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존상잔의 비극이었던 6.25전쟁도 63년의 긴 세월 속에서 점차 대중들의 기억에서 잊혀져가고 있다.
하지만 스무살도 안 된 어린 나이에 학도 위생병으로 전장에 나섰던 한 참전용사에게 당시의 참상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아픔으로 가슴 깊이 새겨져 있다.
1950년 9월, 전쟁이 난지 불과 석 달도 안 된 어느 날.
당시 불과 16살이었던 이상수(81, 청원군 강내면)옹은 학도 위생병으로 자원입대했다.
전쟁 통에 충북 청원에서 경남 밀양까지 가족들과 피난을 하며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던 벼랑 끝 상황은 당시 한창 교사를 꿈꾸며 책과 펜을 들어야 할 어린 그의 양손에 총과 칼을 쥐게 했다.
전쟁에 대한 막연한 공포감 속에서 그나마 훈련과 교육은 꿈같던 시간이었다.
짧은 교육을 마치고 첫 자대배치를 받은 밀양의 제7육군 정양병원의 하루하루는 어린 그에게 피를 말리는 죽음의 공포로 다가왔다.
이 할아버지는 "팔과 다리가 잘려나간 부상자들의 신음 소리에 밤잠을 이룰 수 없는 날이 계속됐다"며 "죽어서 병원을 나가기 전 마지막 살려달라는 외침이 온 병원 안에 가득했다"고 회상했다.
당시 병원으로 사용한 인근 7개 학교에는 운동장까지 부상병들이 가득 했고, 미처 처리하지 못해 창고에 방치된 일부 시신은 여우들의 밥이 되기도 했다.
스무살이 될 무렵, 최후 전선이었던 금화전투에 강제로 투입되면서 죽음과 삶의 거리는 종이 한 장의 거리로 좁혀졌다.
날마다 고지를 두고, 밀고 밀리고를 반복했던 혈투 속에서 느끼는 전쟁의 참혹한 현실은 살아야 한다는 일념조차 흐려지게 만들었다.
이 할아버지는 "북한군의 참호 속에서는 쇠사슬로 발목을 묶은 시신이 나오는가 하면 북한군의 시신에 흙을 덮어 연락호를 쌓았다"며 "전장에서는 살아남아야 할 이유도 찾을 수 없거니와 죽을 수도 있다는 현실감조차 느낄 수 없었다"고 당시의 참혹함을 전했다.
하지만 그는 어린 청춘의 꿈까지 앗아가며 평생의 기억 속에 새겨진 악몽보다 전쟁의 참상이 젊은이들에게 점점 잊혀져가는 현실이 더욱 마음 아프다.
이 할아버지는 "전쟁으로 인해 꿈은 산산이 부서지고 전쟁 이후에도 가난과 고통 속에 살았지만 단 한 번도 참전을 후회해 본 적은 없다"며 "최근 많은 학생들이 한국전쟁을 북침으로 알고 있다는 언론보도를 접하고는 할 말을 잃었다"고 한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