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건너면 되나요?" 투표소로 가는 길,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 앞에서 시각장애인 유길상(38)씨는 동행한 기자에게 물었다.
6.2 지방선거일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러 나선 유 씨에게는 투표는 커녕 투표소인 부산 북구 만덕동 백양중학교까지 가는 길부터 험난했다.
보도에 깔린 점자블록은 불법 주차차량에 가려졌고, 보도블럭 턱은 너무 높았다. 무엇보다 투표소 앞 횡단보도는 신호등이 없어 씽씽 달리는 차량 때문에 앞을 못 보는 유 씨가 건너갈 타이밍을 잡기가 너무 힘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백양중학교 교문 앞에 도착해서야 유 씨는 투표 도우미의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투표 도우미는 유 씨와 함께 투표소 안까지 동행했고 유 씨는 표를 건네 받은 뒤 기표소 안으로 들어섰다.
◈ 투표소 가는 길부터 험난, 투표소에서도 ''막막''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투표보조 용구(부산시 선관위 제공/노컷뉴스)
이번에는 투표 보조용구가 투표를 가로막았다. 봉투 형태의 보조용구는 바깥에 점자가 찍혀 있고 투표용지를 안에 넣고 기표를 할 수 있도록 제작돼 있다.
그런데 정당이 없는 교육감과 교육위원 후보를 제외한 시장과 구청장, 시의원, 구의원 후보자의 이름 옆에는 번호만 찍혀 있을 뿐 투표용지에 적힌 정당과 이름을 전혀 읽을 수 없었다.
유 씨는 "투표하고 싶은 사람의 번호와 이름을 함께 외워 오지 않으면 제대로 투표를 할 수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하지만 후보들의 이름과 번호를 외우는 일도 시각장애인 유 씨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TV토론회를 통해 토론 내용은 들어봤지만 중간중간에 자막으로 삽입되는 후보들의 약력과 공약 등은 전혀 내용을 알 길이 없었다.
게다가 집으로 배달되는 선거 공보물도 점자 공보물은 선택사항이어서, 몇몇 후보들은 점자 공보물을 아예 만들지 않았다.
유 씨는 "점자공보물을 보낸 후보는 부산시장 후보 1장, 구의원 후보 두세 장, 교육의원 후보 두세장 정도일 뿐 시의원은 점자 공보물을 거의 보내지 않아, 후보자들을 제대로 알 길이 없다"고 토로했다.
◈ 점자공보물 선택사항.. 안 보내는 후보도 많아부산시 선관위에 따르면 이번 6.2 지방선거에서 부산 시장 후보들은 모두 4,671통의 점자 공보물을, 교육감 후보들은 모두 8,475통의 점자 공보물을 제작해 발송했다.
선관위 관계자는 "그나마 점자 책자 제작 시설이 있는 부산은 나은 편"이라며, "도 단위의 경우에는 시설이 없어 점자 공보물을 만드는 것 자체가 힘들다"고 말했다.
점자 공보물 제작은 후보자들의 선택사항으로 돼 있다. 후보자 홈페이지에서도 내용을 제대로 얻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유 씨는 홈페이지를 읽어주는 음성변환 프로그램을 활용하고 있지만, 음성변환 프로그램은 글자는 읽을 수 있어도 이미지를 읽을 수 없다.
유 씨는 "후보자들의 홈페이지가 대부분 이미지로 구성돼 있어 이미지에 내용을 입력해주지 않으면 내용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부산장애인총연합회 김경식 사무국장은 "시각장애인들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축제라는 지방선거에서 여전히 소외돼 있다"며, "점자 공보물 제작을 강제규정으로 해야 하고 공보물 발송시한도 앞당겨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