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평택캠퍼스 P5 건설현장에 대형 타워크레인들이 빛을 밝히고 있다. 박성완 기자동이 트기 전 '세계 반도체의 수도, 평택'이라는 표지판을 지나 조금 더 차를 몰다 보면 환한 빛과 함께 생소한 광경이 펼쳐진다. 푸르스름한 하늘을 배경 삼아 들쭉날쭉 솟아오른 거대 타워크레인 수십 기는 백색 조명으로 존재감을 부각하며 어둠을 압도한다. 그 아래 드러난 공사 현장은 육안으로는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려워 비현실적인 느낌을 더한다. 인공지능(AI) 시대를 지탱할 삼성전자의 미래 반도체 생산기지, 경기도 평택 P5 건설 현장의 모습이다.
타워크레인들이 비춘 거대 부지에…2만 명 근로자 '분주'
지난 20일 오전 6시쯤 도착한 이곳은 대형 트럭의 엔진 소리, 근로자들의 대화 소리로 낮처럼 시끌시끌했다. 삼성전자 평택캠퍼스의 다섯 번째 반도체 공장(팹)인 P5 공사 현장은 앞서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가 작년 말부터 다시 활기를 찾았다. AI가 급속도로 진화, 확산하면서 핵심 부품인 메모리 반도체의 수요도 폭증하고 있는 만큼, 생산 능력을 적시에 확충해야 한다는 삼성전자의 판단에 따라 공사가 본격화됐다.
2028년 가동 예정인 P5는 AI의 두뇌 가동에 필요한 핵심 메모리 반도체인 고대역폭메모리(HBM)의 중심 생산처로서 기능할 예정이다. 여기에 투입되는 돈만 60조 원을 웃돌 것으로 전망된다. 메모리 반도체 초호황기를 맞아 공급 주도권을 쥐기 위한 글로벌 경쟁 구도를 감안하고 보면, P5 현장에 우뚝 선 크레인들은 AI 급류 속에서 절호의 기회를 조기에 잡아채기 위한 초대형 낚싯대를 연상케했다.
시장 분석가들은 올해 글로벌 반도체 매출이 사상 처음으로 1조 달러(약 1400조 원)를 넘어서고, 이 가운데 메모리 시장 규모는 4400억 달러(약 600조 원)를 돌파하며 전체의 절반에 육박할 것으로 보고 있다. 거대 자본을 동반한 폭발적 수요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한꺼번에 쏠리고 있다. 작년 4분기 양사의 D램 시장 합산 점유율은 70%에 육박한 것으로 파악됐다. 3강으로 꼽히는 미국의 마이크론은 격차 극복을 위해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적 지원 속에서 생산 능력을 확대하고 있고, 중국 기업들 역시 대규모 팹 구축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으며 추격 중이다.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신공장 건설 현장으로 들어서는 근로자들. 박성완 기자삼성전자 평택캠퍼스의 팹 건설 현장에는 2만 명 이상의 근로자들이 투입돼 한국 반도체의 '전력질주'를 준비 중이다. 육교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P5와 P4 현장으로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시간에 줄지어 입장하는 이들은 저마다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한 근로자는 "AI 호황이 오래 가서 이곳에서 만들어질 반도체가 수출에 기여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또 다른 근로자는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지만, 이 공장이 많은 이들의 일자리와 그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것이라는 생각도 한다"고 했다.
외관 갖춘 P4, 기초 다진 P5…압도적 생산능력 확보 가속화
지반 다지기 후 콘크리트 타설 등 기초 공사가 진행 중인 P5와 달리 P4는 공장의 외관이 사실상 완성된 모습이었다. 마찬가지로 수십조 원이 투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P4는 이미 일부 라인이 가동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내년 1분기까지 P4에 월 10만~12만 장의 웨이퍼를 생산할 수 있는 6세대 고대역폭메모리 HBM4용 D램 라인을 증설한다는 전략을 세운 것으로 파악됐다. 계획대로 이뤄지면 삼성전자의 D램 생산 능력은 현재보다 최소 15% 넘게 상승할 것으로 관측된다.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P4 건설현장 모습. 박성완 기자
이미 구축된 팹만으로도 삼성전자의 D램 생산 능력은 업계 선두지만, P4에 이어 P5까지 본격 가동되면 생산 확대 효과는 배가될 전망이다. 특히 P1~P4까지만 해도 2층 구조로, 각 층에 반도체를 만드는 클린룸이 2개씩 총 4개가 배치됐는데 P5는 3층 구조에 6개의 클린룸을 갖춘 세계 최대 규모의 팹으로 지어질 예정이다. 완공되면 그 크기는 축구장 20개 안팎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P4와 P5 건설 현장은 차를 타고 한 바퀴 돌아보는 데만 10분 넘게 소요될 정도로 광활했다. 현장 출입구 곳곳에는 보안 요원들이 배치됐고, 근로자들은 '홍채 인식'을 거쳐 본인 인증 후 내부로 들어가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반도체가 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국가의 전략 자산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장면이었다.
삼성 반도체의 박동 여파는 인근 지역으로도 뻗어나가고 있다. 점심 시간 건설 현장 인근 상가 음식점에는 삼삼오오 모여 식사를 하는 근로자들로 생기가 돌았다. 이곳 부동산 관계자는 "P5 공사가 작년 말 본격화되고 생산 라인 인력들도 몰리면서 오피스텔 등 월셋값도 몇 개월 사이 많이 올랐다"고 말했다. 인접 지역 곳곳에서는 TEL(도쿄일렉트론), 램리서치 등 유수의 반도체 장비 기업들의 간판도 눈에 띄었다.
미래 반도체 기술 준비도 '박차'
한편 삼성전자는 생산 능력 확대와 더불어 기술 경쟁력 확보 측면에서도 미래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야심작 HBM4는 업계 최고 성능을 확보하며 최근 세계 최초 양산 출하라는 성과도 거뒀다. AI 시장의 키 플레이어로 꼽히는 엔비디아의 신세대 AI 가속기에 탑재될 것으로 보이는 이 제품의 핵심 구성품인 D램은 최선단 1c(10나노급 6세대) 공정으로 만들어졌다. D램을 떠받치며 전력과 신호를 제어하는 칩인 베이스다이에는 4나노 파운드리 공정이 적용됐다. 1나노는 10억분의 1미터를 의미하며, 공정이 미세해질수록 성능은 올라간다.
삼성전자, 세계 최초 HBM4 양산 출하. 삼성전자 제공그 결과 삼성전자 HBM4의 동작 속도는 반도체표준협의기구(JEDEC)의 표준 속도인 8Gbps(초당 8기가비트)를 약 46% 웃도는 11.7Gbps 수준이며, 최대 13Gbps까지 구현이 가능하다는 게 관계자 설명이다. 이를 기반으로 해당 HBM4 1개는 1초에 최대 3.3TB(테라바이트)에 달하는 데이터를 이동시킬 수 있는 성능(대역폭)을 갖췄다. 속도와 대역폭 모두 업계 최고치다. 삼성전자는 HBM4에 이어 차세대 HBM4E도 준비 중으로, 올해 하반기에 샘플 출하를 계획 중이다. 이처럼 쉼 없이 내달리는 삼성전자의 행보에 시장 기대도 집중되면서 24일 유가증권시장에서 이 기업의 주가는 사상 최고점인 주당 '20만 원'까지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