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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고독 속에 죽어간 '고문 기술자' 이근안의 뒤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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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사고

    철저한 고독 속에 죽어간 '고문 기술자' 이근안의 뒤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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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폭력 가해자의 한산한 빈소
    고통 속에 사망…"신장병·전립선암 투병"
    봉사자 "병마로 고문 되돌려받는다 생각"
    가족들도 원망…"아버지 때문에 낙인 찍혀"
    물고문·전기고문·관절뽑기 등 고문 자행
    시민사회 "사죄 없는 죽음…만행 지울 수 없다"

    '고문 기술자' 이근안 전 경감. 연합뉴스'고문 기술자' 이근안 전 경감. 연합뉴스
    지난 26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의 한 장례식장. 한 빈소는 유난히 적막했다. 흐느낌도 없이 썰렁한 침묵만이 공간을 채웠다. 유족들은 굳은 표정으로 간간이 오는 조문객들을 맞이할 뿐이었다. 옆 빈소의 곡소리만 먹먹하게 번졌다. 군사정권 시절 이른바 '고문 기술자'로 악명을 떨친 이근안(88) 전 경감이 영정사진 안에서 지켜보는 마지막 모습이다.

    이근안은 국가폭력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로 평가된다. 1970~80년대 치안본부 대공수사관으로 활동하며 강압 수사와 고문을 주도했다. 그는 물고문과 전기 고문, 고춧가루 고문은 물론 관절뽑기 등 악랄한 가혹 행위로 허위 자백을 받아내며 '고문 기술자'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을 얻었다. 각 고문 수법도 최대한 잔인하고 악랄하게 설계했다. 피해자가 실신하고 구토하면 소금물을 먹인 뒤 다시 고문했다고 한다.

    이근안은 서울의 한 다세대주택에서 홀로 지냈다. 최근 건강이 악화해 요양병원 신세를 졌고 고통스러운 투병 끝에 사망했다. 그의 말년 요양을 도운 복지센터 자원봉사자 A씨는 "(이근안이) 신장이 완전히 망가져서 혈액 투석을 했고 전립선암을 앓았다"며 "모든 장기가 제 기능을 못 하다가 결국 숨졌다"고 말했다.

    그는 철저한 고독 속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보인다. 간간이 조문객이 찾아왔지만 모두 아들 등 유족의 지인일 뿐이었다. 경찰 관계자도 이근안의 지인을 수소문했지만 찾지 못했다고 한다. 26일 저녁 이근안의 지인으로 빈소를 찾은 건 그의 마지막 투병 생활을 기억하는 A씨가 유일했다.

    이근안은 2023년 초 아내를 잃었다. 한동안 가족들과 인연을 끊고 지냈다. 5년 전 요양병원에 입원한 뒤 최근에야 가족들과 연락이 다시 닿았다고 한다. 상주인 아들 이모씨도 이근안에 대한 원망이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빈소를 찾은 아들 이씨의 대학 동기는 "(이씨가) 명문대를 나오고도 아버지 때문에 낙인이 찍혀 취직에 어려움을 겪었다"며 "직장에 들어가도 오래 일하지 못하고 일터를 자주 옮겼다"고 전했다.

    이근안의 말년 투병생활을 지켜봤던 A씨 역시 그를 옹호하지는 못했다. A씨는 이근안이 요양병원에 입원할 때부터 마음이 달갑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처음엔 병원 입소를 거절하려고 했다"며 "(과거 이근안의 행정적에 대해) 도저히 용서하기 힘들다. 병마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서 자기가 한 고문을 다 돌려받는 것이라는 생각까지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간 그를 돌본 사람으로서 마지막 가는 길을 기도해주려고 왔다"며 양가적인 감정을 드러냈다.

    그가 벌인 악행은 한둘이 아니었다.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 1981년 서울대 무림 사건 등 수사 과정에서 고문을 주도했다. 1985년에는 민주화청년운동연합(민청련) 의장이었던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을 고문했다. 김 전 장관은 평생 고문 후유증을 앓다가 2011년 세상을 떠났다. 이근안에게 고문당했던 납북 어부 김성학(76)씨는 장애인이 됐다.

    이근안은 결국 민주화 이후 과거사 정리가 시작되며 1988년 공개 수배됐다. 12년간 도피 생활을 벌인 뒤 1999년 자수했다. 고문과 불법 구금 등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7년간 복역한 뒤 2006년 만기 출소했다.
     
    연합뉴스연합뉴스
    출소 이후에도 그가 관여한 사건들에 대한 조사가 이어져 피해자들의 무고함이 밝혀지기도 했다. '김제 가족 간첩단 사건'은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이 있었던 것으로 인정돼 무죄가 선고됐다. 서울대 무림 사건에서도 장기간 불법 구금과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인정됐다. 2024년에는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다 숨진 남북 어부 박남선씨 유족에게 국가와 이근안이 7억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도 나왔다.
     
    이근안은 출소 이후 목사로 활동하며 반성한다는 입장을 밝혀 왔지만, 진정한 사죄를 하지는 않았다. 설교 도중 피해자인 김 전 장관을 언급하며 "건전지로 겁을 줬더니 빌빌거리더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그는 결국 목사직을 박탈당했다. 2010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신문도 하나의 예술"이라며 고문을 정당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2013년 펴낸 자서전에서는 "간첩과 사상범을 잡는 것은 애국이었다"고 밝혔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이근안의 사망에 대해 "끝내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진정성 있는 사죄나 반성 없이 생을 마감했다"며 "가해자의 죽음은 그가 저지른 만행을 지울 수 없으며, 민주주의 역사에 새겨진 피해자들의 고통 또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애도는커녕 원망과 상처만을 다시 들춰낸 국가폭력 가해자의 마지막 뒤안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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