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농구 대표팀의 여준석 이현중 유기상 문정현. FIBA한국 남자농구가 한때 아시아의 2인자로 불렸다. 막강한 높이를 앞세운 '만리장성' 중국 다음이었다. 2000년대 초까지의 이야기다. 2000년대 중반부터 이란, 레바논, 카타르 등 중동 국가들이 대대적인 투자와 육성으로 아시아 남자농구의 판도를 뒤바꿨다. 한국은 아시아 농구의 중심부에서 서서히 밀려났다.
남자농구의 새로운 기수들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대표팀은 2025 국제농구연맹(FIBA) 아시아컵 조별리그 A조 첫 경기에서 호주에 61-97로 졌다. 팬들은 물론이고 선수들도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대표팀은 카타르를 97-83으로 꺾고 반등했고 11일 새벽에는 지난 대회 준우승팀 레바논을 97-86으로 완파했다.
중동 국가들의 약진으로 인해 아시아의 변방으로 밀려났던 한국 남자농구가 중동에서 열린 아시아컵에서 중동의 강호들을 연파하며 자존심을 세운 것이다. 의미있는 한 걸음이다.
대표팀은 주축 2명을 잃었다. 여준석이 무릎 인대를 다쳤고 이정현도 무릎이 좋지 않았다. 레바논은 아시아 최고의 가드로 평가받는 와엘 아락지가 부상으로 빠졌지만 한국의 전력 손실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한국은 강했다. 이현중은 28점 6리바운드 4어시스트로 활약했다. 3점슛 7개를 퍼부었다. 유기상은 3점슛을 8개나 넣었다. 카타르전에서 3점슛 7개를 퍼부었던 유기상은 레바논을 상대로 28점을 터뜨리며 새로운 '조선의 슈터' 탄생을 예고했다. 이정현을 대신해 주전 포인트가드로 나선 양준석은 10점 8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빠른 속공 전개와 날카로운 패스에 레바논 수비가 혼쭐이 났다.
안준호 감독의 판단도 빛났다. 안준호 감독은 카타르전에서 가드 정성우를 주전으로 기용했다. 카타르의 주축 브랜든 굿윈을 견제하기 위해 준비한 선수 기용법이다. 정성우의 반칙이 많아지자 곧바로 박지훈이 들어가 정성우의 역할을 이어갔다. 잘 준비된 수비 전술에 굿윈은 평소보다 부진했고 이는 대승으로 연결됐다.
레바논전도 비슷했다. 포워드 문정현을 먼저 내보내 디드릭 로슨의 전담 수비를 맡겼다. 또 베테랑 김종규가 주전으로 나서 골밑에서 필사적으로 버텨줬고 여준석의 부상 공백으로 체력적인 부담이 늘어난 이승현과 하윤기가 그 사이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었다. 매경기 상대의 특성에 따라 주전 라인업에 변화를 주는 KBL식 운영이 빛을 발했다.
안준호 감독은 경기 후 대한민국농구협회를 통해 "여준석과 이정현이 결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10명의 선수가 두 선수의 몫까지 충분히 해줬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김종규, 문정현, 양준석을 스타팅으로 내세웠고 시작부터 활력소 역할을 해줬다. 또 코트에서 쓰러질 각오로 내보냈고 그것이 승기를 잡은 계기가 됐다"며 "이현중, 유기상, 양준석으로 이어지는 공격력 그리고 하윤기, 이승현, 김종규로 이어지는 제공권 다툼에서 상당히 선전했다고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한국은 FIBA 파워 랭킹 기준 상위 10위 중 4개 팀이 몰린 A조(호주 1위, 레바논 5위, 카타르 9위, 한국 10위)에서 2승 1패를 기록해 호주(3승)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조 1위만 8강에 직행하는 가운데 한국은 B조 3위 괌을 상대로 8강 진출이 걸린 플레이오프를 펼친다. 만약 레바논에 졌다면 상대는 일본이 됐을 것이다.
한국 남자농구 대표팀. FIBA
이현중. FIBA
남자농구 안준호 감독. FIBA평소 화려한 언변을 자랑하는 안준호 감독은 "약속드린 듯이 죽음의 조에서 탈출했다. 그러나 아직 전설은 되지 못했다"며 "우리는 여기까지만 오기 위해 탈출한 게 아니다. 남은 경기에 최선을 다하고 분명히 전설이 되어 돌아가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대표팀의 새로운 에이스이자 기둥으로 거듭나고 있는 이현중 역시 " (이)정현이 형과 (여)준석이가 없는 상황이라 많은 분들이 전력에서 열세라고 생각했을 텐데, 12명의 선수가 뽑힌 이유가 있고 어떤 선수가 들어와도 잘할 거라고 믿었다"며 원팀 코리아의 힘을 언급했다.
이현중은 "종규 형이나 (문)정현이, (양)준석이가 주전으로 들어와 경기를 너무 잘 풀어줘서 승리를 거둔 것 같다. 특히 정현이가 기록적으로 잘 안 보일 수 있지만 디드릭 로슨 선수를 잘 막아주고 리바운드와 궂은일을 열심히 해주면서 다른 선수들의 오픈 찬스를 만들어줬다"며 "기상이와 함께 3점을 많이 넣을 수 있었던 것도 정현이의 궂은 일, 준석이의 리딩, 종규 형의 리더십 덕분"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