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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없던 아이가 노래를…'가족'의 또다른 이름 '위탁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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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일반

    말 없던 아이가 노래를…'가족'의 또다른 이름 '위탁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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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가족이 돌볼 수 없는 아이들이 보호받는 '위탁가정'
    위탁부모와 함께 자라는 아이들…"중요한 건 정서적 유대관계"
    위탁부모 "새해 소망은 아이들의 건강한 원가정 복귀"

    크리스마스 당일인 지난 25일 서울 송파구의 한 빌라에서 김상미씨·남편 정은진(40대)씨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온유(가명)와 서아(가명)가 놀고 있다. 류영주 기자 크리스마스 당일인 지난 25일 서울 송파구의 한 빌라에서 김상미씨·남편 정은진(40대)씨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온유(가명)와 서아(가명)가 놀고 있다. 류영주 기자 
    작년 이맘때쯤 걸음마를 시작한 서아(가명·22개월)는 네 살배기 언니 온유(가명) 뒤를 따라 거실을 뒤뚱뒤뚱 돌아다녔다.
     
    거실 한 켠에 마련된 수납장에는 인형, 블록, 자동차, 큐브 등 장난감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온유가 수납장에서 나무로 된 말 모양 장난감을 꺼내자, 바닥에 앉아 있던 서아도 몸을 일으켰다. 언니에게 다가간 서아가 말 장난감을 향해 손을 뻗자, 온유는 몸을 옆으로 돌려 장난감을 옆구리에 감추고 말했다. "언니 거 말고 다른 거 줄게. 서아, 다른 거 가지고 놀아."
     
    식탁에 앉아 두 아이를 지켜보던 김상미(40대)씨가 웃으며 말했다. "서아는 언니가 하려는 건 뭐든 하려고 해요."
     
    CBS노컷뉴스 기자는 크리스마스 당일인 지난달 25일 서울의 한 가정집에서 나란히 자라고 있는 두 아이와 이들의 위탁부모인 김상미씨·남편 정은진(40대)씨를 만났다. 이 집은 친부모의 돌봄을 당장 받기 어려운 아이들이 잠시 머무는 위탁가정이다. 가정위탁은 친부모의 학대나 방임, 질병, 수감 생활 등으로 원가정에서 지내기 힘든 아동을 일정 기간 일반 가정이 보호·양육하는 제도다.

    크리스마스 당일인 지난 25일 서울 송파구에 있는 한 빌라에서 온유(가명)와 서아(가명)가 함께 놀고 있다. 온유는 서아에게 "언니가 하는 걸 잘 봐"라고 말하고 있다. 류영주 기자크리스마스 당일인 지난 25일 서울에 있는 한 빌라에서 온유(가명)와 서아(가명)가 함께 놀고 있다. 온유는 서아에게 "언니가 하는 걸 잘 봐"라고 말하고 있다. 류영주 기자

    유대관계 안에서 싹 트고, 자라는 아이들…"내 마음에 사랑이"

    온유가 이 집에 온 건 2년 전 가을이다. 태어난 지 스물두 달이 됐을 무렵이었다. 동생 서아는 지난해 6월, 생후 석 달 남짓한 시기에 이 가정에 왔다. 온유의 친엄마는 혼자 아이를 키우기 힘들어 했다. 서아 역시 친부모의 돌봄을 당장 받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면서 보호 대상 아동으로 분류됐다. 그렇게 두 아이는 각기 다른 사연을 안고 이 집에 오게 됐다.
     
    서아는 이 집에서 백일을 맞았다. 지난해 초봄에는 걸음마를 뗐다. 그 순간을 가장 열렬히 응원한 사람은 언니 온유였다. 상미씨가 휴대전화로 보여준 영상 속에서 온유는 서아가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숫자를 세며 박수를 보낸다.
     
    "하나, 둘, 셋, 넷!" 언니의 목소리를 따라 걷던 서아는 잠시 주저앉았다가도 다시 몸을 일으킨다.
     
    상미씨는 서아의 첫 걸음마 순간을 떠올리며 기쁨과 함께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그런데 동시에 '이렇게 기쁜 순간을 우리가 누려도 되나'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서아의 친부모는 이 장면을 보지 못했을 텐데 싶어서요."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온유는 또래나 어른들과 어울리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일상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거나,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크게 울거나 몸을 바닥에 굴리는 모습도 보였다. 상미씨 부부는 아이가 안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생활의 틀을 먼저 잡아주기로 했다.

    기상 시간과 식사 시간, 놀이와 휴식의 순서를 일정하게 유지했고, 장난감은 거실에서만 가지고 놀기, 밥을 먹은 뒤에는 씻고 잠자리에 들기 같은 기본적인 규칙을 반복해서 알려줬다. 생활이 예측 가능해지자, 온유가 감정을 폭발시키는 횟수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크리스마스 당일인 지난 25일 서울 송파구에 있는 한 빌라에서 온유(가명)가 정은진씨에게 몸을 기대고 있다. 류영주 기자크리스마스 당일인 지난 25일 서울에 있는 한 빌라에서 온유(가명)가 정은진씨에게 몸을 기대고 있다. 류영주 기자온유는 처음엔 성인 남성인 은진씨에게도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고 한다. 친엄마와 지내며 집 밖을 나서는 경험이 많지 않았던 탓에, 남성에 대한 경계심이 컸던 탓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온유는 은진씨 곁에 몸을 기대고, 무릎 위에 올라앉아 눈을 맞춘다. 이제는 함께 노래를 부를 만큼 가까워졌다.
     
    "온유가 처음 왔을 땐, 좀처럼 노래를 부르는 법이 없었거든요. 근데 이제는 서아랑 같이 노래도 잘 불러요. 서아야 노래 한 번 불러볼까. 싹 트네."
     
    크리스마스를 맞은 늦은 오후, 해가 기울 무렵 은진씨가 노래를 시작하자 서아의 작은 입이 열렸다. "싹 트네. 싹 터요, 내 마음에 사랑이."
     
    어눌하지만 서아의 몸동작만큼은 정확했다. 노래가 '내 마음에 사랑이'에 이르자 서아는 두 손을 가슴에 모았다가 팔을 위로 들어 하트 모양을 만들었다. 온유는 그 모습을 따라 하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두 아이의 노랫소리가 집 안을 가득 채우자 상미씨와 은진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크리스마스 당일인 지난 25일 서울 송파구에 있는 한 빌라에서 서아(가명)가 동요 '싹 트네' 노래를 부르며 율동을 하고 있다. 류영주 기자크리스마스 당일인 지난 25일 서울 송파구에 있는 한 빌라에서 서아(가명)가 동요 '싹 트네' 노래를 부르며 율동을 하고 있다. 류영주 기자은진씨는 어린아이들에게 보호자와 정서적 유대관계를 형성한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는다. 이런 은진씨의 믿음은 국가의 아동 보호 원칙과도 맞닿아 있다. 아동복지법 제4조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아동이 가급적 원가정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하며, 그것이 어려운 경우에는 가정과 유사한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같은 취지에 따라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보호가 필요한 아동을 시설보다 위탁가정으로 연계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아동이 다수의 보호 인력과 생활 공간을 공유하는 시설보다, 특정 보호자와 일상적으로 관계를 맺는 가정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정서 발달에 더 긍정적이라는 이유에서다.
     
    매일 같은 어른에게 밥을 먹고, 재워지고, 울음을 받아주는 과정 자체가 아이에게는 '관계'이자 '안전'이 된다. 제도는 임시 보호를 전제로 하지만, 아이의 하루하루는 가족의 시간 속에서 흘러간다.

    크리스마스 당일인 지난 25일 서울 송파구에 있는 한 빌라에서 서아(가명)가 동요 '싹 트네' 노래를 부르며 율동을 하고 있다. 류영주 기자크리스마스 당일인 지난 25일 서울 송파구에 있는 한 빌라에서 서아(가명)가 동요 '싹 트네' 노래를 부르며 율동을 하고 있다. 류영주 기자

    이별은 슬프지만…새해 소망은 "아이의 원가족 복귀"

    이별은 언제나 두렵다. 상미씨 역시 처음 위탁부모가 됐을 때, 매일 살을 맞대고 잠들던 아이를 품에서 떠나보내는 일이 무엇보다 힘들었다고 했다.
     
    첫 위탁은 갓난아기였다. 베이비박스를 통해 보호 대상이 된 아이는 출생신고가 되지 않아 서류 상 이름 앞에 '미상'이라는 표기가 붙어 있었다. 상미씨는 그 아이를 가족으로 돌봤지만, 결국 다른 보호 형태로 떠나보내야 했다.
     
    그 이후에도 상미씨는 또 다른 아이를 품에 안았다. 이별을 이미 두 차례 겪었지만, 다가올 이별에 익숙해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위탁부모로서 가장 바라는 결말은 분명하다고 했다.
     
    "새해 소망이요? 음…. 아이한테 가장 좋은 건, 결국 건강하게 원가족으로 돌아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온유는 어느 날 친엄마를 만나고 돌아온 날, 상미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눈이 내리면 엄마가 같이 살자고 했어." 하지만 온유의 친엄마는 현재 안정적으로 아이를 양육할 준비가 된 상태는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상미씨는 요즘 겨울 하늘을 올려다보면 마음이 번잡스럽다.
     
    한때는 연말쯤 원가정 복귀가 가능할 것이라 기대했던 시기도 있었다. 잠시 연락이 이어지며 상황이 나아지는 듯 보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소식이 끊겼다. 상미씨는 그 시간을 떠올리며 "기대가 있었던 만큼 더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위탁가정의 시간은 사랑과 이별이 동시에 놓여 있는 시간이다. 품에 안고 돌보지만, 영원히 곁에 둘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시작한 관계다. 상미씨는 "그럼에도 아이에게 잠시라도 안전한 기억을 남겨주는 게 위탁가정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오늘도 이 집에서 하루를 보낸다. 함께 웃고, 다투고, 다시 안긴다. 이별의 끝이 어디로 향하든, 그 시간만큼은 분명 가족의 시간이었다.

    크리스마스 당일인 지난 25일 찾은 온유(가명)와 서아(가명)가 머무는 집 풍경. 류영주 기자크리스마스 당일인 지난 25일 찾은 온유(가명)와 서아(가명)가 머무는 집 풍경. 류영주 기자

    "잠시만 부모가 되어주세요" 부탁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

    위탁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자격 요건을 갖춰야 한다. 보건복지부가 마련한 위탁가정 운영 매뉴얼에 따르면, 위탁부모는 만 25세 이상으로 안정적인 주거 공간과 소득을 갖추고 있어야 하며, 성범죄, 가정폭력, 학대, 정신질환 등의 전력이 없어야 한다.
     
    현재 위탁가정에는 양육보조금이 제공되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위탁부모의 헌신과 책임감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장기간 위탁이 이어질 경우 정서적 소진을 겪는 사례도 적지 않고, 위탁부모가 혼자 감당해야 하는 돌봄 부담 역시 크다.
     
    상미씨 역시 "아이를 키우는 건 결국 사람의 몫"이라면서도 "제도가 조금만 더 뒷받침되면 위탁가정이 버틸 수 있는 힘도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위탁부모의 선의와 헌신에만 기대기보다, 돌봄 지원 확대와 안정적인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다.
     
    서울시의 가정위탁 사업을 운영하는 기관인 초록우산 관계자는 "정부가 제2차 아동정책 기본계획을 통해 시설보호 중심에서 가정보호 중심으로 전환하겠다고 밝혔지만, 현장에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며 "2023년 기준 보호대상아동 2만1997명 중 위탁가정에서 지내는 아동은 9526명에 그치고, 절반 이상은 여전히 시설과 공동생활가정에서 보호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위탁을 늘리려면 '위탁부모의 선의'가 아니라 국가의 예산과 제도 책임이 먼저 뒷받침돼야 한다"며 "지방이양된 가정위탁 사업을 국고보조사업으로 환원해 책무를 강화하고, 아동 양육을 위한 '위탁아동보호비' 지원 같은 안정적인 재정 기반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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