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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일반

    한국에서 ''왕따'' 필리핀에선 ''인기짱''

    • 2008-12-23 09:00

    [연속기획 ''新 라이따이한은 누구의 자식인가'' ②] 한국 아빠와 필리핀 엄마 둔 선령이와 혜진이

    우리나라 남성과 베트남이나 필리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이른바 신 라이따이한과 코피노 아이들이 어머니 나라에 내팽겨쳐진 채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 CBS는 이같은 ''신라이따이한''과 ''코피노'' 아이들의 고달픈 삶을 집중 조명해 보고 해법이 무엇인지를 진단하는 5부작 해외취재 기획시리즈를 마련했다. 23일 두 번째 순서로 ''한국 국적의 코시안 선령이와 혜진이가 엄마의 나라로 보내져 필리핀 사람으로 커가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도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엄마의 나라로 보내지는 한국 국적의 아이들
    ②필리핀에서 학교 다니는 선령이와 혜진이
    ③코피노 아이들, ''당신의 아이(?)가 필리핀에서 자라고 있다''
    ④끝나지 않은 신라이따이한의 ''한(恨)의 눈물''
    ⑤아픔은 치유될 수 없나

     

    ◈ 부모는 하나인데, ''언니는 한국인·동생은 필리핀인''

    한국인 아빠와 필리핀인 엄마를 둔 한국 국적의 아이들이지만 엄마의 나라 필리핀에 보내진 12살 선령이와 10살 혜진이.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자매지만 선령이는 자신을 ''한국인''이라고 했고, 혜진이는 ''필리핀인''이라고 했다.

    필리핀 현지에서 두 아이를 만났다.

    선령이와 혜진이가 사는 곳은 필리핀 마닐라에서 비행기로 1시간 정도 거리인 바콜로드라는 도시였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40분을 달려 선령이와 혜진이가 사는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에서 취재진을 맞이해준 것은 선령이와 혜진이가 아닌 주민들이었다.

    주민들은 선령이와 혜진이를 만나러 먼 이국땅 ''코리아''에서 온 취재진에게 넉넉한 인심을 보여주며 아이들의 집까지 친절하게 안내해줬다.



    ◈ 핑크색 드레스를 입은 ''천사들''

    선령이와 혜진이는 핑크색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는 핑크색 핀을 꽂은 ''천사''의 모습으로 취재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아이는 한국에 있는 엄마가 매달 120만 원씩 보내주는 돈으로 뉴타운에 살면서, 사립학교에 다니며 필리핀의 다른 아이들에 비해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언니 선령이는 필리핀말인 따갈로그어와 영어를 주로 사용하면서 서툴지만 한국말도 곧잘 했다. 하지만 동생인 혜진이는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했다.

    언니 선령이는 비교적 철이 일찍 든 아이였다.

    "엄마 너무 보고 싶어요. 엄마도 우리를 그리워하고 슬퍼하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선령와 혜진이가 공부 열심히 하면 엄마는 행복해요. 슬퍼하지 마세요. 엄마, 우리는 잘 있어요"

    ◈ 한국에서 ''학업부진아'' ''왕따''였던 선령이, 필리핀에선 ''우등생'' ''인기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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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 아빠와 필리핀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한 자매지만 자신이 어느 나라 사람이 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말을 했다.

    선령이는 자신을 ''한국 사람''이라고 했다.

    "당연히 한국인이죠. 외모로 볼 때 쌍꺼풀이 없는 갸름한 ''칭키 아이''가 그렇고 제 모든 몸이 한국인이예요."

    하지만 선령이는 한국보다는 필리핀에서 살기를 원했다.

    한국말은 어려워 공부를 잘 못했는데, 필리핀말은 배우기 쉽기 때문에 공부도 잘하고 친구들에게 인기도 좋다는 이유에서다.

    선령이 자매의 집에는 선령이와 혜진이가 학교에서 받은 30여 개의 각종 우등상장과 메달이 액자에 끼워져 장식돼 있었다.

    한국에서는 ''학업부진아''였고 ''왕따''였던 아이가 이 곳 필리핀에서는 ''우등생''이고 ''인기짱''이었다.

    선령이는 한국 학교에 다니는 잠시 동안 한국어가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고 고백했다.

    "필리핀말은 쉬워요. 그래서 공부를 잘하지만 한국말은 어려워서 몰라요. 숙제는 머리 아프고 공부는 진짜 어려웠어요"

    ◈ "필리핀서 살고 필리핀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요"

    자신이 한국인이라면서도 선령이는 국적은 필리핀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국보다 필리핀에서 오래 살았고, 필리핀에서의 생활이 익숙하고 행복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결혼도 필리핀 남자와 하고 싶다고 했다. 필리핀 사람이 한국 사람보다 더 점잖고 다정다감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이 문제를 생각하면 필리핀 사람과 한국 사람이 결혼하면 두 나라의 아름다움을 모두 갖춘 아이를 낳을 수 있어요"

    선령이는 필리핀인 엄마와 한국인 아빠 사이에서 예쁘게 태어난 자신과 동생에 대해 매우 만족해했고, 일반적인 한국 아이들과 달리 혼혈인에 대한 편견이 거의 없어 보였다.

    선령이는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남자아이들이 놀리고 때려서 싫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한국말이 어려워 숙제도 잘 못하고, 잠도 잘 자지 못하며 친구들에게 놀림까지 받았으면 선령이가 한국에서 행복할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 엄마를 쏙 빼닮은 혜진이, "나는 필리핀 사람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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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니 선령이와 달리 동생 혜진이는 겉모습부터 한국 아이와는 달랐다.

    검은 피부에 짙은 쌍꺼풀 등이 그랬고, 사용하는 따갈로그어가 영락없는 필리핀 아이였다.

    언니와 달리 혜진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을 ''필리핀 사람''이라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필리핀말을 쓰고 한국보다 필리핀에서 더 오래 살았기 때문"이란 10살 혜진이의 말에 더 이상의 이유를 물을 필요가 없었다.

    앞서 한국에서 만난 아이들의 엄마 자냇 에스포라스 씨와 혜진이는 ''판박이''였다.

    아마도 선령이는 아빠의 유전자를, 둘째 혜진이는 엄마의 유전자를 더 많이 물려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진이는 한국과 필리핀 모두 좋지만 엄마가 필리핀에서 사는 것이 좋다고 해 한국을 떠나 필리핀에 왔다고 했다.

    혜진이도 언니 선령이처럼 한국에서 살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한국말이라고 했다.

    어쩌면 이 아이들이 엄마의 나라로 보내진 가장 큰 이유는 아빠와 엄마의 파경이나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라기 보다도 ''''한국말''''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 "장래희망은 엄마가 행복해하는 일"

    스튜어디스가 돼 대한항공에 취직하겠다는 언니 선령이와 변호사가 되겠다는 동생 혜진이.

    이 아이들의 장래희망은 모두 엄마가 행복해하는 일이란 이유에서다.

    엄마도 두 딸을 위해 살고 있지만 엄마가 한국에서 고생하는 모습을 보며 아이들도 엄마를 위해 열심히 살고 있었다.[BestNocut_R]

    두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고 있는 이모 주비 에스포라 씨는 "아이들과 7년을 함께 지내다보니 조카라기보다는 친딸처럼 생각하고 있다, 선령이와 혜진이가 좋은 남편을 만나 행복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일과 원하는 삶을 살아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국인 아빠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엄마와 떨어져 고향 땅 한국이 아닌 엄마의 나라 필리핀에서 살고 있는 선령이와 혜진이.

    한국 국적의 아이들이지만 "필리핀에서 살고 싶고 필리핀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는 두 명의 ''천사''들이 우리사회의 무관심과 무책임 속에 필리핀인으로 커가고 있었다.

    [한국언론재단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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