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미국이 상호관세 무효 판결 뒤 무역법 301조 조사로 새 법적 근거를 쌓기 시작하면서 한국 산업계가 다시 통상 불확실성에 놓이게 됐다.
미국이 조사 명분으로 '구조적 과잉생산'을 전면에 내세우며 한국의 철강과 석유화학 등 산업을 직접 언급한 만큼, 이미 업황이 악화된 이들 업종이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반면 자동차와 반도체는 이미 별도 품목 관세 체계가 적용되고 있어 중복 적용되지 않는 한 직접적인 추가 부담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상호관세 무효 이후 꺼낸 '301조 카드'…이미 흔들리는 철강·석화 압박 우려
미국무역대표부(USTR)는 11일(현지시간) 한국, 중국, 일본, 인도, 멕시코, 동남아 주요국과 유럽연합(EU) 등 16개 경제권을 상대로 제조업의 '구조적 과잉 생산'을 겨냥한 301조 조사 개시를 공식 발표했다.
이번 조치는 미 연방대법원이 트럼프 행정부의 기존 상호관세 프로그램 상당 부분을 무효로 판단한 이후 나온 후속 대응 성격으로 풀이된다. 트럼프 행정부는 무역법 122조에 따른 150일 한시 글로벌 관세(10%)를 먼저 도입한 뒤 상호관세를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301조 조사를 시작한 것으로 해석된다. 무역법 122조 관세가 오는 7월 말 종료되는 만큼 미국 정부는 그 이전까지 조사 절차를 진행해 후속 관세 조치를 마련하겠다는 방침이다.
이번 조사는 상호관세를 유지하기 위한 제도적 근거를 마련하려는 성격이 강해 산업 전반의 충격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다만 산업계는 미국이 조사 명분으로 '구조적 과잉생산'을 직접 문제 삼은 점에 특히 주목하는 모습이다.
USTR는 과잉생산 우려 업종으로 자동차, 화학, 반도체, 철강, 조선 등을 제시했고 특히 한국에 대해서는 전자장비, 자동차·부품, 기계, 철강, 선박 중심의 무역흑자 확대를 언급했다. 이와 함께 한국 정부가 석유화학 부문의 설비 감축 필요성을 인정한 것도 함께 적시됐다. 이에 따라 글로벌 공급 과잉 논란이 이어지고 업황 부진까지 겹친 철강과 석유화학 산업이 주요 타깃이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철강 업계는 이미 미국의 50% 고율 관세 부담을 안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에 글로벌 경기 둔화와 중국발 공급 과잉까지 겹치며 업황이 악화된 상황에서 추가 통상 압박이 이어질 경우 부담이 더욱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특히 석유화학 업계는 최근 중동 사태 여파까지 겹치며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국내 최대 에틸렌 생산시설인 여천NCC가 '불가항력'을 선언한 데 이어 한화솔루션, 롯데케미칼, LG화학 등 주요 업체들도 잇따라 불가항력 가능성을 통보하면서 업계 전반의 경영 불확실성이 확대되는 모습이다. 공급 과잉 논란에 통상 압박까지 더해지며 업계가 '복합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허정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는 "미국이 문제 삼은 '공급 과잉' 분야를 보면 특히 철강과 석유화학 산업이 상대적으로 취약해 보인다"며 "관건은 충격을 줄이기 위해 301조 관세가 기존 품목 관세와 중첩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무역법 301조 자체에는 관세 중첩을 제한하는 원칙이 없지만 한미 간 기존 합의가 있는 만큼 협상을 통해 충격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미국과의 협상 과정에서 생산량 조정이나 대미 수출 물량 관리 등 사전 조치를 통해 추가 관세 부과로 이어지지 않도록 대응 전략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자동차·반도체 영향 제한적…투자 압박 변수"
반면 이번 조사로 자동차와 반도체 등에 미치는 영향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자동차는 미국이 이미 무역확장법 232조에 근거해 15%의 품목별 관세를 부과하고 있는 산업이다. 반도체나 의약품 등도 향후 관세 부과 시 최혜국 대우를 적용하기로 합의된 품목으로, 기존 합의를 뒤집어 추가 관세를 부과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이에 따라 301조 조치가 추가되더라도 새로운 관세를 더 붙이기보다는 기존 관세와 부담이 겹치지 않도록 적용 방식을 조정하는 방법이 현실적인 쟁점으로 거론된다.
자동차 업계에서도 직접적인 추가 관세 부과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이번 301조 조사는 기존 상호관세를 복원해 이어가려는 성격이 강하다"며 "이미 여러 나라와 맺은 관세 협상과 대미 투자 약속을 뒤집어가며 강하게 요구하기에는 미국 쪽 부담도 적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자동차와 반도체가 안심할 수만은 없다는 시각도 있다. 대미 수출 비중이 큰 품목인 만큼 관세를 더 얹기보다는 투자 이행 압박이나 비관세 장벽 완화 요구가 뒤따를 수 있어서다. 다른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301조 조사가 대미 투자 이행을 더 압박하는 수단으로 쓰일 여지는 있다"며 "미국차 수입 관련 안전·환경 기준 완화 같은 후속 입법 요구가 나올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정부도 대응의 초점을 기존 한미 관세 합의의 틀을 유지하는 데 맞추고 있다.
산업통상부는 이번 조사와 관련해 기존 한미 관세 합의에 따른 이익 균형이 훼손되지 않도록 미국 측과 긴밀히 협의하고, 우리 기업의 대미 수출 여건이 주요국보다 불리해지지 않도록 하겠다는 입장이다.
특히 지난 12일 국회에서 대미투자특별법이 통과된 데 이어 정부가 구글 고정밀 지도 반출을 허용하는 등 미국이 그동안 요구해온 사안들이 일부 반영되면서 향후 협상 역시 이전보다 긴장감이 다소 낮은 분위기에서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한편 미국이 12일(현지시간) 강제노동 문제를 별도의 301조 조사 대상으로 제시한 것을 두고는 당장 국내 산업계를 겨냥했다기보다는 중국을 겨냥한 조치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