼으로 부리고 있었던 것처럼 으쓱해졌다. 그래서 또 한 번 기도를 했다. “주님, 전 지금 몹시 피곤합니다. 저한테 자리 하나만 내주십시오.” 전철은 러시아워를 넘기고 한산했기 때문에 그 소망쯤은 쉽게 이루어질 줄 알았다. 그러나 웬걸, 성내역까지 올 동안 어쩌면 내 근처에서 빈자리가 하나도 안 났다.
    “주님, 정말 이러시깁니까?” 이렇게 대들려는데 주님이 빙그레 웃으시며 꿀밤을 한 대 먹이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넌 왜 나를 떠보려 하느냐?” 그러나 무서운 얼굴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도 혀만 한 번 날름 내밀고 말았다.
    나는 악마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을까 별로 궁금하지 않다. 나는 안다. 악마가 나처럼 생겼으리라는 것을. 왜냐하면 나는 주님을 떠보는 데 선수니까.
    「주님, 정말 이러시깁니까」 중에서, 41~42쪽

    길고긴 초겨울 밤 출출할 무렵 뜨끈뜨끈한 고사떡은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도 은근히 기다려지는 맛있고 든든한 먹거리였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건 단지 속담이나 비유만이 아닌 것이, 누구네 집에서 고사를 지낸다는 것만 알면 아닌 게 아니라 동치미 국물을 떠다 놓고 기다렸다. 고사떡 할 형편이 안 되는 집도, 또는 그런 것을 해본 적이 없는 젊은 새댁도 남에게 얻어먹은 것을 갚기 위해서라도 고사라는 걸 지내야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그러니까 그 시절의 고사는 미신적인 기복의 의미보다는 이웃과의 나눔과 친교의 의미가 더 깊은 것이었다.
    나는 시어머님이 계셔서 그분이 주관해서 떡도 하고 빌기도 하니까 심부름이나 했지 그게 좋다든가 나쁘다든가 하는 비판 의식 같은 건 품을 엄두도 못 냈다. 그래도 떡시루 앞에서 뭘 그렇게 정성스럽게 비실까 궁금해서 한번은 그걸 여쭤본 적이 있다. 그분의 대답인즉 “신령님, 제 마음 다 아시지요? 제 마음 다 아시지요?”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도 뜻밖의 대답에 웃고 말았지만 그 말씀은 지금도 나에게 가장 간결하고 아름다운 기도문이 되어 남아 있다. 그분은 돌아가실 때까지 종교를 갖진 않았지만 그 간단한 말 속에 함축된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일치와 친교에의 갈망과 어린애 같은 신뢰야말로 바로 종교적인 심성이 아니었을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중에서, 149쪽

    죽음이 무서운 것은 혼자 가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저승에 천당이라는 데가 있다면 제가 이승에서 사랑한 꽃들보다 더 예쁜 꽃, 더 아름다운 나무, 더 빛나는 햇빛, 더 상쾌한 물결, 더 찬란한 노을, 더 명랑한 새소리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승에 떼어놓고 가는 피붙이나 친구들이 그곳에 있을 리가 없다면 그 좋은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데려가서는 절대로 안 되는, 그러나 차마 헤어지기 싫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서 혼자 가야 하는 절대 고독은 생각만 해도 무섭고 끔찍합니다.
    주님, 저에게 천당을 허락하지 않으셔도 좋으니 부활의 희망만은 죽는 날까지 버리지 않게 하소서.…제가 꿈꾸는, 제게 합당한 부활은 저의 전체 중 가장 미소한 일부인 저의 좋은 점으로 하여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스며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저를 잊지 않고 저를 향해 마음의 문을 늘 열고 있기를 바라는 건 아닙니다. 그들이 저를 향해 굳게 문 닫고 있다 해도 가끔 그들 사이로 돌아와 바람처럼 공기처럼 스며들어 그들과 하나가 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자주 저를 기억하지 않는다 해도 슬플 때 제가 생각난다면 기쁨이 되고, 어려울 때 제가 생각난다면 힘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 제 육신을 떠난 영혼에 그러한 자유를 주신다면 임종의 순간에도 결코 두렵지 않으리이다.
    「내가 꿈꾸는 부활」 중에서, 283~2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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