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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뽕' 이두용 "2시간 40분짜리를 1시간 30분으로 싹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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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일반

    '뽕' 이두용 "2시간 40분짜리를 1시간 30분으로 싹둑"

    • 2008-01-15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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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뽕'의 감독 이두용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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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우리 영화계 가장 큰 경사 중의 하나를 꼽는다면 전도연 씨가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게 아닐까 싶은데요. 지금이야 여기 저기 해외 영화제에서 우리 영화가 상도 받고 그러지만7, 80년대는 참 힘든 일이었죠.

    해외 영화제에서 첫 번째로 상을 받은 영화, 뭔지 아십니까? 1981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이두용 감독의 ‘피막’이란 영환데요. 이 감독의 1983년작 <물레야 물레야>는 칸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한국영화의 세계화’라는 화두의 원조라고 볼 수 있는데요.

    이두용 감독은 ‘잃어버린 면사포’로 데뷔해서 ‘뽕’ ‘내시’ ‘최후의 증인’ ‘돌아이’ ‘용호대련’ 등 7,80년대 한국의 상업영화계를 풍미한 감독이구요. 70년대 중반에는 태권 액션영화로 이름을 떨쳤고, 토속물의 대가였고, 최근까지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몇 안 되는 70년대 데뷔 감독 중 한 사람입니다.

    지난 8일부터 서울 낙원동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2008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이곳에서 후배 감독들이 ‘이두용 감독 특별전’을 마련했다고 하는데요. 이두용 감독을 1월 14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감독 특별전’ 후배 감독들에게 고마울 뿐

    ▶ 요즘 근황은 어떠세요?

    명지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초빙교수로 바쁘게 지내고 있는데 올 1월에 정년퇴직을 합니다. 막상 정년퇴직을 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해지더라고요. 시원섭섭하다는 표현이 딱 맞는 것 같아요.

    ▶ 1월 8일~2월 3일까지 종로구 낙원동에 있는 서울아트시네마에서 ‘2008 시네마테크 친구들 영화제’로 감독 특별전을 갖는다고요?

    올해 3회째라는데 저는 처음 가봤어요. 젊은 감독들이 주축이 돼서 알차게 영화제를 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보통 영화제하면 푸짐한 행사 중심으로 많이 하거든요. 영화배우나 감독들 초청, 이벤트를 많이 하면 좋은 영화제로 평가를 하는데 이 영화제는 국제영화제로서 내용이 알찹니다.

    작가주의적인 영화를 중심으로 하는 점이 아주 독특해요. 그 젊은 감독들이 특별전을 해준다고 하는데 우선 고맙고, 영화를 예술인가, 아닌가 하는 논란을 뛰어넘어서 서로 감상하고 젊은 영화학도들이나 관객들에게 이해시키고 알리는 게 아주 좋았던 것 같아요.

    ▶ 어떤 작품들이 상영되나요?

    [BestNocut_R]이번에 5작품이 상영되는데 <최후의 증인>, <뽕>, <내시>, <물레야 물레야> 등입니다. 그 중에 1978년에 기획해서 79년에 만든 <최후의 증인>이라는 작품은 당시 검열의 시대였기 때문에 엄청나게 잘려나갔어요. 그게 2시간 40분짜리 영화인데 1시간 30분짜리로 상영이 되니까 내용이 연결이 안 되죠.

    이건 내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80년도에 처음 한 번 보고 이후에는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그 영화를 젊은 감독들이 2시간 40분짜리 원본을 찾아내서 상영을 해주는데 저도 이번에 가서 그 원본을 보니까 너무 반갑더라고요. 내 작품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20년 동안 잊어버리고 있던 작품을 젊은 감독들이 좋게 봐서 이 작품을 중심으로 감독 특별전을 열어준다고 하니까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 <최후의 증인>이 검열에서 잘려나간 이유는 뭔가요?

    6.25 전쟁의 후유증을 배경으로 한 영화인데 동족간의 이념을 다룬 영화가 아니에요. 한 순진무구한 사람이 권력자들한테 모함을 당해서 일생을 감옥에서 보내는, 그리고 전쟁 때문에 일생이 마모되어 가는 과정을 한 수사관이 수사를 하면서 드러나는 영화인데 이두용 감독 사상이 수상하다고 누가 청와대에 투고를 했어요.

    옛날에는 영화를 만들 때 금기가 있었어요. 이념을 다룬 것은 물론 안 되고 공무원 부패를 다룬 것도 안 되고, 아주 많았어요. 그런 게 다 걸렸었나 봐요. 그러니 모조리 잘려버리니까 영화가 절름발이가 된 거죠. 그래서 개봉날 영화를 보다가 뛰쳐나왔어요. 나와서 시간표를 보니까 그 영화가 2시간 40분짜리인데 1시간 40분으로 돼 있더라고요.

    ▶ 1981년 작품인 <피막>은 우리 영화 역사상 최초로 해외영화제에서 수상을 한 작품이에요.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요. 회사에서도 그냥 출품해 본 건데 상을 받으리라고는 생각도 안 했어요. 아직 국내에 베니스 국제영화제가 알려지지 않았던 시기이기도 했고요. 그때 받은 상은 이시답 상이라고 해서 그 해에 총 6명을 뽑아요. 그 중의 하나로 들어간 거죠. 당시에는 지금처럼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던 건 아니에요. 외신에서 들어오면서 점점 알려지기 시작한 거예요. 외국 비평가들이 이두용 감독 찾으러 오고 하니까 점점 알려진 거죠. 언론 쪽에서도 영화에 대해서 심도 있게 보고 있었던 건 아니니까요.

    ◇ 화장실에 숨어서 하루 종일 영화를 보기도

    ▶ 영화를 하시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대부분의 영화감독들처럼 영화광이었어요. 중학교 때 이미 영화에 푹 빠져있었는데 당시에 영화는 거의 미국영화였어요. 그런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대체 누굴까 생각했었어요.제가 서울이 고향이라서 주로 국도극장을 갔었어요. 당시 중학생이었고 미성년자 관람불가도 많았고 또 학생이라 돈도 없었는데 어찌해서 들어가면 하루 종일 4,5회씩 화장실에 숨어서 보기도 했어요. <역마차>, <오케이 목장의 결투>, <원탁의 기사> 등 영화의 비주얼에 푹 빠진 거죠.

    ▶ 용산고등학교를 나오셨는데 공부를 잘 하셨다면서요?

    잘 한 건 아니고 중간 정도였는데 영화에 푹 빠졌어요.

    ▶ 그림도 잘 그리신다는데 영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런 재주가 있었나 봐요. 중고등학교 때부터 나는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하니까, 주위에서 너는 나가면 움직이는 그림을 하면 되겠다고 할 정도였어요. 마침 학교 선배가 영화 조감독을 하고 있었는데 영화감독이 꿈이면 빨리 나한테 와서 일도 좀 거들면서 배우라고 해서 그렇게 된 거예요. 그래서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영화판에 뛰어든 거죠. 졸업하기 전부터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선배 일을 틈틈이 돕다가 졸업하면서 영화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 첫 번째 데뷔작품은 어떤 영화인가요?

    1969년 작 <잃어버린 면사포>인데 신성일, 문희 씨가 주연을 한 멜로드라마에요. 첫 작품이 흥행이 좀 돼서 이후에도 계속 감독을 했던 거죠. 당시에 10만 관객이 들면 대박이라고 했는데 이 정도 관객이면 요즘 100만 관객과 맞먹을 거예요. 이 작품이 10만 관객까지는 아니었지만 꽤 히트를 했었죠.

    ▶ 작품의 평가는 어땠나요?

    내용이 좋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첫 번에 인정을 받은 게, 옛날에는 지방에 ‘흥행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서울 중앙에 영화제작 자금을 올려 보내 주면 영화사로 돈을 줘서 영화를 만들 수 있었거든요. <잃어버린 면사포>가 지방에서도 흥행이 괜찮았고 좋게 봐서 확산이 된 겁니다.

    ▶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감독님들은 어떤 분들이 있나요?

    신상옥, 이만희, 홍성기, 김수용 감독들이 있죠.

    ◇ 전국 태권도 유단자들로 만든 ‘태권 액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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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0년대 중반 한국 영화계에 태권 액션물 유행을 일으킨 장본인’, ‘직선과 생략의 액션 미학’이라고 어느 평론가가 말했는데요.

    제가 액션을 시작할 그 무렵까지 멜로드라마, 신파를 많이 했어요. 그런데 하다 보니까 싫증이 나더라고요.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어렸을 때부터 비주얼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데 이야기 중심의 멜로만 하다 보니까 뭔가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더라고요. 당시 상황이 스토리텔링 중심으로 영화를 만들던 때였는데 그 장르가 나쁘다는 게 아니고 스스로 이게 아니다 생각할 즈음에 외국에 내보내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진 거예요.

    외국에 나가려면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의 풍습이나 생활을 다룬 것은 승산이 없어요. 외국에 나간다는 건 영화제에 나간다는 게 아니고 영화 시장에 나가는 영화를 하고 싶었던 거죠. 영화시장에서 남의 나라 풍습이나 생활을 다루면 관심 밖으로 밀려나잖아요. 그렇다면 갈 수 있는 건 액션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당시 할리우드나 일본에서 얼마나 액션영화를 잘 만들었는지 몰라요. 그러면 그냥 3류 액션영화를 만들면 안 되겠다, 외국 감독들 못지않은 영화를 만들어서 영화시장에 내보내야겠다는 발칙한 생각을 했어요. 당시에 이소룡의 쿵푸를 다룬 영화가 막 확산되기 전이었어요. 한국의 태권도를 가지고 액션영화를 만든다면 외국 젊은이들이 호기심을 갖고 영화를 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거죠.

    그리고 학교 다닐 때 제가 태권도를 좀 했어요. 그때 배울 때 관장님이 말씀하시기를, 과학적으로 발이 주먹보다 2.5배의 힘이 있다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발을 응용해서 액션영화를 만들면 좋겠다고 해서 만든 것이 태권도 영화 <용호대련>이었어요.

    ▶ <용호대련>의 흥행은 어땠나요?

    흥행이 좋았는데 특히 지방에서 좋았어요. 헐리웃 극장에서 시작을 했는데 확산이 되면서 대한민국에 태권도 영화가 나왔다고 굉장히 반응이 좋았어요. 이후에 그런 영화를 만들어달라는 주문이 쏟아지더라고요. 그래서 몇 년 동안 정신없이 만들었죠.

    ▶ 당시에는 컴퓨터 그래픽 같은 기술이 부족하니까 위험한 부분도 있었겠어요?

    컴퓨터 그래픽도 없었고 전문적인 스턴트맨들도 없었죠. 그 영화를 만들 때 전국의 태권도 유단자들을 모집했어요. 그랬더니 300명 정도가 와서 영등포의 한 도장에 가서 오디션을 보고 100명 정도로 간추렸어요. 그렇게 태권도 영화를 시작한 거예요. 저 친구는 기능도 있지만 연기도 할 수 있겠다, 악당 역에 어울리겠다, 이렇게 전부 배치해서 영화를 만들었는데 굉장히 소중한 친구들이에요. 태권도 영화는 이 친구들이 원조에요. 한때는 방송국의 무술감독으로 활동도 했고 지금은 그 후배들이 하고 있죠.

    ▶ 1980년대에 만든 <돌아이> 시리즈의 인기가 대단했었어요.

    주인공이 전영록 씨인데 영화광이에요. 집에 가 보니까 영화와 관련된 책, 음반 등 프로 못지않게 갖춰놔서 깜짝 놀랐어요. 그래서 배우 이상으로 성공하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돌아이> 찍을 때도, 지금 같으면 컴퓨터 그래픽으로 할 텐데 남산의 케이블 카 위에 직접 올라타서 결투 신을 찍을 정도였어요. 그걸 시키는 감독이나 그걸 하는 배우나 또라이였죠.(웃음) 전영록 씨는 운동을 많이 해서 몸놀림도 좋고 열정이 대단했어요.

    ▶ 새로운 스타일의 다양성을 갖춘 영화를 추구하시는 것 같아요.

    처음부터 거시적으로 다양성을 추구해야겠다고 시작한 건 아니고 한 유형의 영화를 하고 나면 정반대의 영화를 해요. 진지한 장르를 만들었다면 그 다음은 가벼운 장르를 만드는 거죠. 다른 영화를 하면 신인감독이 된 것처럼 신선하고 신이 나거든요.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으려고 영악한 계산을 한 것도 아니고 전혀 다른 장르의 영화를 만드는 작업이 즐거움을 줘요. 그래서 그런 작업들을 선호한 거죠.

    ▶ 외국 영화감독들에게 영향을 받으셨을 거 같아요.

    외국의 특정한 감독이나 영화에 영향을 받은 건 아니고 전체 외국 영화의 수려함에 영향을 받았어요. 다만 프랑스 감독 클로드 를르슈가 만든 <남과 여>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망원렌즈로 피사체를 심도 있게 잡아내거든요. 렌즈의 정확한 사용, 범위 등에 놀라는데 오히려 그런 사람의 작법에 영향을 받았을 거예요.

    ▶ 어느 인터뷰에서 ‘끝까지 액션영화를 하면 좋았을 것’이라고 고백도 하셨다는데 어떤 내용인가요?

    요즘은 그렇지 않은데 우리 사회는 이상하게 액션영화를 폭력영화로 보고, 좋지 않은 영화라고 생각하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있어요. 유교의 인식 때문이라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하는데 영화를 영화로 봤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액션영화를 3류 영화로 보는 게 못 견디겠어요. 좋아서 만들기도 하고 해외수출용으로 만들었는데 멜로영화보다 액션영화 만들기가 더 어려워요. 노동의 강도도 그렇고요.

    예를 들면 할리우드 액션 스타인 아놀드 슈워제네거, 실베스터 스탤론 같은 배우는 멜로 배우보다 열 배는 개런티를 더 받아요. 제작비도 더 많이 드는데 그만큼 액션영화가 쉽지 않다는 얘기에요. 제가 결정적으로 액션영화를 그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게, 그 100명의 태권도의 달인들을 뽑아서 훈련을 시켰는데 그에 맞는 대우를 해주지 않고 ‘으악새 배우’라고 하면서 천하게 보는 거예요.

    그 친구들하고 우리 세계적인 액션영화를 만들자고 단단히 약속하고 시작했는데 너무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나 역시도 똑같은 감독 연출료를 받고 고단한 액션영화를 만들어서 뭘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액션영화의 인적자원에 대해서 대접을 안 해요.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까요.

    ◇ 나도향의 원작 ‘뽕’ 재미와 해학으로 재탄생

    ▶ 1985년 작 <뽕>을 찍으실 때 장소 찾는 것부터 쉽지 않으셨다고요?

    우리가 일제 강점기 시절의 어두운 부분이 있었잖아요. 살기 어려운 사람들이 척박한 땅에 사는 이야기인데, 원래 나도향 씨의 원작이 아주 사실감 있고 생생한 반면 시대 배경도 그렇고 아주 어두운 작품이에요. 그래서 어두운 부분은 소설로서 충분히 표현이 되었으니까 영화는 재미있게 해학적으로 만들면 되겠다, 해학이라는 생각이 퍼뜩 떠오르더라고요.

    작가와 잘 상의해서 진행하는데 검열도 그렇고 영화의 진위를 잘 모르는 거예요. 영화사마다 다 달라서 어떤 영화사는 바로 만들자고 그러고 또 어떤 영화사는 미진하고, 검열은 사전 검열이라는 게 있어서 걸리고, 결국 영화사를 세 곳을 전전하다가 이태원 씨가 처음 차린 태극영화사에서 하게 되었는데 대박을 친 거예요.

    ▶ 그 작품에서 이두용 감독님은 상업적으로 접근하신 건가요?

    나중에 흥행이 되니까 상업적이 된 거고, 가난하고 척박한 땅에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잖아요. 나라 잃은 땅에서 여자가 몸으로 살아가는 이야기인데 그걸 사실적으로 접근하면 칙칙해서 안 되겠더라고요. 그 배경에 깔린 건 슬픔이지만 영화를 보면서 껄껄거리게 재미있게 만들자고 해서 접근한 게 뽕입니다.

    ▶ 1986년 작 <내시> 역시 대단한 흥행을 거두셨잖아요?

    1986년도에 두성영화사라고 직접 영화사를 차렸어요. <내시>가 창립 작품이에요. 모든 감독들이 그렇겠지만 자본을 투입해서 완벽한 작품을 만들자고 해서 직접 영화사를 차렸고 첫 영화가 내시인데 당시 제작비 규모로 봤을 때 어마어마한 작품이에요. 당시 제작비 규모가 7000~8000만원이었는데 내시는 홍보비까지 5억원이 들었어요. 그런데 영화가 흥행이 안 되면 알거지가 되었을 텐데 다행히 국도극장 정문이 깨질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와서 흥행이 되었죠.

    ▶ 영화는 대박이냐, 쪽박이냐로 명암이 갈리는데 이두용 감독님은 어떠셨어요?

    지금까지 65편정도 만들었는데 흥행된 것은 10~15%정도, 적자는 안 난 게 10%정도고 나머지는 쪽박이에요. 그런데 흥행된 걸로 커버를 하는 거죠.

    ▶ 요즘은 한국영화의 위기론이 많이 이야기되고 있어요.

    한국영화가 제2의 르네상스 시대다, 황금기라고 작년까지 그랬잖아요. 영화라는 게 흥행이 되었다가도 안 되기도 하는 건데 조금만 안 되면 위기라고 하고 조금만 잘 되면 황금기라고 하는데 물론 포장과 과장이 있었던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영화는 쪽박을 차든 대박을 치든 없어지지 않아요. 모든 생활이 영상이잖아요. 토성까지 인공위성으로 찍어오는데 이걸 찍어오는 것은 영상이거든요. 영상이 있는 한 영화는 발전합니다.

    요즘 영화의 위기론을 많이 이야기하는데 우리 세대 감독들과는 다른 문법으로 젊은 감독들이 잘 만들잖아요. 제작비를 대거 투여해서 해외에 많이 내보내는데 세계에서 상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건 수단이고 세계의 상업 시장에 우리영화가 나가야 해요.

    물론 우려하는 바도 알겠어요. 2006년에 우리 영화가 120편이 만들어졌다고 하더라고요. 그랬다가 작년 제작한 영화는 40편도 안 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걸 가지고 한국영화가 끝났다고 하기에는 너무 이른다고 할 수 있죠. 총기 있고 잘 만드는 젊은 감독들이 있잖아요.

    ◇ ‘메이드 인 코리아’ 세계 영화시장에 들어가야

    ▶ 그런 의미에서 심형래 감독의 <디 워>가 할리우드 시장의 문을 두드렸다는 건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겠군요.

    내용이야 어쨌든 미국에서 2000개 이상의 스크린에서 걸었다는 건 대단한 겁니다. 미국사회에서 그만큼 상품대접을 받았다는 거거든요. 일단 흥행영화라고 하면 입장료를 끊어서 들어오는 코흘리개 어린애나 노인이나 똑같은 돈을 받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재미있게 보는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생각해야 해요. 영화에 대한 논란도 있지만 심형래 감독이 비즈니스를 잘 해서 미국에서 2000개 이상의 스크린에 걸은 건 상업적으로는 성공했다고 봅니다.

    전 세계 극장의 절반이 미국에 있어요. 한때 우리나라의 농구화나 운동화가 전량 미국으로 갔었어요. 그때 들은 이야기로는 메이드 인 코리아 운동화를 미국인 개인이 1년에 4.5켤레를 신는다고 해요. 4.5켤레를 3켤레로 줄이면 한국의 운동화 산업이 망한다고 할 정도였어요.

    농담으로 생각해서 웃었는데 중국제가 들어가서 정말로 그렇게 되었잖아요.마찬가지로 영화의 전 세계의 배급망은 미국이 주도하고 있어요. 영화도 그 체인에 들어가야 하는데 정상적으로 대접받고 들어간 게 <디 워>라는 거죠.

    ▶ 2005년 초에 프랑스 브졸영화제에서 특별 공로상을 수상하셨고 회고전도 열렸는데요.

    그 영화제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아시안 영화제만 해요. 해외에서 3번 회고제를 열었는데 브졸의 집행위원장이 15년 전부터 저의 회고전을 하고 싶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8작품을 거기서 했어요. 고맙게도 한국의 영화감독을 환대해 주었어요.

    한국에 있는 필름을 가져간다는 게 쉽지 않을뿐더러 프랑스에 있는 필름들을 모두 수거해서 회고전을 하는데 정말 감동을 받았죠.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해주는 데 문화선진국이 이래서 문화선진국이구나 싶어서 머리가 숙여지더라고요.

    ▶ 이두용 감독님의 대표작을 꼽으라고 한다면 어떤 작품을 꼽으시겠어요?

    제 영화를 10년 후에 다시 보면 촌스러워요. 당시 영화를 만들 때마다 완성도 100%의 영화를 만들자는 게 모토인데, 감독의 생각을 배우가 연기하고 연기한 것을 필름에 찍어서 보여주는 게 영화인데 자본이나 기능, 환경에 의해서 내 생각이 전달 안 될 때가 더 많아요. 그래서 많지 않은데 어쨌든 내가 만든 좋아하는 영화가 있어요. <장남>, <뽕>, <피막>, 그리고 사회성을 다룬 액션영화 <해결사>는 애정이 많이 가는 작품이에요.

    ▶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영화 기획을 하고 있고 대본도 쓰고 있는데 영화를 만들려면 막대한 자본이 들어가잖아요. 그래서 펀딩을 하는데 애로사항이 있어요.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박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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