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남부 세븐 시스터즈 절벽. 파도는 매년 절벽을 조금씩 깎아낸다. 박종관 기자 재작년 여름, 영국 남부 해안을 찾았을 때다. 세븐 시스터즈(Seven Sisters) 절벽 위에 서서 바다를 내려다봤다. 절벽과 절벽 사이 벌링 갭(Birling Gap) 아래 해변에는 사람들이 점처럼 흩어져 보였다. 파도는 쉬지 않고 하얀 절벽을 깎아낸다. 안내판에는 이 절벽이 매년 조금씩 뒤로 물러난다고 적혀 있다. 정확히는 1년에 평균 0.6미터. 누가 지켜보지 않는 사이에도, 아무도 의식하지 않는 밤에도 파도는 멈추지 않는다고 했다. 변화는 느리다. 그러나 멈추지 않는다.
그 절벽 위에서 엉뚱하게도 다른 세븐 시스터즈를 떠올렸다. 한때 세계 석유 산업을 지배했던 일곱 개의 거대 석유회사들이다. 엑슨·모빌·쉐브론·텍사코·걸프·소칼, 그리고 BP의 전신인 앵글로-이란 석유회사. 냉전 시대 이들은 중동의 유전을 나눠 갖고 생산량과 가격을 조율하며 세계 에너지 질서를 설계했다. 지금은 대부분 합병되거나 이름이 바뀌었다. 그 질서는 이름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았다. 세계 경제는 여전히 그 질서 위에서 돌아간다.
지난달 시작된 중동 전쟁은 이제 3주째로 접어들었다. 국제 유가는 배럴당 100달러를 넘나들고 있다. 시장의 경계로 여겨지던 선이다. 세계 원유 소비량의 약 20퍼센트가 지나는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봉쇄되자 곧바로 숫자가 반응했다. 운임과 보험료가 들썩였다. 선물 가격이 바뀌며 환율과 국고채 금리도 요동쳤다. 폭 39킬로미터 남짓한 해협 하나가 세계 경제의 숨통을 쥐고 있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드러났다.
전쟁이 길어지자 미국은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들에게 해협 보호 연합에 참여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7개 나라를 거론하며 호르무즈 해협 선박 호위 작전에 동참하라고 압박했다. 참여 여부를 "기억하겠다"고까지 했다. 세계 최대 해군력을 가진 나라가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다른 나라들에 해협을 지키라고 떠넘기는 장면이다.
압박의 무게는 한국과 일본에 더 크게 실린다. 트럼프 대통령은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원유 의존도를 지적했다. 이어 주한미군과 주일미군 규모까지 언급했다. 미국의 안보 지원을 파병 논리로 끌어온 셈이다. 동맹 구조 자체가 압박의 지렛대가 됐다. 요청인지 경고인지 모호한 메시지가 이어진다. 에너지 위기가 외교와 군사 문제로 번지는 순간이다.
류영주 기자파장은 일상에 먼저 닿았다. 한국은 필요한 원유 전량을 수입에 의존한다. 중동산 비중은 70퍼센트를 웃돈다. 중동의 긴장은 실시간으로 동네 주유소 가격표로 번역됐다. 정부는 결국 석유 최고가격제 도입을 결정했다. 전기요금 인상 압력이 뒤따른다. 물류비가 오른다. 식품 가격이 움직인다. 그렇게 세계의 지정학은 우리 식탁까지 내려온다.
산업도 위협을 받고 있다. 플라스틱 원료인 납사(나프타) 공급에 차질이 생겼다. 한국은 납사의 약 3분의 2를 수입에 의존한다. 그 가운데 상당수가 중동에서 온다. 가격은 이미 50% 가까이 뛰었다. 재고는 길어야 몇 주 수준이다. 석유화학 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플라스틱, 섬유, 자동차, 전자산업 전반으로 파급된다. 중국은 자체 정제 능력과 러시아 원유를 활용할 수 있다. 우리는 같은 선택을 하기 어렵다.
역설적이다. 한국은 재생에너지 확대를 가장 적극적으로 선언한 나라 중 하나다. 2050 탄소중립을 법제화했다. 해상풍력 보급 목표를 높였다. 매년 1조원 이상 전기차 보조금을 지급한다. 그 사이에도 액화천연가스(LNG) 수입 터미널은 늘어났다. 석탄 발전소 폐지 일정은 몇 차례 연기됐다. 정부는 석탄 발전량 80% 상한제도 한시적으로 해제한다. 한쪽에서는 에너지 전환을 서두르고, 다른 쪽에서는 화석연료 의존을 연장하는 두 개의 시계가 얽혀 있다. 빠른 태엽과 느린 태엽이 같은 장치 안에서 맞물려 돌아간다.
세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 2015년 파리협정 이후 각국은 앞다퉈 탄소중립을 선언했다. 유럽연합은 2050년 탄소중립 목표를 가장 먼저 내걸었고, 독일과 영국은 석탄발전 퇴출 일정을 제시했다. 미국도 재생에너지와 전기차 전환을 국가 전략으로 내세웠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21년, 기후 목표 달성을 위해 새로운 화석연료 개발을 중단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냈다. 세계가 석유와의 결별을 준비하는 듯했다.
전쟁은 균열을 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의 에너지 안보는 급격히 무너졌다. 독일은 석탄 발전을 다시 돌렸고, 전력망으로 연결된 주변 국가들까지 그 여파를 피하지 못했다. 각국은 LNG 확보에 나섰다. 중동 사태로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자 미국은 러시아산 원유 제재를 일시 완화하고 베네수엘라의 증산을 허용했다. 위기를 키운 나라가 제재까지 풀며 가격을 붙잡으려 한다. 모순이라기보다 현재 세계 에너지 질서의 솔직한 자화상이다.
연합뉴스문제의 뿌리는 석유가 아니라 의존 구조다. 세계 경제는 한 세기 넘게 석유 위에 세워졌다. 산업과 물류, 군사와 금융까지 그 질서 위에서 돌아간다. 인프라는 석유를 전제로 설계됐다. 도시는 자동차를 중심으로 확장됐다. 무역은 화석연료를 태운 선박과 항공기를 통해 이뤄진다. 전환은 단순히 연료를 바꾸는 일이 아니다. 질서 전체를 다시 짜는 일이다. 더디고 비용이 많이 든다. 누군가에게는 생계가 걸린 문제다. 파도가 절벽을 깎아내리듯, 에너지 질서의 변화도 서두르지 않는다. 그러나 멈추지도 않는다.
세븐 시스터즈라는 이름은 본래 밤하늘에서 왔다. 플레이아데스(Pleiades) 성단, 맨눈으로도 보이는 일곱 개의 별들이다. 수천 년 전 선원들은 이 별빛을 보며 방향을 잡았다. 자연의 이름이 석유 제국의 이름으로 옮겨갔다. 제국은 사라졌지만 질서는 남았다. 우리는 지금 그 세계 한복판에서 다음 별무리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절벽은 생각보다 두껍다. 파도는 아직 갈 길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