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법원종합청사에서 열린 국민 위한 사법제도 공청회에서 토론이 진행되고 있다. 류영주 기자여당이 '사법개혁'에 속도를 내고 있는 가운데, 대법원이 공청회를 열어 의견 수렴에 나섰다. 공청회에선 역대 사법개혁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짚어보고, 재판 지연 해소와 사실심 강화를 통한 '신속한 재판' 실현이 사법제도 개편의 핵심이 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與 사법개혁 속도전에 공론화 나선 사법부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지난 9일 서초동 서울법원종합청사 청심홀에서 법률신문과 공동 주최로 '국민을 위한 사법제도 개편: 방향과 과제' 공청회를 개최했다. 이번 공청회는 사흘간 열린다.
앞서 더불민주당은 지난 8월 '국민중심 사법개혁 특별위원회'를 출범하고 △대법관 수 증원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 구성 다양화 △법관평가제도 개선 △하급심 판결서 공개 확대 △압수수색영장 사전심문제 도입 출범 등 5개 사법개혁 의제를 발표했다. 10월에는 '민주당 사법행정 정상화 TF(태스크포스)'를 출범하고 △법원행정처 폐지 △전관예우 금지 △법관 징계 실질을 사법개혁 의제에 포함시켰다.
사법부는 사법제도 개편에 앞서 공론화와 숙고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사법제도는 국민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개편의 내용과 효과에 대한 충분한 인식과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급한 개편은 자칫 막대한 사회적 비용 지출과 국민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는 인식도 있다. 이번 공청회를 개최한 이유다.
천대엽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은 개회사에서 "오늘날 많은 국민들이 사법에 대한 높은 불신을 보여주고 있고 이에 대해 사법부는 깊은 자성과 성찰을 하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며 "이런 점에서 공청회에서 여러 전문가와 시민들이 들려주시는 귀한 목소리를 경청할 것이고, 사법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 찾는 노력을 하겠다"고 강조했다.
문민정부 '사법의 민주화', 참여정부 '국민의 사법참여'…현재는
국민을 위한 사법제도 개편 공청회 : 방향과 과제 자료집. 출처=대법원공청회에서 기우종 서울고등법원 고법판사가 발표한 '우리 재판의 현황과 문제점'에 따르면 사법개혁 움직임은 역대 정부에서 꾸준히 있었다.
1990년대 김영삼 정부 당시 사법개혁 요구의 핵심은 '사법의 민주화'였다. 비민주·권위주의적 요소를 타파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을 강화해 민주적 질서를 확립할 수 있는 사법제도 개편을 추구했다.
사법부가 주도한 '사법제도발전위원회'에 의한 체포제도, 구속전 피의자심문제도 및 보증금납입 조건부 피의자석방제도가 도입됐다. 인신구속제도의 개선 및 인권의 실질적 보장이 목적이었다. '법관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특허법원과 행정법원도 설치됐다.
아울러 대통령이 주도한 '세계화추진위원회'에 의해 법조인 선발인원 확대, 사법연수원의 독립성 강화 및 교과과정이 대폭 개편됐다.
1998년에는 김대중 대통령 직속 '사법개혁추진위원회'가 구성됐다. 다만 사법개혁 건의안을 실천할 추진기구가 마련되지 않아 후속 조치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2003년 '참여정부'를 표방한 노무현 대통령 취임이 취임하면서 '국민의 사법참여',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는 사법절차'에 대한 시대적 요구가 빗발쳤다. 이에 행정부와 사법부가 공동으로 추진하는 '사법개혁위원회' 및 입법 추진 집행기구인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에 의한 사법개혁이 진행됐다.
국민참여재판, 공판중심주의적 법정심리절차가 도입됐고 양형위원회도 설치됐다. 형사 사법 절차에서의 국민의 인권 보장과 국민의 사법 참여가 강화됐다. 2009년에는 법조인 양성 및 선발제도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법학전문대학원이 설치됐다.
대법원의 정책기능을 강화하고 상고사건 적체를 해소하기 위한 '고등법원 상고부' 설치(심리불속행제도 폐지)가 시도됐지만 '법원조직법' 등 법률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해 무산되기도 했다.
2010년대 이후 사법개혁의 과제는 법조일원화와 재판의 질적 개선에 모아졌다.
2010년 국회를 중심으로 '사법제도개혁특별위원회'가 구성돼 대법관추천위원회 제도 도입, 법관인사위원회 및 평정 관련 제도 개선, 재판연구원제도 도입, 법관 임용 방식 변경, 대법관 및 판사 정년 연장이 이뤄졌다. 법조인 양성 및 선발제도의 변경에 따른 법조일원화가 마련된 셈이다. 판결서 등의 열람 및 복사 대상(판결 확정 사건의 판결서, 증거목록 등)도 확대됐다.
대법관 수를 14명에서 20명으로 증원하는 안과 고등법원 상고부·상고심사부안도 논의됐지만 여야 합의에 실패해 불발되는 일도 있었다.
사법부 내에서는 양승태 대법원장 재임 기간 대법원을 중심으로 사법제도 개선 노력이 이뤄졌다. '법의 지배 확립을 통한 인간의 존엄과 가치 보장'을 기치로 제1심 재판 집중을 통한 사실심 충실화 등이 추진됐다. 김명수 대법원장 재임 기간에도 '적정하고 충실한 좋은 재판'을 주제로 차세대전자소송, 전문법원 확대 등이 진행됐다.
2010년대 후반부터 사실심 속도 느려져…복잡사건 증가·공판중심주의 정착
국민을 위한 사법제도 개편 공청회 : 방향과 과제 자료집. 공청회에서는 그동안의 사법개혁에도 해소되지 않은 과제로 '재판 지연'이 거론됐다.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재판 신속도는 세계에서 매우 우수한 편에 속했다는 게 기 고법판사의 설명이다. 하지만 2010년대 후반부터 점차 사실심 재판의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고 코로나19의 직접적 영향을 받은 2020년~2022년을 거치는 동안 재판지연이 가속화됐다. 2023년 이후에도 재판지연 문제가 꾸준히 대두됐다.
1심 민사합의 사건의 평균처리기간은 2017년 293.3일에서 2024년 437.3일로 49% 증가했다. 지방법원의 민사항소 사건 역시 2017년 220.2일에서 2024년 327.5일로 48% 늘었다.
국민을 위한 사법제도 개편 공청회 : 방향과 과제 자료집형사 사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심 형사합의는 2017년 150.8일에서 2024년 198.9일로 31% 증가했다. 1심 형사단독(고단) 사건은 2017년 128.2일에서 2024년 187.5일로 46% 증가했다. 특히 지방법원 형사항소심 사건은 2017년 141.1일에서 2024년 225.0일로 59% 늘었다.
토론자로 참석한 시민입법위원장인 정지웅 변호사는 "재판지연의 병목 현상은 대법원이 아니라 1심과 2심, 즉 사실심에서 발생하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대법관 수만 대폭 늘리면 이는 가뜩이나 힘겨운 하급심의 '인력 공동화'를 가속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재판 지연 문제에 대해 대법원 산하 사법정책연구원은 고난도·고분쟁성 복잡사건의 증가, 공판중심주의 정착 등 사법제도 변화에 따른 법관 업무량 증가(기록·판결면수 증가)를 꼽았다. 사건 기록 1천 면 이상인 사건 수가 2014년 대비 140% 늘었고, 민사합의 사건은 판결서 평균면수가 2017년 대비 41.3% 증가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사건 평균 기록면수는 2014년 245.8면에서 2023년 1149면으로 4배 이상 늘었다.
법관 정원 동결과 법관 평균연령 증가, 고등부장 승진 제도 폐지로 인한 사건 처리의 인센티브 약화, 잦은 인사이동 및 사무분담 변경으로 인한 빈번한 재판부 교체 등도 원인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천대엽 법원행정처장이 9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법원종합청사에서 열린 국민 위한 사법제도 공청회에 참석해 자리하고 있다. 류영주 기자
토론자로 참여한 공두현 서울대 로스쿨 교수는 2018~2019년 법관임용자격의 법조경력이 급상승하면서 신규 임용이 급감했고 2020년대 들어 퇴직법관의 수가 급증했다고 지적하면서 "재판지연을 해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지속적인 법관 증원"이라고 설명했다.
김기원 변호사(서울지방변호사회 수석부회장) 역시 토론에서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을 위해서는 법관 정원을 늘려 법관 1인당 업무량이 적정하게 조정돼야 한다"며 "법관 처우를 대폭 상향해 최우수 인재가 법관직에 투신해 장기근속할 유인이 필요하고, 반면 공정성을 유지하지 못하거나 역량이 일정 기준에 미달하는 경우 재판 업무에서 배제하고 다른 직무로 전환하거나 면직을 유도하는 방안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 고법판사는 "재판 지연이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가 돼 버렸다. 1, 2심 재판을 신속하게 종결하는 것이 국민의 편익과 권리 구제를 위해 가장 중요한 과제"라며 "사실심 재판지연을 시급히 해소하지 않으면 만성 적체 상황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공청회에서 국민을 위한 사법개혁이 어떤 방식으로 이뤄져야 하는지 제언이 나오면서 현재 여당이 추진하는 사법개혁과 거리를 좁힐 수 있을지 주목된다. 1·2심 강화는 여당이 내세우는 대법관 증원 방식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번 공청회는 △우리 재판의 현황과 문제점 △사법의 공정성과 투명성 강화 △상고제도 개편 방안 △대법관 증원안 등을 주제로 3일에 걸쳐 총 7개 세션으로 진행된다. 마지막 날인 11일에는 '대한민국 사법부가 나아갈 길'이라는 주제로 2시간에 걸친 종합토론이 이뤄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