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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원 산문집, '명치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책/학술

    이지원 산문집, '명치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신간 '명치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는 뉴타운 월세 아파트 주민이자 두 아이의 아빠이며 (개저씨가 되기 싫은) 아저씨 입문자 이지원의 산문집이다.

    나이 마흔에 접어든 젊은 중년 이지원은 하루에도 열댓 번씩 솟구치는 분노를 경험한다. 갑자기 땅에서 솟아나 제 용건만 묻고 사람을 놀래고 가는 아줌마나 마트 카트에 아들내미를 태우고 황홀한 드리프트를 구사하는 아저씨, 대형 마트에서 파는 물이 빠지지 않는 플라스틱 비누각과 24시간 편의점에서 구입했으나 원하는 대로 뜯어지지 않는 과자 봉지 등에 시달린다. 이웃의 배려나 제작자의 양심, 자족적인 라이프스타일을 기대하는 독자에게는 선뜻 추천하기 힘든 책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전혀 힐링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익히 들어 온 허망한 허공 비난 대신 제 살 깎아먹기를 통한 자기반성(인분 교수를 들어 교수의 ‘철밥통 근성’을 욕하는 저자 역시 현재 대학교 조교수로 재직 중), 충고이기는 하나 배꼽 빠지게 웃긴 볼멘소리 등에서 꽤 신선한 감정 순화를 체험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자아 성찰이나 사색의 여유를 거창하게 생각하며,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 훗날로 미뤄 두는 라이프스타일을 고수할 때 저자는 그저 조금 소박해졌다. 아침 두 시간을 집중이 필요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 각별히 떼어 놓고, 그중 첫 20분은 커피 내리기에 투자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맑은 물을 옆에 놓고 커피콩을 간다. 커피콩은 생각보다 단단하다. 그라인더로 와그작와그작 미친 듯이 갈면 손목이 꺾일 듯이 아프다. 고소하면서 신 내 나는 커피가루는 주변에 은밀한 분위기를 부여한다. 세상 모든 고뇌를 다 짊어진 남자처럼 미간을 찌푸리고, 마치 뒷골목에서 마약을 제조하는(하지만 원빈처럼 잘생긴) 범죄자 느낌으로 무심하지만 섬세하게 커피가루를 사락사락 옮겨 담는다. 방금 전까지 똥줄 빠지게 그라인더를 돌려 대며 실추한 멋스러움을 극적으로 만회한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거만하게 잔을 내려다보며 뜨거운 물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공급한다. 이때는 목마른 죄수를 약올리는 간수가 된 기분이다. 얄궂게 두세 방울씩 떨어뜨리는 물방울을 커피가루가 탐욕스럽게 빨아들인다. 이때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으면 더 멋지다. 한때 커피 메이커가 해 주던 일을 내 손으로 직접 처리하기 시작한 이후로 나는 아침마다 커피 내리기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그 대가로 한층 멋있어졌다.ㅡ본문에서

    자작나무 오솔길을 바라지도 않는다. 산책할 수만 있다면 재개발 촉진 기구조차도 훌륭한 지면을 제공해 주지 않는가.

    역사상 수많은 위대한 사상이 이 간단한 걷기 활동에서 비롯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보라. ……도시인의 영광과 좌절이 매일같이 벌어지는 무대인 이곳, 아파트와 원룸 주택이 빽빽한 이 재개발 촉진 지구 골짜기가 나의 생각을 펼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라는 사실을 깨달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도시인의 사색은 쓸쓸하기보단 치열하고, 평화롭기보단 전투적이다. ……이 길을 따라 거대 아파트 무리가 협곡을 이루고, 경전철 공사 중장비가 굉음을 내며 땅을 두드린다.ㅡ본문에서

    불행은 그보다 더 훌륭한 선생이다

    아저씨의 악명은 아줌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 심지어 개저씨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요즘 SNS에서 「꼰대가 되지 않는 방법」이라든지, 「회식자리에서 진상인 상사」, 「40대에 하지 말아야 할 말들」과 같은 글이 자주 눈에 띄는 걸 보면, 아저씨 집단이 받는 미움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아저씨가 진상인 이유는 아줌마보다 악질적이다. 아저씨에게는 타인을 얕잡아보고 굴복시키려는 악랄한 권력욕이 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 싶으면 어떻게든 뜯어고치려고 안달이다. 하지만 강한 상대 앞에서는 표정을 싹 바꾸고 비굴한 아첨에 돌입한다. 이보다 더한 꼴불견이 어딨겠는가.ㅡ본문에서

    그리고 저자는 잘못된 인간에게 아첨하느라 소모하는 노력을 자신을 필요로 하는 분야에서 정당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에 쏟는 편을 선택했다.

    교육 철학이나 비전에 대해서는 일말의 언급도 없다. 현재 대학생들이 감내하는 온갖 어려움과 무관하게 이 광고는, 이 글자꼴은 현기증 나게 낙관적이다. 그렇다. 대학교는 꿈을 만나는 곳이니까, 대학생은 망설이지 않는 청춘이니까 저런 가증스러운 글자꼴이 어울리겠지. ……(나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세상 한구석에서 사락사락 글자꼴을 자아낸다. 그리고 사람들은 책에, 광고에, 스마트폰에, 도로 표지판에 뿌려진 그것을 눈으로 흡수한다. 훈훈한 얘기다. 마치 구둣방 할아버지와 난쟁이 요정같이.ㅡ본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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