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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1년…韓 찾은 우크라 고려인들



광주

    [르포]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1년…韓 찾은 우크라 고려인들

    전쟁 발발 1년…광주고려인마을서 생활하는 우크라이나 거주 고려인
    우크라이나 출신 아동들, 전쟁 당시 상황 생생하게 기억
    부모들은 생계 걱정…"아르바이트라도 하려면 한국어 필수"
    신조야 고려인마을 대표 "예산 부족해 아쉬움 커"

    광주 광산구에 위치한 동포종합지원센터. 박성은 기자광주 광산구에 위치한 동포종합지원센터. 박성은 기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1년 가까이 이어지면서 전쟁을 피해 광주고려인마을로 대피한 고려인들은 생계 고민 등으로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지난 17일 광주 광산구 고려인마을에서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는 우크라이나 동포들을 만났다.

     

    전쟁 직접 겪은 아이들…아직도 또렷이 기억하는 '그날'


    "따라 해 보세요. 심리학, 읽다, 국물"
     
    지난 17일 오후 광주 광산구 고려인마을에 마련된 동포종합지원센터에서는 선생님이 읽어주는 단어를 따라 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앞서 말한 단어를 씩씩하게 따라 하고 한 글자 한 글자를 서툴게 공책에 써내려 갔다.
     
    지난 17일 동포종합지원센터에서 한국어 수업을 듣고 있는 아이들. 박성은 기자지난 17일 동포종합지원센터에서 한국어 수업을 듣고 있는 아이들. 박성은 기자
    같은 날 오후 3시가 되자 책꽂이에서 자신의 공책을 찾아 자리에 앉은 아이들은 열심히 수업을 따라가면서도 이내 옆자리 친구와 장난을 치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어느 방과 후 교실과 다르지 않은 교실 곳곳에는 태극기를 그린 그림과 크리스마스 파티 흔적이 남아 있었다.

    교실을 빼곡히 채운 20여 명의 아이들 가운데 절반은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대한민국으로 대피해 왔다.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을 대한민국에서 지내온 아이들은 또래 다른 아이들처럼 순진한 표정이지만 아직도 전쟁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부모님을 따라 한국에 들어온 지 4개월이 된 알렉산더(17) 군은 "전쟁이 난 그 당시 컴퓨터로 공부를 하고 있었고, 갑자기 전쟁이 시작됐다는 메시지가 왔다. 곧바로 인터넷에 관련된 내용을 검색해 봤다"며 "그전에는 전쟁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너무 무서웠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부모님과 상의해 한국에 들어오게 됐다"라고 말했다.
     
    지난 17일 동포종합지원센터에서 한국어를 받아 적는 고려인동포 모습. 박성은 기자지난 17일 동포종합지원센터에서 한국어를 받아 적는 고려인동포 모습. 박성은 기자
    원격으로 우크라이나 학교의 온라인 수업을 듣고 있다는 크리스티나(15) 양은 부모님과 어린 동생 두 명과 대한민국에 온 지 3개월 차다. 열심히 공책에 한국어를 받아 적으면서도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어려워하는 모습이었다.
     
    크리스티나 양은 "멀쩡했던 집에 폭탄이 떨어져 더 이상 살 수 없는 곳이 됐다"며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좋다"라고 말했다.

    크리스티나 양의 동생 아르쫌(7) 군도 한국에 오니까 어떠냐는 질문에 대답 대신 엄지를 들어 보이며 수줍게 웃었다.


    우크라이나 떠나온 부모들은 생계 걱정…"그래도 살아있음에 감사"


    교실에는 어린아이들 뿐만 아니라 생계를 꾸리기 위해 한국어를 배우는 우크라이나 출신 부모들의 모습도 쉽게 볼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전쟁으로 폐허가 된 우크라이나를 떠나 대한민국을 찾은 우크라이나 거주 고려인들은 기초적인 수준의 한국어라도 구사하기 위해 공부 삼매경이다.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라도 하기 위해서 한국어는 필수다.
     
    한국에 들어온 우크라이나 부모들은 일용직이나 공장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 17일 대한민국에 온 지 10개월 차에 접어든 안예레나(43) 씨. 박성은 기자지난 17일 대한민국에 온 지 10개월 차에 접어든 안예레나(43) 씨. 박성은 기자
    안예례나(43)씨는 지난 4월 고령의 부모님과 함께 23살 딸을 데리고 한국 땅을 밟았다. 선천적으로 청각 장애가 있는 딸은 전쟁 폭격 소리로 장애가 더 심해져 그녀가 가장의 역할을 도맡아야 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지난해 2월 24일 새벽 4시 집에 있는 지하 공간에 숨어 있었다는 안예레나씨는 당시 상황을 힘겹게 떠올리며 운을 뗐다.

    안예레나씨는 "가스, 물, 전기 그 어느 것도 공급되지 않아 마을이 사실상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며 "폴란드 국경 지역에서 대기하다가 한국 고려인마을에서 비행기표를 지원해 준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해 겨우 우크라이나를 벗어났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팔을 다쳐 공장에서는 일을 할 수 없어 센터에서 일하면서 지원금을 받고 있다"면서 "고려인마을에서 지원해 줘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지만 한국어를 배우는 게 가장 어렵다"라고 말했다.
     
    알료애나(35)씨도 평생을 바쳐 지은 집과 터전이 없어져 가족 5명이 다 같이 한국에 올 수밖에 없었다. 그녀도 센터에서 진행하는 한국어 수업에 참여해 자녀들 옆에서 서툴게 한국어를 써내려가고 있었다.
     
    알료애나 씨는 "미사일이 날아가는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하고 지금도 비행기 소리만 들어도 놀라곤 한다"면서 "여기서 살기 위해서는 열심히 한국어를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에 같이 수업을 듣는다"라고 말했다.

     

    광주고려인마을 우크라이나 800여 명에 비행기표 지원…예산 부족


    지난해 2월 전쟁이 시작된 이후 광주 고려인마을에서는 지난 17일 기준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던 고려인들 857명에게 비행기표를 지원했다.
     
    광주고려인마을은 이들이 대한민국에 정착하는데 필요한 많은 것들을 지원하고 있지만 예산이 부족해 충분한 지원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17일 광주 광산구 동포종합지원센터 벽화. 박성은 기자지난 17일 광주 광산구 동포종합지원센터 벽화. 박성은 기자
    신조야 고려인마을 대표는 "전쟁판에서 겨우 구해온 고려인동포만 800여 명에 달한다"면서 "정착에 필요한 취업, 학교, 거주지 등을 지원하고 있지만 예산이 부족해 아쉬울 뿐"이라고 말했다.
     
    당장 치료가 필요한 정도로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도 다수다. 하지만 건강 보험은 입국하고 6개월 이후부터 적용돼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례도 많다.
     
    또 학교에서 배움에 정진해야 할 아이들은 우크라이나를 급하게 떠나면서 한국 학교 입학에 필요한 서류를 챙겨 오지 못해 입학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다.
     
    신조야 대표는 오는 23일 국회에서 열리는 토론회에 참여해 우크라이나 고려인동포의 정착과 관련된 내용을 주제로 토의할 예정이다.

    주요 내용으로는 △입학 관련 서류 미비할 경우 대안 마련 △대학입학 시 잔고증명서 폐지 필요 △한국 고등학교 졸업 고려인동포 장학금 대상 배제 문제 △교내 러시아어 교육 부재 등이다.
     
    토론회에는 신조야 대표, 서이리나 고려인마을 학부모 대표와 월곡중 2학년인 박베로니카 양이 참여할 예정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언제 끝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떠나 대한민국을 찾은 고려인들의 힘겨운 한국생활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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