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배너 닫기

전체메뉴보기

'국내용' 조롱에서 '월드컵 영웅'…축구화 벗는 전설 이근호



축구

    '국내용' 조롱에서 '월드컵 영웅'…축구화 벗는 전설 이근호

    지난 2009년 6월, 2010 남아공 월드컵 최종 예선 B조 한국과 이란의 경기에서 이근호가 돌파하고 있다.지난 2009년 6월, 2010 남아공 월드컵 최종 예선 B조 한국과 이란의 경기에서 이근호가 돌파하고 있다.
    영화에서 주연보다 조연이 빛날 순 없다. 하지만 이야기 전개를 도울 조연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축구도 마찬가지다. 골을 넣은 선수의 뒤엔 기회를 만들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선수가 존재한다.

    동료를 빛나게 하는 역할을 참 잘하던 선수가 있다. 끊임없이 경기장을 누비며 상대 수비진을 헤집어 놓았다. '투박하다'는 평가를 받더라도 돌격, 또 돌격이었다.

    한때 '국내용 선수'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지만 결국엔 '월드컵 영웅', 진정한 주인공으로 거듭났다.

    2014 브라질 월드컵 3차 예선, 한국 대 쿠웨이트의 경기에서 이근호가 공을 잡기 위해 달리고 있다. 2014 브라질 월드컵 3차 예선, 한국 대 쿠웨이트의 경기에서 이근호가 공을 잡기 위해 달리고 있다. 
    '한국 축구 레전드' 이근호의 이야기다. 이근호가 지난 20년 간의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축구화를 벗겠다고 선언했다.

    이근호는 지난 16일 자신의 SNS 계정에 "올 시즌을 끝으로 제 인생의 전부나 마찬가지인 그라운드를 떠나려 한다"며 은퇴 소식을 알렸다. "2004년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해 2023년 올해까지 20년이라는 시간을 달려왔다. 그러기에 오늘 이 결정이 쉽지는 않았다"면서도 "후회 없이 제 모든 것을 쏟았기에 미련 없이 떠난다"고 한다.

    한국 축구에서 이근호만큼 굴곡진 대표팀 인생을 가진 선수는 찾아보기 힘들다. 2000년대 후반부터 약 10년 동안 꾸준하게 태극 마크를 달면서, '국내용'이라는 조롱과 '꼭 필요한 선수'라는 칭찬을 끊임없이 번갈아 가며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국가대표 데뷔전에서 데뷔골을 넣고 환호하는 이근호. 연합뉴스국가대표 데뷔전에서 데뷔골을 넣고 환호하는 이근호. 연합뉴스
    2007년 6월 29일 이근호의 국가대표 인생이 시작됐다. 당시 핌 베어백 감독이 사령탑이던 시절, 대표팀은 제주 서귀포에서 이라크와 A매치를 가졌다. 이근호는 이미 스타였던 박주영과 함께 2008 베이징 올림픽을 이끌어 갈 차세대 스트라이커로 손꼽혔다. 이날 이근호는 A대표팀 데뷔전에서 데뷔골을 꽂아 넣으며, 신성 공격수의 등장을 확실하게 알렸다.

    이후 대표팀에서 꾸준하게 좋은 모습을 보였다. 2007 동남아 4개국 아시안컵과 2008 베이징 올림픽 등 지속적으로 국제 무대 경험치를 쌓았다. 2008년 허정무 감독이 대표팀을 맡았을 땐, '허정무호 황태자'라고 불릴 만큼 국가대표에서 뛰어난 활약을 뽐냈다. 무엇보다도 대표팀 공격의 핵심인 박지성, 박주영과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다.

    2009년 3월, 2010 남아공 월드컵 북한과의 예선전을 앞두고 이근호(앞)와 박지성이 훈련 중이다. 윤창원 기자2009년 3월, 2010 남아공 월드컵 북한과의 예선전을 앞두고 이근호(앞)와 박지성이 훈련 중이다. 윤창원 기자
    2010 남아공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 결과는 4승 4무. 지금도 '가장 걱정 없이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고 회자되는 최종 예선이다. 1등 공신은 이근호였다. 이근호는 당시 박지성과 나란히 3골을 넣어 이란의 자바드 네쿠남과 득점 공동 1위까지 올랐다.

    이렇게 그의 대표팀 인생은 정점에만 머물 듯했지만, 정작 월드컵 본선에선 그를 볼 순 없었다.

    최종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절정의 폼을 자랑하던 2008년에 비해 월드컵을 1년 앞둔 2009년의 이근호는 컨디션이 너무나도 좋지 않았다. 이는 국가대표로서의 경기력에도 영향을 미쳤고, 결국 남아공에 가지 못하는 최악의 결과를 낳게 됐다.

    최종 예선 1등 공신이었지만, 대표팀의 역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의 영광을 TV로만 지켜봐야 했다. 이근호는 이후 이 당시를 회상하며 '커리어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기'라고 꼽았다.

    2013년 10월, 한국과 브라질의 친선 경기에서 이근호가 드리블 중이다. 황진환 기자2013년 10월, 한국과 브라질의 친선 경기에서 이근호가 드리블 중이다. 황진환 기자
    월드컵이 끝난 이후에도 이근호의 최절정 당시 기량까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후임 대표팀 감독들은 이근호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근호의 장점이 대체할 수 없을 정도로 뚜렷했기 때문이다.

    특유의 왕성한 활동량으로 상대 수비를 혼란케 해, 동료 공격수들의 공간을 만들어 주는 역할이다. 이근호의 성실하고 이타적인 플레이는 이후 감독들에겐 구미 당기는 공격 옵션일 수밖에 없었다.

    2014 브라질 월드컵을 맡은 홍명보 감독은 결국 이근호를 선택했다. 그토록 염원했던 월드컵 무대를 밟게 된 것이다.

    2014 브라질 월드컵, 러시아전에서 득점 후 이근호가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2014 브라질 월드컵, 러시아전에서 득점 후 이근호가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1차전 러시아전에서 이근호는 박주영의 백업으로 벤치에서 출발했다. 후반 10분, 0 대 0 상황에서 홍 감독은 공격 활력을 높이기 위해 이근호 카드를 꺼냈다.

    경기장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리고 후반 22분, 이근호는 센터 서클부터 공을 몰고 질주했다. 페널티 박스 바깥 우측면에서 시도한 이근호의 강력한 중거리 슛은 러시아 골키퍼 이고르 아킨페프의 손에 들어갔다가 빠져나와 그대로 골문을 통과했다.

    그토록 그리던 월드컵 무대에서 골까지 넣었다. 그동안 대표팀에서 겪었던 설움을 한 번에 털어낸 순간이었다. 당시 상주 상무(현 김천 상무) 소속으로 군인 신분이던 '병장 이근호'는 곧장 카메라 앞에 서서 거수 경례를 했다. 외신들은 '이 대회에서 가장 연봉이 낮은 선수가 골을 넣었다'고 조명하기도 했다.

    골 세레머니 중인 이근호. 연합뉴스골 세레머니 중인 이근호. 연합뉴스
    이어진 2차전 알제리전에서는 구자철의 만회 골을 돕는 어시스트를 기록했고, 3차전 벨기에전에서도 눈에 띄는 슈팅을 두 차례 보였다.

    대표팀은 이 대회에서 1무 2패라는 실망스러운 결과를 갖고 귀국해 큰 질타를 받았지만,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한 이근호만큼은 거의 유일하게 비판에서 자유롭던 선수였다. '월드컵 영웅'이라는 평가도 받을 정도였다.

    2014 브라질 월드컵은 그동안 이근호에게 붙어 있던 모든 의문 부호를 떼어내게 된 대회였다.

    2017년 11월 대한민국과 콜롬비아의 경기에서 이근호가 슈팅을 하고 있다. 2017년 11월 대한민국과 콜롬비아의 경기에서 이근호가 슈팅을 하고 있다. 
    이근호는 이후 울리 슈틸리케 감독하에서도 번번이 국가대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2015 호주 아시안컵에 출전하며 한국의 준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다시 날아오른 건, 2017년 신태용 감독 체제였다. 손흥민을 향한 상대의 집중 견제를 분산해 줄 수 있는 선수가 필요했던 신태용 감독은 이근호의 왕성한 활동량을 또 한 번 선택했다. 이근호가 가장 잘하는 플레이였기 때문이다. 이근호 덕분에 만들어진 공간에서 에이스 손흥민은 훨씬 자유롭게 플레이할 수 있었다.

    2018 러시아 월드컵을 앞두고 손흥민-이근호 투톱은 신 감독 공격 전술의 핵심이었다. 33세 이근호는 그렇게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을 월드컵을 준비했다. 그러나 또다시 악재가 덮쳤다. 월드컵을 한 달여 앞두고 오른쪽 무릎 인대가 파열됐기 때문이다. 결국 최종 엔트리에서 이름이 지워졌다. 이렇게 이근호의 마지막 월드컵 도전이 부상으로 막을 내렸다.

    이후 더 이상 태극 마크를 단 이근호를 찾아볼 수 없었다. 84경기 19득점으로 그의 국가대표 기록은 멈추게 됐다.

    지난 2012년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울산-알 아흘리의 경기에서 울산 하피냐가 두 번째 골을 넣은 뒤 이근호(왼쪽)와 함께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지난 2012년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울산-알 아흘리의 경기에서 울산 하피냐가 두 번째 골을 넣은 뒤 이근호(왼쪽)와 함께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가대표뿐만 아니라 이근호는 소속 클럽도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이근호는 11번이나 옮긴 팀을 옮긴 '저니맨'이다. 그가 거쳐 간 팀은 인천 유나이티드(2004~2006), 대구FC(2007~2008), J리그 주빌로 이와타(2009~2010), J리그 감바오사카(2010~2011), 울산 현대(2012), 상주 상무(현 김천 상무, 2013~2014), 카타르 스타스 리그 엘 자이시(2014~2015), 전북 현대(2015), 제주 유나이티드(2016),  강원FC(2017~2018), 울산 현대(2018~2020), 대구FC(2021~)다.

    이중 가장 기억에 남는 커리어는 단연 2012년 '노란 머리 시절' 울산 이근호다. 당시 27세였던 이근호는 축구선수로서 최전성기의 기량을 뿜어내며 울산을 아시아 챔피언에 올렸다. 2012 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ACL)에서 이근호는 김신욱과 투톱으로 합을 맟춰, '빅 앤 스몰' 조합을 제대로 선보이며 아시아를 평정했다.

    당시 활약으로 이근호는 ACL 최우수선수(MVP)를 수상했고, 활약을 인정받아 AFC 올해의 선수상까지 휩쓸며 아시아 최고의 선수로 거듭났다.

    대구FC 제공대구FC 제공
    이근호의 은퇴 소식에 현역 선수들도 함께 아쉬워했다.

    전 국가대표 동료 기성용(FC서울)은 "수고 많았다"며 이근호의 SNS에 댓글을 남겼다. 2014 브라질 월드컵 등을 함께 나가며 대표팀 동료로 지낸 골키퍼 정성룡(가와사키 프론탈레) 역시 "그동안 고생 많았다. 제2의 인생도 응원할게"라고 앞날을 응원했다.

    그와 함께 뛴 외국인 선수들도 동참했다. 대구FC 동료 세징야는 "이 세월을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며 "훌륭한 선수이자, 훌륭한 사람이었다. 당신은 전설이다"라고 추켜세웠다. 울산 시절 동료로 지낸 데이브 불투이스(수원 삼성)도 "미래에 좋은 일만 가득하길 바란다"며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환영해 줘서 감사하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이근호의 마지막 인사는 "많이 부족했지만 아낌없이 사랑을 주시고 응원해 주신 많은 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였다. 선후배를 가리지 않고 이들을 빛나게 하기 위해 늘 조연의 역할로 희생을 자처하던 이근호는 전혀 부족하지 않았던 선수로 축구 팬들에게 기억될 것이다.


    ※CBS노컷뉴스는 여러분의 제보로 함께 세상을 바꿉니다. 각종 비리와 부당대우, 사건사고와 미담 등 모든 얘깃거리를 알려주세요.

    이 시각 주요뉴스


    Daum에서 노컷뉴스를 만나보세요!

    오늘의 기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댓글

    투데이 핫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