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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B컷]日기업 쏙 빠진 '강제동원 재판'…판사와 피해자가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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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

    [법정B컷]日기업 쏙 빠진 '강제동원 재판'…판사와 피해자가 싸웠다

    편집자 주

    수사보다는 재판을, 법률가들의 자극적인 한 마디 보다 법정 안의 공기를 읽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드립니다. '법정B컷'은 매일 쏟아지는 'A컷' 기사에 다 담지 못한 법정의 장면을 생생히 전달하는 공간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중요한 재판, 모두가 주목하지만 누구도 포착하지 못한 재판의 하이라이트들을 충실히 보도하겠습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 당사자인 김재림 할머니가 지난달 30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3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제공일제 강제동원 피해 당사자인 김재림 할머니가 지난달 30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3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제공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한 분이 또 돌아가셨습니다. 10대의 나이에 일본 전범기업에 끌려가 군수품 생산 현장에 투입된 김재림 할머니(93)가 지난달 30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늘 '법정B컷'은 여전히 진행 중인 일본 전범기업 강제동원 재판의 모습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직후 '강제동원 제3자 변제안'을 내놓으며 "한일관계 정상화의 출발점"이라고 설명했죠.

    정부의 기대와 달리 한국 법정에 선 일본 전범기업의 태도는 여전히 고압적이고 당당했습니다. 여전히 '강제동원은 없었고, 자료도 없다'는 말만 반복하죠. 모르쇠로 재판을 관망하는 일본, 그렇게 된 법정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요?

    "모른다"만 말한 日… 피해자와 재판부가 싸우게 된 법정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 등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임금 소송'과 스미세키 마테리아루즈, 에네오스, 홋카이도 탄광기선 등에 낸 '손해배상 소송'은 현재 서울고법 민사합의33부(구회근 부장판사)에서 항소심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스미세키 등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의 1심은 무척 유명한 재판이죠.

    당시 1심 재판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김양호 부장판사)는 일본 전범기업에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고 판단한 2012년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과 2018년 대법원 확정 판결을 뒤집고,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를 각하했습니다.

    수십 년을 싸워온 피해자들에게 단 1분 만에 내려진 각하 판결, 그리고 당시 판결문은 많은 언론에 보도돼 논란이 일었죠. '문명국인 대한민국의 위신 등을 고려할 때 각하가 답'이라는 게 당시 재판부의 판단이었습니다.    

    2021.06.07 서울중앙지법 민사34부, 스미세키 강제동원 손해배상 판결문 中
    "비엔나협약 제27조 전단은 어느 당사국도 조약의 불이행에 대한 정당화 방법으로 그 국내법 규정을 원용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조약을 체결한 당사국이 자국 내에서 제정한 법 또는 선고한 판결 등 국내적 법 사정으로 조약이행으로부터 이탈할 수 있다면, 국제 질서의 혼란과 이로 인해 국제 평화를 위협하게 됩니다"

    "위와 같은 법리를 토대로 이 사건을 보면,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이에 터 잡은 징용의 불법성은 유감스럽게도 모두 국내적 법 해석입니다. (중략) 따라서 대한민국은 여전히 국제법적으로는 (한일) 청구권 협정에 구속됩니다"

    "중재위원회나 국제사법재판소가 대한민국이 청구권 협정을 위반한 것으로 판단하면 대한민국 사법부의 신뢰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고, 이제 막 세계 10강에 들어선 대한민국의 문명국으로서의 위신은 바닥으로 추락할 것입니다"


    피해자들은 당연히 항소에 나섭니다. 일본 측은 무대응 전략을 펼칩니다. 일본 정부가 우리나라 법원의 송달을 거부하면서 재판이 멈춰버린 겁니다. 그러다 일본 전범기업 측은 올해 4월부터 변호인을 선임하면서 재판에 대응하기 시작합니다. 윤석열 정부가 지난 3월,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을 한국 정부가 만든 재단을 통해 지급하겠다는 '제3자 변제안'을 발표한 직후부터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죠.

    연합뉴스연합뉴스
    지난달 20일 미쓰비시 중공업 임금소송과 스미세키 손해배상 소송 두 건의 민사재판이 차례로 진행됐습니다. 두 재판의 핵심은 '피해자들이 일본 전범기업 측에서 실제 근무했느냐'입니다. 이를 증명할 문서나 자료 등이 필요한 상황이죠. 일본 측은 강제동원은 없었고, 그렇기에 관련 자료나 기록도 있을 리 없다는 입장입니다.

    2023.7.20 서울고법 민사합의 33부, 미쓰비시 강제동원 임금소송 中
    재판부 "김○○ 씨 외에는 미쓰비시중공업 공장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1심 재판부가 판결했어요. 지금도 추가로 나온 증거가 특별히 없습니다. 원고대리인"

    피해자 변호인 "피고(미쓰비시) 측에서 명부 자체를 갖고 있으니 확인해 주기를 요청했고, 석명권 행사도 요청했습니다. 피고 측에서 전혀 협조가 안되고 있습니다. 민사소송법 규정에 의해서 문서명령제출을 신청한 겁니다"

    재판부 "언제 신청했습니까?"

    피해자 변호인 "협조가 되면 신청을 안 하려고 했는데, 피고 측이 전혀 협조하지 않아서 (문서제출명령) 신청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재판부 "석명했는데 자료가 없다고 합니다"

    미쓰비시 측 변호인 "원고 주장 자체가 미쓰비시중공업에서 근무했다는 것도 아니고, 지금 피고와 미쓰비시중공업은 이름만 같지 관련이 없습니다. 자료를 찾을 수도 없고, 보유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피해자 측은 강제동원 범죄를 저지른 미쓰비시중공업이 근무기록 등 관련자료를 보유하고 있을 것이라고 보는 반면, 미쓰비시중공업 측은 그런 자료는 없다고 맞서는 상황입니다.

    그러자 피해자 측은 재판부가 직접 미쓰비시중공업 측에 관련 자료를 내라고 문서제출명령에 나서달라고 요구합니다. 재판부는 난색을 표합니다. 재판부가 문서제출명령을 하기 위해선 문서의 존재와 소지가 증명돼야 하고, 그 책임이 신청인 측에 있기 때문입니다.

    2023.7.20 서울고법 민사합의 33부, 미쓰비시 강제동원 임금소송 中
    피해자 변호인 "그 당시 징용자 현황을 적어 놓은 문서가 있으리라 추측되고, 또 현재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재판부 "무슨 근거로 파악했다는 것인가요?"

    피해자 변호인 "일본 정부에서 관련 자료 일부가 한국 정부로 넘어왔습니다. 없을 리가 없습니다. 당시 회사에서 관리한 자료들이 일부 넘어온 것이라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재판부 "애매모호해선 안 되잖아요"

    피해자 변호인 "피고 측에서 워낙 강하게 부인 중이라서…"

    재판부 "그렇다면 다른 방법으로도 입증해야죠"

    피해자 변호인 "근무기록 자체는 피고 측 영역이어서 손댈 수 없는 상황입니다. 징용을 당한 사람들이 워낙 열악하게 있어서 그 기록을 가질 수가 없잖아요.

    재판부 "민사소송 대원칙이 그런데 어찌합니까?"

    미쓰비시중공업은 모른다며 쏙 빠진 상황. 그 상황 속에서 재판부와 피해자 변호인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합니다.

    2023.7.20 서울고법 민사합의 33부, 미쓰비시 강제동원 임금소송 中
    피해자 변호인 "입증 책임 전환을"

    재판부 "입증책임 전환 사안이 아니잖아요"

    피해자 변호인 "증거자체가 워낙 편재(偏在)돼있습니다. 식민지 시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 자료를 국민들이 보유하고 있을 리도 없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입증 못한다고 배척하면"

    재판부 "입증하지 못하면 배척이 당연하죠. 다른 (강제동원) 사건은 어떻게 입증했는지 살펴보세요. 다음 기일은 별 거 없으면 종결하겠습니다"


    재판부와 피해자 변호인의 입 씨름이 이어졌고, 그 와중에 재판부는 더 이상 입증하지 못하면 변론 절차를 종료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방청하고 있던 피해자 측 관계자 한 명이 큰 소리로 항의하면서 법정은 아수라장이 됩니다. 재판부는 퇴정을 명령합니다.

    2023.7.20 서울고법 민사합의 33부, 미쓰비시 강제동원 임금소송 中
    피해자 측 관계자 "(방청석에서 일어나며) 원고에게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피고에게도 입증을 요구해야죠!"

    재판부 "누구세요? 나가세요. 그렇게 재판 중간에 끼시면 안 됩니다. 당사자나 대리인이 입증해야 하는 겁니다"

    피해자 측 관계자 "징용은 영광이 아니라 아픔입니다. 아픔을 갖고서 이런 식으로 하면"

    재판부 "무슨 자료를 내야 판단하죠. 이 상태로 계속 못 가기에 변동이 없으면 다음 기일에 변론을 종결하겠습니다. 9월 14일에 종결합니다. 1심 이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우리끼리 다투는 재판… 재판부도 "변호인, 좀 뛰어 다니세요"

    미쓰비시중공업 명판. 연합뉴스미쓰비시중공업 명판. 연합뉴스
    재판부가 9월에 변론을 종결하고 선고 절차에 들어가겠다고 재차 천명하자 피해자 측은 더욱 거세게 반발합니다. 일부 고령의 피해자 측 관계자들은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는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라며 성토했습니다.

    미쓰비시중공업 재판이 종료되고, 곧장 또 다른 전범기업인 스미세키, 에네오스 등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이 진행됐습니다. 복도에선 여전히 울분에 찬 피해자 측의 목소리가 들려왔죠.

    이 재판 역시 근무기록 등 강제동원을 입증할 자료의 존부 여부가 쟁점입니다. 재판부도 답답했는지 피해자 측 변호인에게 한 마디를 던집니다. 재판부는 피해자 측 변호인에게 강제동원과 관련해 손해배상을 판결한 재판은 어떻게 진행됐는지, 무슨 자료를 내 인정을 받았는지 등을 살펴보라고 요구합니다.

    2023.7.20 서울고법 민사합의 33부, 스미세키 강제동원 손해배상소송 中
    재판부 "원고대리인, 제가 지난번에 다른 강제동원 재판들 한 번 조사해보셔서 판결 확정된 사건들이 어느 정도의 근거 자료를 갖고 인정한 것인지 한 번 정리해보시라고 했는데 아무 것도 안 하셨네요? 찾아보셔야죠"

    법대로 판단할 수 밖에 없는 재판부도 답답했던 것일까요? 변호인을 향한 재판부의 주문은 계속됩니다.

    2023.7.20 서울고법 민사합의 33부, 스미세키 강제동원 손해배상소송 中
    재판부 "손해배상이 확정돼 제3자 변제 들어간 사건도 있잖아요? 그런 사건을 추적해서 해야 하지 않을까요? (중략) 피고들은 (강제동원이) 아니라고 합니다. 근무를 확인할 자료가 없다고 부인 중이에요"

    피해자 변호인 "회사와의 근무 관계가 나와 있는 것은 피고 측 자료밖에 없습니다. 그 외엔 자료가 안 나옵니다. 그것이 입증되지 않으면 재판부가 인정 못 한다는 것이잖아요. 그것을 원고 측에 계속 요구한다는 것이…"

    재판부 "다시 말합니다. 확정된 사건 살펴보시고 어떤 증거로 확정된 것인지 이 사건과 비교해서 내 보시라고 했잖아요. 뒤에 저렇게 사람들이 많은데 재판이 진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재판부는 최소한의 입증 자료를 내라 요구하고, 피해자 측은 해당 자료가 일본 전범기업 측에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상황.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꽉 막힌 느낌이 진하게 들었습니다. 그 순간에도 일본 기업 측은 '관련 자료가 없다'는 입장만 유지했습니다. 답답함은 결국 재판부와 피해자 측의 몫이었습니다.

    2023.7.20 서울고법 민사합의 33부, 스미세키 강제동원 손해배상소송 中
    재판부 "제가 말한 사안을 빨리 이행 좀 해주세요. 송부촉탁해서 보시거나… 대리인들이 발로 뛰어서 해야죠. 저렇게 울분에 차 계신데 대리인들이 뛰셔야죠"

    "이쪽(일본)이야 했던 태도 그대로잖아요? 우리가 미국처럼 강제로도 못하잖아요"


    피해자 변호인 "저희들이 제출할 수 있는 것은 당사자 본인들이 제출한 인우보증서 외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 외에 어떤 것이…"

    재판부 "다른 사건 가서 보세요. 어떻게 해서 대법원까지 확정됐는지요. 억울하다고 판결할 순 없잖아요"

    일본 측의 모르쇠 전략에 재판부와 피해자 변호인의 긴장감이 높아진 그날의 강제동원 재판은 그렇게 종료됐습니다.

    서울 종로구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모습. 연합뉴스서울 종로구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모습. 연합뉴스
    재판 종료 직후 피해자 가족이라는 한 고령의 여성은 "판사님, 저는 무학자라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지만 도둑놈은 숨기려고 할 겁니다. 지금도 98세 노모를 모시고 있습니다. 법에도 양심이 있을 겁니다. 부탁드립니다"라며 연신 허리를 숙였습니다. 재판부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여성의 말을 끝까지 들었습니다. 그리고 "재판은 증거가 나와야 합니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습니다.

    일본 측 관계자는 과거 재판에서도 그랬듯 그날도 모른다는 말만 반복한 채 법정을 벗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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