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고두고 볼 만한 좋은 그림책이 많다. 하지만 '그림책은 어린이용'이라는 선입견이 많고, 대중에게 그림책을 알릴 수 있는 자리가 적어 좋은 그림책이 그대로 묻힌다. CBS노컷뉴스는 창작 그림책 작가를 릴레이 인터뷰한다. [편집자 주]| 기사 게재 순서 |
① '진짜 코 파는 이야기' 이갑규 ② '엄마는 회사에서 내 생각해?' 김영진 ③ '괜찮아, 선생님이 기다릴게' 김영란 ④ '망태 할아버지가 온다' 박연철 ⑤ '꽃할머니' 권윤덕 |
한국 그림책 작가 1세대인 권윤덕(55)은 사회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작가로 유명하다.
1995년 '만희네 집'으로 데뷔한 권윤덕 작가는 '일과 도구', '시리동동 거미동동', '피카이아' 등을 통해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을 표현했고, 2010년 '꽃할머니'를 국내 출간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환기시켰다. 그림책 '꽃할머니' 제작 과정에 얽힌 이야기는 2013년 '그리고 싶은 것'(감독: 권효)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한중일 평화그림책 프로젝트의 일환인 '꽃할머니'는 아직도 일본에서 출간되지 못하고 있다. 권 작가는 "아베정권이 들어서면서 한일 관계가 더 악화했지만 일본 내 출간을 위해 계속 노력하겠다. 그것이 작가의 역할"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권 작가는 올 가을 제주 4.3항쟁을 소재로 한 그림책을 출간할 예정이다.
그림책 작가 권윤덕
▲ 올해로 데뷔작 '만희네 집'(1995년)을 출간한지 20년 됐다. 감회가 새로울 것 같다아들 만희(26)가 6살 때 '만희네 집'이 나왔으니까 올해로 딱 20년 됐네요. 오래 전 시댁에 들어가서 살았는데, 집안 곳곳에 어머님이 쓰시던 물건들이 많았어요. 방에는 재봉틀, 광에는 놋그릇, 창고에는 농기구, 부엌에는 가마솥, 장독대에는 항아리가 잔뜩 있었죠. 전통이 남아 있는 단독주택에서 마당 쓸고, 화단 가꾸고, 강아지 밥 주는 일상을 보내면서 '이 안에 삶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하구나' 느꼈어요. 지금 우리 삶에 과거가 어떻게 녹아있고,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싶어서 '만희네 집'을 그리게 됐죠. 대가족이 오순도순 모여 살던 공간에 대한 추억 때문인지 '만희네 집'은 여전히 찾는 분이 많아요.
▲ 2013년 출간한 그림책 '피카이아'는 여러모로 특이하다. 보기 드문 장편 그림책(137쪽)인데다 여리고 작은 생명체 '피카이아'를 소재로 삼았는데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보니 원고 분량이 꽤 나왔어요. 기존 그림책 형식(48쪽)으로는 모두 담아내기 어려우니까 '그림소설'처럼 쓴 거죠. 책에 나오는 '피카이아'는 인간의 먼 조상이에요. 우월하지는 않지만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생명체죠. 책에 등장하는 상민, 미정, 윤이, 채림, 혁주는 각자 처한 상황이 다른데 모두 힘든 시기를 잘 견뎌낼 거라 믿어요. 남보다 우월한가, 우월하지 않은가에 상관없이 인간은 스스로 치유하고 성장하는 힘이 있으니까요. 책에 글이 많으면 주제를 이해하기 쉬울 줄 알았는데 (독자들이) 여전히 어렵다고 하네요. 하하
▲ 한중일 세 나라의 작가들과 출판사들이 함께 만드는 평화그림책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2010년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한 '꽃할머니'를 국내 출간했는데, 위안부 문제를 다룬 이유는?2007년 해당 프로젝트를 제안받았을 때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가장 먼저 떠올랐어요. 할머니들한테 늘 죄송스럽지만 그렇다고 매주 수요집회 가서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내 위치에서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결론은 '그림책을 통해 이 문제를 알리자'였죠. 프로젝트에 참여한 일본 여성작가들(와카야마 시즈코, 하마다 게이코)도 '내가 한국작가였어도 위안부 문제를 가장 먼저 다뤘을 것'이라며 제 생각을 지지해줬어요. 공동 작업이니까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일본으로부터 이런저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했죠.
▲ '꽃할머니' 작업 과정에서 아이들에게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설명해줄지 고민했을 것 같은데
ⓒ 권윤덕 글·그림,《꽃할머니》, 사계절
아이들한테 성폭력 문제를 어떻게 이야기해줘야 할지 고민됐어요. 출간 전 모니터링 하면서 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에게 초기 스케치를 보여줬죠. 할머니들이 폭력을 당하고 힘든 일을 겪었다는 건 알지만 성폭력인지는 몰랐어요. 나중에 글과 그림을 다듬고 보여줬더니 성폭력인 것 같다고 얘기했죠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더니 칸막이가 가로놓인 작은 방에 여자들이 한 명씩 누워있고, 남자들이 들어왔다 나가는 장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대요. '초등학교 5학년쯤 되면 아는구나' 싶었죠.
▲ '꽃할머니' 출간 전 일본 아이들을 대상으로 모니터링했을 때 반응이 어땠나출간 전 일본 와코쓰루카와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과 나루세다이 중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책에 대한 모니터링을 진행했어요.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은 평화에 관한 공부를 어느 정도 한 상태라 할머니들에 대해 자세히 물었어요. '과거에 이런 일이 있는지 몰랐다', '성폭력으로 아이가 생기면 어떻게 하느냐'면서 할머니들이 겪은 일에 가슴 아파했죠.
중학교 학생들은 평화에 관한 공부를 하지 않은 상태였어요. 교실에 들어가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아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는데 한 반 38명 중 1명만 손을 들었어요. 손을 든 학생은 책을 보고 알았다고 해요. '꽃할머니'를 읽어줬을 때 아이들이 받은 충격이 컸어요. '할머니들을 도와주고 싶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반응이 많았고, 특히 '과거 일본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도 놀랍지만 우리가 이런 사실을 몰랐는다는 게 더 놀랍다'는 반응이 기억에 남아요.
아이들은 위안부 문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어른들이 오히려 쉬쉬하는 거죠. 우리나라 초등학교 5학년 교실에서 이 책을 읽어줬을 때 한 여자어린이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이런 말을 했어요. '선생님, 어른이 이 책을 안 읽어줄 것 같아요. 어른들은 자기들이 잘못한 건 아이들한테 얘기 안 해주잖아요.' 순간 '어른들이 반성해야겠구나' 싶었죠.
▲ '꽃할머니'는 일본과 중국에서는 여전히 미출간된 상황인데세 나라 작가들과 출판사가 그림책 내용에 대해 의견을 조율하는 중이에요. 특히 위안부 문제의 가해자인 일본과 피해자인 우리나라의 의견이 첨예하게 갈려요. 이를테면 책에 나오는 일본군 위안부 기록도를 보고 일본 출판사 쪽에서'국화문장을 벚꽃으로 바꿔달라', '범죄자를 명시한 그림에서 천황을 빼달라'고 요청해서 수정했어요. 일본인의 정서상 그러한 부분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고, 출판사에 대한 우익단체의 테러가 염려된다는 이유에서죠.
ⓒ 권윤덕 글·그림,《꽃할머니》, 사계절
나중에 일본 출판사가 요구하는 방향으로 전체적인 내용을 바꾸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일본에서 출간 안 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개정판을 준비하고 있어요. 특히 할머니가 강제 연행되는 장면과 정신을 잃는 장면을 문제삼는데, 이 장면을 바꾸는 것도 고려하고 있어요.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에 대해 그릇되게 인식하는 아베정권이 들어서면서 한일관계가 더 악화했지만 출간을 위한 노력은 멈추지 않을 거에요. 그게 작가의 역할이니까요. 만약 개정판이 또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다른 출판사를 찾아볼 생각이에요.
▲ '꽃할머니'는 고 심달연 할머니의 증언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고 심달연 할머니가 이 책을 보시고 돌아가셨나할머니가 글자를 못 읽으셔서 대신 읽어드렸는데 '당신을 예쁘게 그렸다'고 되게 좋아하셨어요. 초기 스케치 때는 분노와 복수심 때문에 그림이 험악했는데 갈수록 부드러워졌죠. 초기 스케치가 더 좋았다는 사람이 많지만 할머니가 출간한 책을 좋아하셨으니까 만족해요.
일본 출판사와 그림책 내용 수정을 두고 옥신각신하는 과정이 길어지면서 출간 자체가 안 될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2010년 1월, '할머니가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죠.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빨리 출간하자'는 생각이 들었고 2010년 6월 한국만이라도 서둘러 낸 거에요. 할머니는 그해 12월 돌아가셨어요. 한국에서 출간된 책만 보시고 결국 일본에서 책이 나오는 건 못 보고 돌아가신 거에요. (일본에서 책이 나왔으면) 할머니랑 같이 일본도 가고 그랬을텐데….
▲ 차기작은 제주4.3항쟁을 다룬다. 작업은 어느 정도 진척이 됐나전체 작업 과정으로 따지면 70% 정도 완성됐고, 9~10월쯤에는 책이 나와요. 10년 전쯤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그림책 '시리동동 거미동동' 작업을 하면서 제주4.3항쟁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꽃할머니'를 끝내고 생각을 구체화한 거죠. 아시다시피 4.3항쟁은 좌우 이데올로기가 대립하면서 촉발된 민중항쟁인데, 지금의 한국사회가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아요. 종북좌파로 매도하면서 사회 정의에 대한 자유로운 의견 개진을 막고 찍히면 집단에서마저 배제시키잖아요. 사상이 다르다고 집단에서 배제시키는 건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는 행위이자 일종의 폭력이죠. 책에서는 휴머니즘 차원에서 4.3항쟁을 다루려고 했어요.
▲ 작가로서 사회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게 부담스럽지는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