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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성 "부끄러운 영화, 대표작 못돼도 평생의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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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일성 "부끄러운 영화, 대표작 못돼도 평생의 스승''''

    • 2007-08-02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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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사각 앵글의 예술가, 정일성 촬영감독

    정일성
    일흔 여덟… 턱 밑 하얀 수염이 아무리 멋스럽다 한들, 나이를 숨길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젊은 날, 몸 사리지 않고 일에만 매달린 탓에 대장과 소장, 그리고 위까지 일부 잘라냈습니다. 직장암으로 수술까지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청년입니다! 카메라만 손에 쥐면 힘이 펄펄 솟는 현역 촬영감독이고요! 예쁜 여배우를 보면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그는 청바지에 원색 티셔츠가 감각적으로 잘 어울리고, 속도위반 딱지를 겁내기 않고 질주하는 젊은이의 무모함도 지니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일에 한없이 몰입하는 열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좋은 화면을 위해서라면 눈 쌓인 지붕도 기꺼이 올라가고 가장 한국적인 영상을 만들어낸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임권택 감독과 오랜 세월 호흡을 맞추며 우리 영화를 세계에 알린 사람, ''''한국영화의 산 증인''''이라 불리는정일성 촬영감독을 8월 2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습니다.

    ◇ 영화인생 50년, 원천적인 힘은 역마살과 공방살이

    ▶ 그때 수술하신 것은 괜찮아지셨나요?

    지금까지 살아있는 거니까 괜찮은 거죠.(웃음)

    ▶ 영화 ''''천년학'''' 끝나시고 지금은 잠시 휴식기간인가요?

    요즘은 멍청해지려고 합니다. 사람이 때로는 멍청해질 필요가 있거든요. 똑똑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거기에 끼지 못하니까 차라리 바보 쪽으로 가는 게 낫지 않겠나 싶습니다.(웃음)

    ▶ 보통 한 작품 들어가시면 얼마동안 촬영하세요?

    임권택 감독과 저는 주로 사계절을 찍는 영화들을 했기 때문에, 사계절이면 1년이 가는 거잖아요. 준비기간, 장소 헌팅, 재료수집, 이렇게 해서 1년 7개월이 걸립니다.

    ▶ 1년 7개월을 매달리시다가 놓으시는 순간 어떤 느낌이 드세요?

    탈진 같은 것도 오고 또 정신적으로 너무 집중하다 보니, 정신을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해줄까 고민합니다. 그래야 내가 편하니까요. 그런 측면에서 은둔하기도 하고 일할 때 못 봤던 책들을 민박해가면서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 영화촬영 때도 가족을 떠나계시고 쉴 때도 떠나계시면 부인이 아무 말씀 안하세요?(웃음)

    계산을 해 보니까 제가 50년 동안 촬영을 했더라고요. 와이프와 결혼한 지 46년 정도 되는데 12년은 같이 있었고 나머지는 타인과의 동침이었어요.(웃음)그래서 저는 역마살, 집사람은 공방살이인데 그걸 나쁘게만 생각하실 게 아니고 미안한 마음이 항상 있고 나이차이도 있으니까 항상 신혼 같아요. 띠 동갑이라 와이프가 12살이 아래에요. 별 트러블 없이 지금까지 지속할 수 있었던 원천적인 힘은 공방살이와 역마살은 맞지 않지만 삶을 통해서는 괜찮은 것 같아요.제 친구가 월급쟁이가 있었는데 정확하게 5시 반이면 집에 돌아오니까 와이프가 지겹다고 그런대요.(웃음)

    ▶ 천년학 끝나시고 뭘 하셨어요?

    혼자 여행도 며칠 동안 했고 오랜만에 중국을 다녀왔습니다. 중국에 결혼한 딸이 7년째 살고 있는데 사위가 SK이사로 책임을 맡고 있어서 겸사겸사 와이프와 함께 다녀왔습니다.

    ◇ 140여 작품, 22번의 상, 기념으로 달라고 하면 주기도 해

    ▶ 올해가 50년째라고 하셨는데 몇 살 때 시작하신 건가요?

    조수생활을 하다가 27살인 57년도에 데뷔를 했거든요. 그러니까 딱 50년이죠.

    ▶ 첫 작품이 뭐였는지 생각나세요?

    ''''지상의 비극''''이라는 영화인데, 촬영하기 전에 시나리오는 지상의 비극이었고 촬영 다 끝나고 개봉할 때쯤 해서 타이틀이 바뀌었어요. 「가거라 슬픔이여」로. 조긍하 감독 작품이에요.

    ▶ 배우도 생각나세요?

    최은희씨가 여자주인공이었고 김웅이라는 남자배우가 있었고 허장강씨도 있었어요.

    ▶ 당시에 최은희씨는 카메라로 보니까 어떠셨어요?

    그전에 조수 때도 같이 일한 게 있고 제가 모셨던 스승이신 김학성 촬영감독님의 부인이셨어요. 6.25라는 남북관계 이후에 이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아픔이 있었고요. 그래서 우리는 외곽에서 안타깝게 여겼는데 신상옥씨하고 그렇게 되서 한때는 묵시적으로 영화인들이 신상옥씨 영화 쪽은 협조하지 말자는 분위기였어요. 신상옥씨는 자신의 시스템 외의 영화들은 안하고 우리들은 협조하지 않고, 3년 동안 영화인협회에서 결의를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풀려났던 첫 작품이 제가 찍은 첫 영화의 주인공이었습니다.그때만 해도 최은희씨가 지적인 마스크를 가졌거든요. 평범한 인상이 아니라서 굉장히 날카롭고 여성적이고 또 음색 자체가 여성적이잖아요. 그런 게 남자들로 하여금 매료시키는 힘들이 있었고 그 이후에 나오는 최은희씨 영화들이 우리나라의 문예물을 많이 했던 관계로 팬들이 많았어요. 그 이전에도 최은희씨가 연극할 때부터 팬들을 몰고 다녔어요.

    ▶ 대략 몇 작품이나 하셨어요?

    140여 작품 정도 될 겁니다.

    ▶ 대종상, 한국영화예술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등. 22번을 상을 받으셨어요. 상을 다 갖고 계세요?

    있는 것도 있고 없어진 것도 있어요. 누가 놀러 와서 기념으로 달라고 하면 주고 그래요.나하고 일했던 조수들이 와서 선생님은 많으니까 제가 하나 가져가도 되겠냐고 하면 그러라고 합니다.

    ◇ 격변의 세월, 시대의 동참 위해 천연색 사용 안 해

    ▶ 영화를 시작하신 때가 언제이신가요?

    자유당 때부터 시작을 했지요.

    ▶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서 군사독재시절이 되었는데요.

    제가 29년생이에요. 태어나서 얼마 있다가 만주사변이 나고 지나사변이 나고 대동아전쟁이 나고 세계 제2차대전이 나고 그러다가 해방이 되었고 또 자유당 독재시절에서부터 4.19, 5.16, 12.12, 5.18, 문민정부에서부터 열린우리당까지 왔어요.국내적으로는 그렇고 국외적으로는 우선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사건들이 많았잖아요.

    ▶ 고스란히 우리 역사를 지나오셨는데 그런 것들이 영화를 만드는 일에 영향을 끼치죠?

    15,6년 전인데 일본에 갔더니 그쪽 평론가들이 다소 거칠기는 하고 완성도는 떨어지더라도 한국영화가 굉장히 힘이 있다고 해요. 혹시 힘이 있는 이유가 뭔지 아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간단한 거거든요. 우리는 너희들처럼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도 아니고 남북이 분단되어 있고 정치지도자들이 독재를 했었고 군인들이 군화소리를 내면서 통제정치를 했었기 때문에 국민들이 모두 긴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긴장의 연속성이라고 하는 것은 작품을 하는데 굉장히 힘이 생긴다고 보거든요.

    그 이후에는 여러 가지 여건도 좋아지고 세계에 내놓아도 떨어지지 않을 만큼 완성도도 좋아졌고, 나중에 일본 사람들이 오니까 그때는 한국영화가 일본영화를 압도하리라고는 생각 안했는데 한국영화가 일본영화보다 더 리얼리티가 있고 더 극적이고 더 대작이고 연기자들도 힘이 있고 절묘한 연기를 하는 것을 보면 정 선생님이 말씀했던 긴장의 연속이 좋은 쪽으로 방향을 바꾼 게 아니냐고 하는 평론가도 있었어요. 그런데 일본을 보면 2차 대전이 끝난 폐허 속에서 일어났던 건 물론 과학의 힘도 있어서 레이저나 이런 쪽은 굉장히 발달했지만 대다수 국민들이 너무 잘 사니까 노는 쪽에 치우쳐서 예술을 어떤 식으로 지향하고 어떤 식으로 표현하는가에 대해 고민하는 것보다도 놀이 같은 것을 선호하고 선택하는 것 같아요.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하겠냐고 하니까 외국으로 도망가겠다고 한 젊은이들의 인터뷰를 듣고 그럴 수 있겠다 싶었어요. 좋은 정치가 아래의 넉넉한 나라 살림살이는 일면 좋은 점도 있지만 정신을 앗아가는, 다소 물질은 일본보다 못한다 하더라도 대항적이고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면이 있는 것 같아요.

    ▶ 군사정부 시절에는 굉장히 규제하는 게 많았잖아요. 표현의 자유를 촉구하는 성명서에 서명도 하셨다면서요?

    그때는 제가 장발도 했어요. 우리는 젊은이들처럼 나라를 걱정해서 뛰쳐나가고 행동으로 움직이는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항상 기성세대로서 부끄럽고 비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젊은이들 편에 서서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응원을 했었거든요. 심지어 길거리에서 노점하시는 할머니들도 떡과 물을 날라주고 묵시적으로 너희들 편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아무래도 가정이 있고 가정을 꾸려나가려고 하면 비겁해지는 건 할 수 없는 거예요.

    같이 일했던 젊은 감독들과 함께 장발에 걸렸는데 그때는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나는 안 잡더라고요. 영화가 독재정권 때 천연색이지만 한 번도 천연색으로 찍어본 적은 없어요. 피카소가 스페인 내전 때 청색시대를 열었듯이 내가 시류에 영합하지는 않을망정 내가 생각하고 있던 이 시대는 암울하다, 어둡다, 태양은 없다, 하나님도 없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거의 작품이 묵화 같은 색채로 의도적으로 찍었어요. 만다라가 80년도에 제작을 하고 있었거든요. 첫 촬영이 전두환씨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던 날이었는데 시골로 촬영하다가 식당에서 TV로 보면서 분노를 느꼈어요. 그 분노를 표현하기에는 너무 용기가 없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다 싶어서 임권택 감독하고 의논해서, 난 이번에 묵화 같은 색채로 찍고 싶은데 동의하냐? 어차피 절집 이야기니까 의상도 그렇고, 그렇게 동의하에 찍었어요.

    젊은 사람들이 기성세대를 너무 비겁한 쪽으로만 매도할 것이 아니고 행위예술이나 행동예술이 아닌 사람들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을 뿐이지 너무 한 쪽으로 매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87년에 성명서에 서명을 했는데 그때 어떤 작품에 계약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서명한 사람들과 일하지 말라고 제작자들에게 통보가 갔을 거잖아요. 그래서 계약이 파기가 됐어요. 그런데 하나도 슬프지 않더라고요. 저는 정치행위로서 서명한 것이 아니고 우선 언론의 자유가 없는 것은 표현의 자유가 없는 것과 매한가지라고 생각해서 사인을 했었고 또 사인한 사람들 중에서 내가 제일 나이가 많았어요.

    그래서 그날 가족회의를 하는데 당분간 내가 일을 못할 것 같다. 뭘 해서 먹고 살아야 할까 하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포장마차를 하면 소문이 나서 장사를 더 잘 거다. 촬영하는 것 보다 수입이 더 괜찮은데 너희들은 어떠냐고 하니까 모두 침울하더라고요. 포장마차는 안했지만 5,6개월 놀았어요. 노태우씨가 직선제를 하겠다고 발표하고 그러고 나서 풀린 것 같아요. 그때가 정치적으로도 어려웠고 또 일반 국민들도 고비가 아니었는가, 그 힘은 학생들의 힘이라고 봅니다. 당시에 독재와 맞섰던 학생들, 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한 학생들 덕에 우리 기성세대들이 안도하고 지금껏 이어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일성2

    ◇ 카메라 앵글 속에 담은 색채, 광선이 가장 중요해

    ▶ 촬영현장에서 굉장히 무서운 분이라고 소문이 나 있어요?

    그런 소리를 듣습니다. 나는 결과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고 과정은 우리 모두 희생하자, 내가 생각하는 과정이라고 하는 것은 영화에 있어서 3가지 기본이 있거든요. 첫째 리얼리즘, 둘째 형식, 세 번째는 모더니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보다도 형식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요. 형식은 스타일이거든요. 어떤 작가가 어떻게 영화를 만드느냐 하는 것은 스타일이 개성이고 독창성이기 때문에 내 카메라 앵글 속에, 내 구도 속에 어떤 색채의 영화를, 어떤 시간대에 어떻게 찍을 것인가에 대한 것은 굉장히 부단하게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 틀 속에 연기자들이 들어왔으면 좋겠는 거예요. 연기자는 연기자 나름대로의 플랜이 있을 거잖아요. 어떤 식의 연기를 할 것이고 이 작품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고 등등.그런데 연기를 하다 보면 자기 것을 주로 생각하게 돼요. 반면에 나는 전체를 보고 있거든요. 좋은 연기자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하는 경우가 많아요. 모두 다 잘 보이려고 해서 그래요. 모두 다 양보하려고 할 때 좋은 것이 보이거든요. 그래서 조금씩 자제시키죠.

    특히 영화는 과학도 있고 화학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어요. 그중에서도 촬영분야라고 하는 것은 광선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해야 해요. 어떤 시간대에 어떤 광선으로 어떻게 찍을 것인가 하는 설계는 색채와 연관이 됩니다. 자외선 속에서 찍을 것인가, 인위적인 광선에서 찍을 것인가, 일몰 후에 찍을 것인가, 아니면 밤 장면을 전환해서 찍을 것인가에 따라서 배경의 색채가 달라지잖아요. 거기에 어떤 옷을 입혀야 연기자가 돋보이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계산이 철저하게 감독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의해서 설계가 됩니다. 그런데 연기자가 자기 나름대로의 틀을 가지고 오면 이쪽에서 요구하는 틀 속에 들어올 수 없어요. 일단 책을 읽고 전부 다 머릿속에서 잊어버려서 전체를 관조하는 사람에게 일임을 해야 한다는 주의에요.

    연기자는 겹치기 출연 때문에 요즘보다 옛날이 더 바빴어요. 하루 오면 낮밤 2일을 잡고 오전, 오후 또 분리되고 하루에도 4,5군데를 뛰는 연기자들이 많을 때인데, 나는 광선이 마음에 안 드니까 연기자들을 잡아놓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게 되면 기분 나쁜 거죠.(웃음)하지만 결과는 왜 내가 그런 광선을 노려서 그렇게 찍지 않으면 안 되는가는 시사회 때 나타나는 거잖아요. 그로부터 내 편에 서는 연기자들이 조금씩 많아지더라고요. 그런데 요즘은 포기하고 우리와 선택된 연기자들은 딴 데 갈 생각 안합니다.(웃음)

    ▶ 배우에게 연기 지시를 하는 것은 월권 아닌가요?

    감독은 연기지도를 하고 나는 포지션 지도를 하는 거죠. 카메라를 움직이는 영화가 있지만 카메라를 움직이지 않는 형식의 영화를 찍겠다고 했을 때 정확하게 그 장소에 오지 않으면 카메라를 움직여야 한다고요. 앵글에서 틀어지니까. 그래서 반복해서 그 자리가 아니고 또 그 자리에 조명을 해놓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와 달라고 해요. 연기지도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카메라 포지션을 잡고 앵글 속에서 자유스럽게 하라는 거죠.

    같은 바스트라 하더라도 렌즈에 따라서 여유가 없는 바스트가 있고 여유가 많은 바스트가 있거든요. 연기자들은 렌즈의 m수를 잘 모르기 때문에 설명을 많이 해요. 결국은 연기자를 감정적으로 다뤄서 이익을 본 예는 한 번도 없어요. 될 수 있으면 기분 좋게 해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논리적으로 설득을 해야 하는데 예술이라는 게 논리로 설득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감정과 감성과 그때의 분위기...그 분위기를 좋게 하기 위해서 임 감독과 함께 연기자들에게 농담도 많이 해 줍니다.

    ▶ 오랫동안 촬영감독을 하셨으니까 저 연기자는 미숙한데 요렇게만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신 적도 있으실 것 같아요.

    거리가 멀더라도 망원으로 촬영할 때는 카메라를 아무리 멀리 떨어뜨려놓아도 큰 얼굴을 찍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러면 감독은 카메라 뒤에 있기 때문에 잘 안보일 수가 있어요. 나는 망원경으로 보기 때문에 정확하게 보는 거고요. 시선이 틀리다든지, 분장이 잘 안되어 있다든지, 아주 세밀하게 나타나거든요.

    ◇ 완벽한 필름을 위해 ''''연애 끝나고 와''''

    ▶ 열심히 촬영하시다 보면 마음에 안 드는 스텝도 있기 마련인데 연애한다고 가라고 한 적도 있으시다면서요?(웃음)

    특히 촬영분야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해요. 그래서 나는 항상 감독 밑에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감독이 중요한 일을 하는데 나는 감독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거거든요. 왜냐하면 현장에서는 감독을 중심에 놓고 이루어진 시스템이에요. 그런데 저희는 경제를 관리하고 있다고요. 찍기 이전의 필름, 찍은 후의 필름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관리를 하고 완벽한 필름을 제작자에게 넘겨주느냐에 대해 신경이 굉장히 곤두섭니다. 그래서 조수들에게도 부탁을 해요.

    너희들이 이 영화를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는 개인은 희생했으면 좋겠다고요. 감독이나 나를 위해서 희생하라는 것이 아니고 이 영화를 위해서 희생했으면 좋겠다는 거죠. 영화가 잘 되어야 할 텐데, 나는 남의 재산을 관리하고 있는데 스텝이 잘못해서 혹은 산만해서 미스가 났을 때 재촬영을 해야 하지만 재촬영이 안 될 때도 있어요. 그럴 경우에는 내 가슴에 상처가 되는 거고 결국 필름에 상처가 되는 일이기 때문에 유보하라. 그럼에도 고집해서 연애하는 것이 발각이 되었을 때는 가라, 가서 연애하라고 합니다. 연애 다 끝나고 오라고 해요.(웃음)그렇게 내쫓았는데 딴 곳에 갈 줄 알았어요. 그런데 딴 데 안 가고 1년 후에 와서 잘못했다고, 다시는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 조수가 13년 동안 일했는데 지금은 데뷔해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 요즘 영화계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옛날 감독님이 일했을 때와 어떤 차이가 납니까?

    차이가 굉장히 많은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다양한 정보시대에 살고 있거든요. 개인이 자기를 다스리지 못할 정도로 풍부한 정보가 있는 거예요.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인 거죠. 이건 기성세대들이 이해를 해야 합니다. 옛날에는 단순했거든요. 컴퓨터도 없었고 또 제가 영화에 들어올 때는 TV도 없고 라디오만 있을 때잖아요. 영화관이라고 해봤자 미국영화 일변도의 영화, 그것도 1년에 몇 편밖에 안되고 연극이나 뮤지컬이 활발히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이 세상이 단순했기 때문에 집중력이 있었죠.

    그래서 그 집중력이 있었던 것을 마치 옛날 사람들은 이랬는데 요즘 사람들은 못 한다고 하는 것은 맞지 않는 겁니다. 요즘은 똑똑해요. 너무 많이 알고자 하고 오히려 그것이 넘쳤을 때 내가 해야 할 일을 놓치는 경우들이 많거든요. 내가 하는 일이 우선순위 1위, 알고자 하는 것이 2위, 개인생활은 3위, 등급을 매기자면 그런 거죠.(웃음)

    다만 이런 건 있죠. 풍요로운 시대에 살았던 세대가 아니고 매사에 모자라고 부족하고 돈도 없고 심지어 필름도 좋은 필름으로 영화를 찍어본 일이 없거든요. 그것도 연도가 지난 걸 알면서도 찍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그러니까 화면 상태가 좋을 리가 없죠. 또 현상약품은 공업용과 사진용이 있는데 공업용은 싸고 사진용은 비싸요. 공업용 약품으로 현상을 하니까 자연히 찌꺼기가 많으니 스크레치도 많이 나고 완성도의 상태가 안 좋죠. 그리고 카메라도 우리가 수입해서 찍던 것이 아니고 6.25 전쟁 때 뉴스를 찍던 카메라로 찍고 또 어디서 흘러왔는지 모르는 그저 움직이기만 해도 찍었던 시대였어요. 그러니까 자연히 모두가 OK예요. NG가 없는 거예요. 편집이라고 하는 손재주 하나만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맞췄던 게 몸에 배었어요.

    임감독과 함께 영화를 찍으면서 가장 많이 필름을 쓴 게 천년학인데 겨우 8만 장 쓴 거예요. 요즘 3,40만장을 쓰는데 나는 그렇게 찍을 수가 없거든요. 여러 번 테스트를 해도 필름 많이 돌릴 필요가 없다, 요즘은 그럴 필요도 없다, 테스트도 필름을 돌리는 거예요.너무 풍요로우니까 우리가 하던 방식이 옳은 것만은 아니지만 우리의 경제여건, 제작비의 능력, 이런 것도 감안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아끼고 싶은데 요즘은 아낀다는 것이 바보 같은 거예요. 제작자들 때문에 혹은 나라를 위해서 아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몸에 배어있고 또 아까워요.

    ▶ 제작자들이 정일성 감독님을 좋아할 것 같아요.

    이번에 천년학에서 일했던 젊은 제작자인데 정말 놀라더라고요. 아끼고 타임을 정확하게 하고, 이를 테면 이런 거예요. 균형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쪽 사람이 5초를 찍으면 다른 사람도 5초를 찍잖아요. 그런데 연기가 좋으면 자기가 그 최면에 걸려서 10초에 끝내야 할 걸 20초까지 가기도 하나 봐요. 그러면 밸런스가 안 맞는 거예요. 우리는 아무리 좋은 연기를 한다고 해도 10초 내에 그 연기를 해 다오. 네가 지금 한 50초의 연기를 10초 내에 하라. 영화는 생략이고 비약이다. 일일 연속극처럼 마냥 가는 게 아니니까요. 그런 영화 쪽 리듬을 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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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년의 우정, 임권택 감독과 나는 한국영화의 산 증인

    ▶ 임권택 감독님과는 어떤 인연으로, 어떻게 만나셨어요?

    78년도에 처음 일을 했어요. 천승세씨의 「신궁」이라는 샤머니즘 영화였는데 그러고 나서부터는 30년 가까이 일을 하고 있어요. 임감독은 남을 많이 배려하는 쪽이라서 내가 다소 월권하는 게 있다 하더라도 자기를 딛고 일어서려는 것이 아니고 영화를 위해서 열정적으로 하기 때문에 그런 걸 감안하는 스타일이에요. 그리고 임감독하고 오랫동안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저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거의 동시대를 살아왔고 과거라는 역사를 체험을 통해서 겪었던 세대잖아요. 역사관도 같고 또 작품이야기를 하면 현재와 미래의 방향이 비슷해요.

    ▶ 임권택 감독님의 단점 한 가지만 이야기해 주세요.(웃음)

    저는 단점이 많은 사람인데 임권택 감독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굳이 단점을 이야기하자면 표현을 빨리 못하세요. 나는 표현이 금방 필링이 와서 동의하거나 아닌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임감독은 시간적인 간격이 좀 길어요. 나는 잘 아는데 사람들은 그 간격이 냉정하고 차갑게 느껴지나 봐요. 그런데 감독이라는 직업이 냉철한 시선과 사고도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나는 오랫동안 같이 일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안 보는데, 주위의 모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보는 것 같아요.그것은 단점이 아니고 어떻게 보면 장점이 될 수도 있어요. 흔치 않은 장점, 그것이 외부에서 볼 때 단점으로 보일 수 있을 거예요.

    ▶ 일본에서 태어나셨는데 고향은 어디세요?

    동경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살았어요.

    ▶ 언제 한국으로 오신 건가요?

    해방 1년 후에 돌아왔어요.

    ▶ 학교도 일본에서 다니셨어요?

    학교 다 마치고 이곳에 나와서 1년 동안 묵혔다가 한글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대학에 들어갔죠.

    ◇ 사랑하는 마음으로 찍으면 스크린에도 전해져

    ▶ 대학교는 어디에 가셨어요?

    서울공대를 나왔어요.

    ▶ 공대를 나오시고 어떻게 영화촬영을 하게 되셨어요?

    그런 질문들을 많이 하거든요. 그때는 공학도들이 갈만한 데가 전혀 없었어요. 취직할 데도 없고. 그때 가장 취직이 잘 된 친구들은 상대를 나와서 은행원이 된다든지 사대를 나온 사람들은 선생님을 하고 법대를 나온 사람들은 판검사나 정치 쪽으로 가고 그 외에는 갈 곳이 없는 거예요. 공장이 없고 아무 것도 없잖아요. 지금이야 포항제철이나 삼성전자 등 갈 데가 많지만요. 옛날에는 공대 안에 방직학과, 광산과가 따로 있었어요. 광산과 출신들은 광산으로 들어가고 우리들은 갈 곳이 없었어요.

    ▶ 졸업하고 뭘 하셨어요?

    미 공보원에 취직을 했어요. 영어를 배워서 미국이라는 넓은 땅에 갈 수 있다면 나래를 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요즘 막연하게 유학가고 싶다는 생각과 똑같은 거죠. 그랬는데 우연히 대학 선배 한 분을 만났어요. 광산과 출신인데 공군 소령 현역이셨어요.그런데 카메라맨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분이 강원산업의 회장인 정인엽씨인데 어릴 때부터 영화가 꿈이에요. 집이 부자라서 영사기도 돌리고 16mm지만 무비카메라도 찍고, 꿈이 영화제작이고 영화하는 게 꿈이에요. 그 분을 만났는데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셔서 미공보원에 있다고 했더니 미국 놈 밑에 뭣 하러 있느냐고 나오라고 하더라고요.

    이 분이 과격한 선배는 아닌데 우연히 저를 보고 그렇게 말씀하세요. 지금 뭐 하시느냐고 물어봤더니 영화 하나를 찍으려고 한대요. 「출격 명령」이라는 영화를 기획하고 있는데 너도 촬영부에 들어와서 같이 일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예나 지금이나 배우들에 대한 환상 같은 것들이 있었어요. 여배우가 누구냐고 했더니 염매리다. 남자배우가 누구냐고 했더니 이집길이다. 그 다음에 전택이씨도 나오고 한대요.

    나는 영화하는 게 전혀 꿈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배우들이 탑 배우들인지도 몰랐어요. 그래서 사표를 내고 그럼 끝날 때까지 아르바이트 하는 기분으로 하자, 배우 얼굴도 가깝게 볼 수 있겠구나 해서 발을 들여놨는데, 정인엽씨는 어릴 때 형님이 돌아가셔서 강원산업의 회장으로 들어가셨고 어릴 때부터 전혀 꿈이 아닌 나는 볼모로 잡혀서 영화를 하게 된 거죠.

    그때 오죽 못났으면 대학 나와서 영화를 하느냐고 부모님도 반대를 많이 하셨어요. 또 대학 나온 게 거짓말일 거다, 가짜일 거다, 그런 소리들이 들려오니까 오기로 본격적으로 영화를 해 봐야겠다 마음먹고 했는데 영화가 매력이 있더라고요. 당시에 경제성은 없는데 매력이 있어서 그때부터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요즘이야 연극영화학과들이 많잖아요. 옛날에는 그런 학과도 없었고 영화를 할 때 영화관이 영화학교이고 또 우리나라에는 영화에 대한 서적들이 없잖아요. 다행히 나는 일제시대 때부터 공부를 했던 사람이라 일어를 아니까 무조건 영화에 관한 책을 보게 되는 거죠.

    ▶ 아직도 영화를 찍을 때 여배우를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하셨어요.

    그건 지금도 변함이 없는 것이 내가 찍고자 하는 여배우를 앵글 속에서 사랑하지 않으면 스크린에 나타났을 때 일반 사람들이 사랑 안 할 것 같아요. 내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찍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사랑 못 받을 것 같아요. 나뿐만 아니라 감독은 감독대로 여배우나 남자배우에게 정을 주고 사랑해야 하고 다른 스텝들은 다른 각도에서 여배우를 사랑해야 하거든요. 두근거리거나 설렌다는 것은 나라는 마음이 대상이 되는 마음을 찍을 수는 없을까? 그 마음은 변함이 없죠.

    ▶ 부인께서는 알고 계신가요?(웃음)

    기술적인 거고 정신의 문제니까 거기까지는 집에 이야기할 필요는 없는 것이죠.(웃음)

    ▶ 작품에 나온 여배우를 사랑해야 하는데 잘 안 되는 경우는 없으셨어요?

    내가 사랑하고 있는 사랑의 감정은 이성적인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여배우를 사랑해 보고 싶다, 연애의 대상인 경우는 없더라고요. 그만큼 냉철했기 때문에 그만큼 영화 쪽에 오히려 무게가 실렸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감독이 여배우와 사랑하고 스캔들이 있는 감독들이 있고 카메라맨들도 있거든요. 스승인 김학성씨만 하더라도 최은희씨와 연애할 때 예쁘게 찍어주려고 샤를 너무 많이 띄워서 핀트가 거의 다 나간 경우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그렇게 개인의 감정이 실리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안 좋고 작품이 실패하는 경우가 많아요. 균형이 상실되니까요.

    ◇ 부끄러운 영화, 대표작은 될 수 없어도 평생의 스승이 돼

    ▶ 자제분은 어떻게 되세요?

    2녀 1남인데 딸들은 결혼하고 중간에 끼어있는 아들은 아직 결혼을 못하고 있어요. 제일기획에 15년 있다가 독립해서 회사 차리고 자기도 광고감독을 하고 있어요.

    ▶ 아버지의 일에 대해서 자제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우리 딸이 초등학교 3학년일 때 내가 밤을 새고 낮에 집에서 잠을 자려는데 잠이 잘 안와요. 깼는데 집에 아무도 없어요. 편히 자라고 나간 거 같아요. 큰 아이의 일기를 보게 됐어요. 그걸 보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는데 엄마가 돈이 없어서 요즘 고통을 받고 있다, 우리 아버지는 아마 돈을 못 버는 아버지인가 봐, 나도 내일 모레 뭘 사가지고 가야 할 텐데 살 수 있을까? 이런 내용의 일기를 봤어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고집스럽게 하고 싶은 영화만 고집했거든요. 그래서 4,50년 영화를 한 다른 사람보다도 편수가 적어요. 그때 생각을 바꿨어요. 아버지는 되기 쉬워도 가장은 되기 어렵다는 것을 일기를 통해서 충격을 받아서 내가 하기 싫은 일도 생활인으로서 해야겠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140여 작품의 영화 속에서 내가 제목도 이야기하기도 싫은 부끄러운 영화가 2,30편이 있는 거예요. 젊을 때 대표작이 뭐냐고 물으면 내가 상을 탄 영화, 흥행이 된 영화, 좋게 평가받았던 영화를 거드름 피우느라 이야기하는데 오히려 내가 하기 싫어서 실패한 영화들, 질 낮은 영화들이 평생 나를 지배하고 있다고요. 나에게는 하기 싫었던 2,30편의 영화가 대표작은 될 수 없더라도 스승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따님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하지는 않았는데 내가 요즘 아이들의 마음이 어떤지 계속 일기를 보게 되더라고요. 딸이 중학교 3학년쯤 되었을 때 담임선생님이 부르더래요. 너희 아버지가 찍은 영화는 너무 좋다고, 그런데 관객이 안 들어서 안타깝다, 왜 이런 영화가 관객이 안 드나,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라고 하면서 그 선생님의 이야기도 하고 우리 집이 부자가 못 되더라도 아버지가 좋은 영화를 하는 아버지로 평생 있었으면 좋겠다고 일기를 썼어요.

    많이 컸구나...그런 식으로 성장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별로 부끄럽게 살아오지 않았지만 부끄러웠던 2,30편의 영화 덕에 내가 더 분발할 수 있었어요.다만 한 가지 후회되는 게 내가 하고 싶었던 영화만큼 열과 성을 다했으면 그것도 떨어지는 영화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싫은 거예요. 그러면서 생활인으로서 하게 되는 거예요. 왜 젊었을 때는 그런 편견이 있었나에 대한 내 자신의 작품에 대한 편견이, 프로라고 하는 것은 어떤 영화가 되더라도 열과 성을 다해야 하는데 구별을 했다는 것, 차등을 했다는 내 모순이 스스로 창피한 거죠.

    ◇ 쉼 박자를 통한 진정한 어른으로 서고 싶어

    ▶ 폭주족이라는 이야기는 뭔가요?

    저도 스트레스가 쌓이거든요. 담배를 끊었다가 다시 피우게 되고, 그래서 담배를 끊는다고 이야기를 하지 않고 조금 쉰다고 해요. 쉬었다가 피우기를 반복하는데 그때는 달리고 싶어요. 자동차로 달리는데 요즘 스피드 시대잖아요. 하지만 나는 거기에 맞추려고 하는 게 아니고 나는 아날로그 세대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디지털보다는 굉장히 늦어요. 늦는다는 것은 사람에게 쉼 박자를 주는 거거든요.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거죠. 아날로그 세대에 태어나서 너무 생각이 많아서 오히려 그것이 장애가 될 때가 있기 때문에 나도 디지털처럼 달려보자 해서 달려보기도 하고 딱지도 많이 떼였습니다.

    ▶ 딱지는 얼마나 떼이셨어요?

    춘향전 찍을 때는 집에서 새벽 4시에 출발하거든요. 그 시간은 자동차가 많지 않기 때문에 그냥 달리죠. 그러면 계속 찍히는 거죠.(웃음)

    ▶ 앞으로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지 말씀해 주세요.

    영화가 사회에 어떻게 기능할 것인가를 보면 나쁜 쪽은 한 없이 나쁜 쪽으로 기능하게 되거든요. 좋은 쪽은 한 없이 좋은 쪽으로 기능하게 되고. 나는 문학을 통해서 나를 발견하게 되고 사색하기 위해서 덕수궁 돌담길을 걷기도 합니다.내가 찍은 일련의 영화들을 통해서 내가 문학을 통해서 나를 발견했듯이 내 영화를 통해서 또 다른 것들을 발견한다면, 요즘 정치 쪽도 그렇고 경제 쪽도 그렇고 어른이 없잖아요. 그것이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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