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FMB(미 샌디에이고 지역방송국) 영상 캡처"아, '저희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만…."
불 타는 집 앞에서 노란 재난복을 입고 고글을 쓴 기자가 연신 마스크를 올려가며 생방송을 하고 있었다. 불길이 거세게 일고 있는 집은 바로 기자 자신의 집이었다. "저기 불타는 곳이 거실이고 그 뒤가 창고인데요…25년 동안 살았는데…"
2007년 10월이었다. 취재원을 만나려 기다리던 한 호텔 커피숍 TV에서 흘러나오는 CNN의 한 장면에 눈을 의심했다. 아니 자기 집이 불타고 있는데 저런 것까지 리포트를 하고 있나. 새삼 기자라는 직업의 얄궂음을 생각해보게 했던 사건이었다.
그렇게 하나의 해프닝으로 각인된 캘리포니아 산불은 그러나 이후 연례행사라도 되는 듯 거의 해마다 발생했다. 그 빈도는 물론이거니와 피해도 해를 거듭할수록 커져만 갔다. 미국 캘리포니아 산림·소방국(CAL FIRE) 자료에 따르면 역대 가장 피해가 컸던 산불 20건 가운데 15건이 2015년 이후 발생했다.
2018년 캘리포니아 버트 카운티에서 발생한 '캠프' 산불을 인공위성에서 찍은 모습. NASA 제공 무려 85명의 사망자와 1만8천여건의 시설물 피해를 낸 최악의 산불은 2018년 11월 버트(Butte) 카운티에서 발생한 '캠프(CAMP)' 산불이었다. 그리고 최악의 산불 2, 3위는 모두 올해 1월에 발생했다. '이튼'과 '팰리세이드' 산불은 각각 17명과 12명의 사망자와 9400여 건, 6800여건의 시설물 피해를 냈다.
갈수록 독해지는 캘리포니아 산불의 원인은 기후변화 또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위플래시(whiplash) 효과' 때문이라고 한다.
위플래시는 '채찍질', 그리고 교통사고가 났을 때 운전자의 목이 채찍질하듯이 급격하게 앞뒤로 번갈아 꺾이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채찍이 뒤로 갔다가 갑자기 앞으로 휙 하며 날아가 타격하듯 급변한다는 뜻.
여기에 '기후'를 붙이면 폭우와 가뭄이 빠르게 번갈아 나타난다는 뜻이 된다. 비가 많이 와서 풀이 많이 자랐는데 갑자기 건조해지면서 무성해진 풀이 바짝 마르고 여기에 바람까지 심하게 불어 산불이 걷잡을 수 없게 커지는 현상. '기후 위플래시'는 그동안 바다 건너 일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기후 채찍질'은 어느 날 갑자기 우리나라를 강타했다. 겨울철 극심한 가뭄과 갑작스런 이상고온, 역대급 강풍을 타고, 사람이 달리는 것보다 더 빠르게 퍼지는 화염이 집과 차량을 덮쳤다. 불씨가 날아가 동시다발로 불이 번지는 비화(飛火)까지. 캘리포니아 산불 영상에서 보던 바로 그 장면이 의성과 안동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영남권을 중심으로 발생한 이번 산불로 무려 30명이 사망하고 여의도 면적의 165배에 달하는 면적이 불에 탔다. 이재민도 3만7천명이나 발생했다. 산불 진화 도중 헬기가 추락해 조종사가 사망하는 일도 벌어졌다. 그동안 동해안을 낀 강원도와 경북 북부에서 여러차례 큰 산불이 있었지만 이정도로 인명피해가 컸던 적은 처음이었다. 그간의 산불 대책에 인명구조 개념이 부족했다는 반성도 나온다.
문제는 앞으로다. 기후 채찍질은 극심한 가뭄 이후 폭우를 몰고 온다. '대기 스펀지' 효과라고도 한다. 스펀지처럼 변한 대기가 한껏 물을 빨아들일 때는 극심한 건조, 다시 이 스펀지를 짜내면 세찬 폭우가 내린다. 불에 탄 지표면은 매우 취약하다. 단단히 흙을 잡고 있어야 하는 나무가 불 타 없어진 지면에 폭우가 쏟아지면?
바로 산사태다.여름이 시작되고 폭우가 쏟아지면 산불 이재민들은 다시 산사태에 노출된다. 그리고 '기후 채찍질'이 반복된다. 겨울 가뭄을 겪은 뒤 산불이 온다. 나라 밖 뉴스로 보던 현상이 우리에게 시작됐다. 앞으로 불타는 자기 집 앞에서 생방송을 하는 일이 대한민국에서도 없으란 법이 있나. 대책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