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수능 성적이 통보되기 하루 전인 12일 오전 11시 10분 창원의 한 고등학교.
교문을 들어서자 운동장 골대 주위에서 교복 상의를 벗은 채 공을 차는 학생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가가 3학년이냐고 묻자 "그런데요"라고 했다. 수업시간이 아니냐고 다시 물어보았다.
심드렁한 얼굴로 "수업도 안하는데요, 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옆에 있던 다른 학생이 허공에 헛발질을 하며 "비디오만 봐요"라고 맞장구를 쳤다.
교장실과 교무실 그리고 3학년 교실이 모여 있는 본관으로 들어갔다. 1층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가자 교실 옆에 3학년 여고생 2명이 무슨 이야기인가를 나누고 있었다. 이들은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낯선 방문객을 쳐다봤다.
할 일 없어 카드놀이도 "집에 가도 마찬가지죠"...교사들은 모두 교무실에 진학지도 자료분석
"매일 이런 것은 아니에요. 얼마전까지는 각 대학에서 하는 입시설명회도 갔다왔고 교육박람회 등도 구경했어요."
이 학생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연방 "이런 것 이야기해도 되나요, 그런데?"라는 말을 반복했다.
교실 안을 쳐다봤다. 20여명의 학생 대다수가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진 책걸상에 앉거나 엎드린 자세로 한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다.
학생들의 시선을 따라가니 교사도 칠판도 아닌 교실 앞쪽 왼쪽에 설치된 TV화면이 보였다.
<스피드>라는 제목의 영화가 TV에서 방영되고 있었다. 옆 교실도 영화를 보고 있기는 마찬가지.
뒷문을 열고 사진을 찍어도 옆에 동행한 교장이 교실에 들어서도 누구 하나 인사를 하거나 아는 체를 하는 학생이 없었다.
가끔 뒷문 근처에 있던 학생들이 느린 동작으로 슬쩍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TV 쪽으로 고개를 돌릴 뿐. 혹시 교장의 얼굴을 모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까지 잠깐 스쳐갔다.
그만 내려가자는 교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한 층을 더 올라가 고3 학생들이 있는 다른 교실로 향했다.
창문 너머로 발돋움을 해 쳐다보니 서너 명의 학생들이 책상 두개를 붙여 놓고 모여 앉아 있었다.
그 뒤로 학생들 몇 명이 그 학생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손에 뭔가를 쥐고 있다. 문을 열고 좀 더 다가가서 보니 카드였다.
책상 위에 올라가 양반자세로 앉아 TV를 보고 있던 학생, 책상에 엎드려 자거나 책을 보는 학생, 수놓는 학생, 멍하니 TV를 보는 학생들에게 다가가 차례대로 수능 이후 지금까지 학교에서 무엇을 했는지 물어봤다.
"오전 8시 20분까지 등교해서 자거나 책보거나 영화보다가 또 다시 잠을 자는 것 밖에는 할 것이 없어요"라고 대다수 학생이 말했다.
"이렇게 잡아 놓고 아무것도 안할 거면 차라리 집에 빨리 보내줬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학생에게 그럼 집에 가면 무슨 할 일이 있는지 묻자 "집에 가도 책보거나 게임을 하죠"라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교사가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교장과 함께 3학년 교무실로 가니 교사들이 심각한 얼굴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있거나 무슨 책들을 뒤적이고 있다. 진학지도와 관련한 입시학원 등의 자료다.
한 3학년 담임교사는 "학생들은 성적밖에 관심이 없어요. 내일 수능 성적이 발표되면 또 진학지도를 해야 하니까 담임교사들도 또 이렇게 진학지도 자료를 분석하는데 온 힘을 쏟고 있는 형편이죠"라고 하소연을 했다.
학교장은 "수능 시험(11월 5일)이 끝난 뒤 15일 후부터 지난 8일까지 매일 입시설명회, 특강, 대학 탐방, TOEIC 설명회 등을 해왔다"라고 설명했다. 매일 이같은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하루하루 가보면 제대로 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학교도 있고 오늘 우리 학교처럼 TV만 시청하는 학교도 있지만 평균적으로 보면 거의 비슷하다"라면서 "현 입시제도가 바뀌지 않는 이상 해마다 반복되는 이같은 모습은 바뀌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고 했다.
학교장은 "단위학교에서도 수능 시험후 50여일간이나 되는 이 기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 위해 여러가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지만 대다수 학생을 만족시키기는 힘들다"면서 "근본적으로 입시위주의 현 교육체계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경남지역 대다수 고교가 이 학교와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수능 시험 이후 겨울방학에 들어가는 50여일간 사실상 고3 수험생들이 이처럼 ''방치''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 때문에 수능 이후 고3 수험생들을 위한 특별수업 등의 대체프로그램 마련이 요구되고 있다.
스피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