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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뉴스]"백선엽 서울현충원 안장" 주장이 억지인 이유



국방/외교

    [딥뉴스]"백선엽 서울현충원 안장" 주장이 억지인 이유

    서울현충원은 오래 전부터 장지 다 찬 상태
    장군 묘역 포기하고 화장 후 사병 묘역 등에 묻힌 사례는 있어
    백선엽 친일행적 감안할 때 또다른 특혜 시비 우려

    지난 11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백선엽 장군 빈소에서 조문객들이 헌화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미래통합당 등 보수 야권에서는 지난 10일 별세한 고 백선엽 대장을 국립대전현충원이 아니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하지만 간도특설대 활동 등 백선엽 장군의 친일 논란을 차치하더라도 서울현충원에는 이미 안장될 자리가 없는 데다 유족들도 대전현충원 안장에 동의한 상황이어서 정치 공세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수 정치권 "백 장군을 서울현충원으로"…정부 "장지가 차 어렵다"

    이같은 주장을 먼저 하기 시작한 것은 대한민국육군협회와 재향군인회, 상이군경회 등 군 관련 단체들이다. 이들은 백선엽 장군이 별세한 지난 10일 이후 그를 6.25 전사자들이 잠들어 있는 서울현충원에 안장하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정치권도 이같은 주장에 합류했다. 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는 11일 페이스북에 "백 장군을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모시지 못한다면 이게 나라인가"고 한 데 이어, 13일엔 "(김대중·김영삼) 전직 대통령은 동작동에 모신 전례가 있기 때문에 대통령이 결단해서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모실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이같은 주장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미 백 장군의 안장지는 유족과의 협의에 따라 국립대전현충원으로 결정된 상황이다. 그가 별세하기 전부터 서울현충원은 장지가 꽉 찼기 때문에 대전현충원에만 안장이 가능하다는 것이 보훈처의 공식 입장이다.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참배객들이 묘역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이한형 기자/자료사진)

     

    실제로 대전현충원은 서울현충원의 안장 능력이 서서히 한계에 다다름에 따라 지난 1985년 준공됐다. 여기에는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과 연평도 포격도발 등에서 전사한 이들도 잠들어 있다.

    백 장군의 아들인 백남혁씨는 지난 12일 빈소에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가족들도 대전현충원 안장을 알고 있었고, 아버지도 생전 대전현충원 안장에 만족했다"며 "서울이나 대전이나 대한민국 땅이고 둘 다 현충원이며 아버지가 지난해 건강했을 때 이미 대전에 안장되는 것으로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다만 그동안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2009년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과 2015년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당시 서울현충원 장지가 꽉 차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가족의 요청에 따라 국가원수 묘역에 안장됐기 때문에 특혜 논란이 일기도 했다.

    국가보훈처 등의 설명을 종합해 보면, 본인이나 유가족 등이 꼭 대전이 아닌 서울현충원행을 희망할 경우 납골당인 충혼당에 안장할 수는 있다. 이 경우에는 화장을 하지 않고 매장할 수 있는 장군 묘역과 달리 화장을 해야 한다.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묘역. (사진=박종민 기자/자료사진)

     

    ◇"전우들 옆에 묻어달라" 장군 묘역 포기한 두 명의 전직 장성

    또다른 예외로는 두 명의 전직 장성이 있다. 지난 2013년 별세한 고 채명신 중장과 지난 6월 세상을 떠난 고 황규만 준장이다.

    2013년 11월 별세한 채 장군은 오래 전부터 베트남전 전사자들이 안장된 서울현충원의 사병(병, 부사관) 묘역에 묻히길 희망해 왔다. 당초 그의 장지는 대전현충원 장군 묘역이 될 예정이었지만 유가족이 이를 강력히 주장한 끝에, 국방부는 고인을 화장해 서울현충원의 사병 묘역에 안장하기로 했다.

    당시에도 서울현충원은 장지가 꽉 차 있었기 때문에 이를 관리하는 주무부처인 국방부는 다소 난색을 표했지만, 고인의 뜻을 존중해야 한다는 여론에 밀려 장군이 사병 묘역에 안장된 첫 사례가 됐다.

    지난달 별세한 황 장군은 6.25 전쟁 당시 자신의 부대를 도우러 왔다가 전사한 고 김수영 소위의 곁에 묻히길 희망해 왔다. 국방부는 황 장군이 생전에 이같은 뜻을 밝혀 왔고, 김 소위 유가족도 이에 동의했던 것 등을 감안해 그를 서울현충원 장병 묘역에 잠든 김 소위 옆에 안장했다.

    두 사람은 전직 장성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대전현충원의 장군 묘역 안장 대상이었다. 장군 묘역의 경우 26.4제곱미터(8평)의 공간을 보장받으며 화장이 아닌 매장이 가능하다. 반면 대령 이하의 장교와 사병은 3.3제곱미터(1평)만을 제공받으며, 화장만이 가능하다.

    이처럼 정부와 유가족이 백 장군의 장지를 대전현충원으로 못박았음에도 불구하고 보수 정치권은 계속해서 그의 서울현충원 안장을 요구하고 있다.

    납골당인 충혼당 안장 이외에 가능한 방법은 정부의 정무적 판단을 통한 특례 인정뿐이지만 친일파로 규정된 그에게 특혜를 주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채명신·황규만 장군의 사례처럼 장군 묘역을 포기하고 화장을 거쳐 서울현충원 장병 묘역 등에 안장되는 것도 가능할 수는 있겠지만, 유가족의 동의가 필요하다. 고인이 과거 이같은 방안에 대한 입장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기에 또다른 논란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

    김원웅 광복회장은 13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고인이 훈장을 받았으니 서울현충원의 사회공헌자 묘역 등에 묻힐 수 있다는 얘기는 법규에도 어긋나고 법규를 과도하게 확대 해석해서 설명하는 것이다"며 "현행 국립묘지법을 상당히 왜곡해서 설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앞줄 맨 오른쪽이 당시 1군사령관이었던 백선엽 대장. (사진=연합뉴스/자료사진)

     

    ◇'6.25 전쟁영웅' 통념 뒤엔…간도특설대 활동·선인학원 비호 논란도

    백 장군은 혼란했던 해방 전후 시대 가운데서 공과가 극명하게 갈리는 인물로 손꼽힌다.

    그는 해방 전인 1943년 4월부터 일제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 경력이 있어 지난 2009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목됐다.

    조선인 독립군 토벌 부대로 악명 높았던 간도특설대는 일제 패망 전까지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을 대상으로 108차례 토공 작전을 벌였고,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 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한다.

    고인은 생전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적은 있지만, 독립군과 직접 전투를 한 적은 없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같은 해명과 달리 1993년 일본에서 나온 책 '대(對) 게릴라전-미국은 왜 졌는가(対ゲリラ戦-アメリカはなぜ負けたか)'에서 반민족 행위를 시인하는 취지로 기술한 적은 있다.
    백선엽 장군이 일본에서 낸 책 '대(對) 게릴라전-미국은 왜 졌는가'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백 장군의 복무 시절인 1944년 7월, 9월, 11월 간도특설대가 무고한 조선인 등을 살해하거나 식량을 강탈했다는 등의 기록은 당시 상황을 기록한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에 담겨 있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에는 1사단장을 맡으면서 경북 칠곡에서 벌어진 다부동 전투를 통해 북한군의 대구 진출을 막고 평양을 탈환했다.

    전쟁 이후에는 동생 고 백인엽 중장과 함께 이름 한 글자씩을 따서 세운 선인학원이 각종 사학 비리를 저질렀고, 그 이면에는 백 장군을 비롯해 박정희 정권의 비호가 있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재단을 실질적으로 운영했던 백인엽씨는 1981년 업무상 횡령과 배임수재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지난 2010년 정부는 백선엽 장군을 '명예 원수(5성 장군)'로 추대하려는 방안을 검토했다. 하지만 채명신 장군을 비롯한 6.25 참전자들이 "건국사와 국군사가 북한 역사관에 종속되는 꼴이다"며 반대하고 나서면서 결국 무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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