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열사 서거 50주기를 맞아 직장갑질119가 직장인 1천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사진=직장갑질119 제공)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외침을 남기고 분신한 고(故) 전태일 열사가 숨진 지 50년이 흘렀지만, '지금 시대의 전태일'이라 할 수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여전히 노동환경 개선을 체감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이들은 절반 이상이 '고용 불안정'을 느끼고 있으며, 앞으로도 근로조건이 크게 나아지리란 희망을 품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9일 시민단체 직장갑질119는 '전태일 서거 50주기'를 맞아 지난달 22~26일 여론조사 전문기관 엠브레인 퍼블릭에 의뢰해 직장인 1천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를 이같이 발표했다.
직장갑질119는 현재 직장인들의 근로환경 및 인식 변화를 알아보고자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 피복공장의 재단사로 일했던 전 열사가 생전에 평화시장 노동실태를 조사할 당시 사용했던 설문조항을 현대에 맞게 변용했다고 밝혔다.
조사 결과, 정규직보다 열악한 처지에 있는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느끼는 변화가 더 미미한 것으로 확인됐다.
직장갑질119에 따르면, '귀하는 현재 직장의 고용상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정규직의 67.7%가 안정적이라고 답한 반면 비정규직은 66.8%가 '불안정하다'고 응답했다. 노동조합에 소속된 노조원(70.4%)과 공공기관(69.6%), 대기업(65%) 소속 근로자들은 해고나 실직의 위협으로부터 다소 자유로웠지만, '5인 미만'의 영세사업장(59%)과 노조에 가입되지 않은 직장인(50.6%)들은 이같은 불안을 더 높게 느끼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같은 반응은 앞으로의 전망을 묻는 질문에서도 고스란히 묻어났다. '앞으로 본인의 근로조건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물음에 정규직(56.3%) 및 공공기관(65.7%)·대기업(59.3%) 근로자들은 긍정적으로 응답한 데 반해 비정규직(54.5%)과 5인 미만 사업장 근로자(55.7%)들은 "그렇지 않다"고 답해 현격한 온도 차를 보였다.
전태일이 일하던 1970년대와 비교해 노동자들의 삶과 처우가 달라졌는지 묻는 문항에서도 정규직은 51.5%가 그렇다고 바라봤지만, 비정규직은 37.8%만이 '좋아졌다'고 답한 것으로 확인됐다.
(사진=직장갑질119 제공)
실제 근로 양태를 살펴볼 때 비정규직이나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은 충분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설문 결과 직장인들의 한 달 평균 휴일이 8.25일로 산출된 가운데, '8일 미만'을 쉬고 근무한다는 응답은 비정규직이 28%로 정규직(21.3%)보다 많은 것으로 집계됐다. 복리후생이 비교적 잘 돼있는 공공기관은 7.8%만이 평균 휴일 일수를 보장받지 못했지만, 5인 미만 사업장은 같은 경우가 29%로 3.7배나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또 대부분의 응답자(94.9%)는 주말(토·일)을 포함해 법적 공휴일 등 달력상 '빨간 날'인 휴일마다 쉬기를 원한다고 답변해 현실과의 거리를 보여줬다.
구체적으로 응답자들의 절반 이상(54.8%)은 원하는 날 쉬지 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가장 큰 이유로는 '회사 규칙이기 때문'(26.3%)이 꼽혔으며 △수당을 더 벌기 위해서(19.6%) △기업주가 강요하기 때문(9.8%) 등이 뒤를 이었다.
다만, 남성·정규직·사무직·공공기관 및 300인 이상 민간기업, 월 500만원 이상을 받는 고임금 노동자들에 비해 여성·비정규직·서비스직·중소기업 및 저임금 노동자들이 더 휴무 사각지대에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추가근무도 일상이었다. 하루 평균 근무시간(8.05시간) 이상을 근무한다고 응답한 근로자가 811명에 달한 가운데 '일이 바쁘니까'(54.7%)가 최다 사유로 꼽혔고, △수당을 더 벌기 위해(30%) △사업주가 강요하기 때문(15.3%) 등도 주요 이유로 언급됐다.
특히 근로형태에 따른 연장근로 여부의 차이가 두드러졌다. 정규직은 22%만이 수당을 더 벌기 위해 일한다고 답했지만, 비정규직은 그 두 배가 넘는 49%가 추가수당을 위해 8시간 넘게 일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비(非)사무직(43.8%) 역시 사무직(18.6%)의 두 배를 훌쩍 넘는 인원이 같은 이유로 추가노동을 감수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처럼 8시간 이상 근무가 상시화되면서 응답자 '10명 중 7명'은 건강 악화를 실감하고 있었다. 설문대상자의 67.2%는 '피로하다'를 가장 큰 건강상 영향으로 밝혔고, '유해하다'고 답변한 이들도 9.7%나 됐다. 현재 건강상태에 대해서도 '좋지 않다'고 응답한 비율이 35.3%에 이르렀다.
(사진=직장갑질119 제공)
아울러 적잖은 직장인들은 반세기 전 전태일 열사의 외침이 우리 사회에서 지켜지고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인 것으로 나타났다.
'귀하는 현재 근로기준법이 잘 지켜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문항에 64.5%는 '그렇다'고 응답했지만, △별로 지켜지지 않고 있는 편이다(29.4%) △거의 지켜지지 않고 있다(6.1%) 등 부정적 반응도 35%를 넘겼다. 각 사업장들의 근로 실상을 관리감독하는 고용노동청과 근로감독관을 신뢰하는지 여부와 관련해서도 41.6%가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해 신뢰한다는 이들(41.6%)과 같은 수준으로 파악됐다.
이들은 절반 이상(63.2%)이 '우리나라 정치가 전태일의 유언과 외침을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도 '그렇지 않다'고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직장갑질119는 정부가 오는 13일 예정된 전태일 열사의 50주기 추도식에서 전 열사가 산업 민주화와 노동인권 증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국민훈장 1등급인 '무궁화 훈장'을 수여하기로 한 것을 두고, 훈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 열사의 유훈을 지키는 일이라고 일갈했다.
직장갑질119는 "오늘날의 전태일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은 김대중 정부 시절 제정된 파견법, 노무현 정부 시절 제정된 비정규직법 때문에 더욱 악화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를 인정했고 법 개정을 약속했다"며 "취임 3년 6개월이 되도록 '비정규직 사용사유 제한' 등의 공약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어 "무궁화 훈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태일이 목 놓아 외쳤던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절규"라며 "문 대통령의 공약을 지키는 것이 전태일 50주년에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