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의 재심 첫 공판이 강 씨의 유죄 확정 20년 만인 20일 열렸다.
이날 서울고법 형사10부(조경판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공판에서 강기훈 씨는 "내게 파렴치한이라는 누명을 씌운 검찰과 언론부터 유죄확정 판결을 내린 법원까지 (당시 상황이)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당시 법을 다루던 사람들은 그저 저를 죄인으로 만들고자 했을 뿐이다. 이번 기회에 잘못된 판결을 바로 잡아달라"고 호소했다.
이어 "그동안 고통 속에서 지내면서도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면서 "결단코 '자살방조'와 같은 일은 없었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강 씨는 또 "재심 결정을 내려준 사법부에 감사한 마음을 전해야 하는지, 의례적으로 감사하다고 해야하는지 모를 정도로 불신이 너무 깊다"며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강조했다.
강 씨의 변호인 측은 검찰의 공소사실은 범죄의 증명이 없다고 지적하며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해달라고 요청했다.
변호인은 "당시 검찰은 강 씨가 유서를 대필했다고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언제, 어디서, 어떤 경위로 그렇게 했는지 공소장에 분명히 밝히지 못했다"며 "그동안 시행한 각종 필적 감정 결과들에 의하면 유서의 필적은 강씨의 필적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또 "검찰은 강 씨를 조사하면서 잠을 재우지 않거나 협박하고, 상당기간 변호인의 접견을 금지하는 등 피고인의 방어권을 침해했다"며 "검찰이 종전 재판에서 제시한 자료들은 위법하게 수집한 증거로서 증거능력이 없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강 씨 측 변호인은 사건 당시 검찰이 강씨 등으로부터 압수해 간 메모와 책 등 증거물을 무죄의 증거로 새롭게 제시하고 싶다며, 검찰 측에 찾아올 압수물 목록을 전달했다.
이에 대해 검찰은 강씨의 무죄를 인정할만한 명백한 증거가 새롭게 발견된 것은 아니라는 대법원 재심 개시 결정 내용을 밝히며 재판의 심리 범위를 제한해야 한다고 맞섰다.
이에 재판부는 내년 1월 31일 공판준비기일을 한 차례 더 열어 증거 채택 등 본격적인 심리를 위한 준비 절차를 갖기로 했다.
한편 유죄 판결에 대한 억울함으로 5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다는 강씨는 최근 간암 수술을 받고 치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BestNocut_R]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1991년 김기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국 부장의 유서를 당시 전민련 총무부장이던 강씨가 대신 써주고 자살을 방조했다며 검찰이 기소한 사건이다. 김씨는 그해 5월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며 분신했다.
강씨는 이듬해 징역 3년형의 확정판결을 받고 만기 출소했다. 하지만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필적 감정의 오류가 있었다며 유서가 김씨 본인의 것이라는 취지의 결정을 내렸고, 이에 따라 강씨는 2008년 1월 재심을 청구했다.
이후 서울고법의 재심개시 결정, 검찰의 즉시항고를 거쳐 대법원은 지난 10월 재심 개시를 최종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