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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10일간의 비밀 작전'…전두환의 공작, 505 보안부대 1부



광주

    '5·18 10일간의 비밀 작전'…전두환의 공작, 505 보안부대 1부

    [광주CBS특별기획 '전두환의 공작, 505보안부대 1부']
    보안사령부를 광주로 옮겨놓은 505보안부대는 5·18의 시작과 끝
    5·18 진상규명 열쇠… 무고한 시민들 괴롭혔던 505보안부대
    작전조언권의 중심 '전두환'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최종 명령'
    구타에 전기 고문까지…떠올리기 싫은 505보안부대에서의 기억


    ■ 방송 : [전두환의 공작, 505보안부대 1부]
    ■ 기획 : 조기선 광주CBS 보도제작국장
    ■ 연출 : 조성우 PD
    ■ 취재 : 조시영 기자
    ■ 내레이션 : 차명숙(5.18 마지막 가두방송 담당자)
    ■ 방송 일자 : 12월 12일 목요일 17:05~18:00

    [다음은 '전두환의 공작, 505보안부대 1부' - '5·18 10일간의 비밀 작전' 방송 전문]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사진=스마트이미지 제공/자료사진)

     

    "5·18의 끝은 망자들이 누워 있는 망월묘지입니다. 그리고 시작점은 보안사령부를 옮겨 놓은 것 같은 505보안부대인데 그 시작점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이 거기서 시초되고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아주 나쁜 놈들이야. 세상에 나 혼자 근무하는데 새벽 3시에 와 가지고. 치 떨려요. 치 떨려요. 그 말만 하면 지금도 떨려. 아이고, 말도 못 한다."

    "자기들의 목적을 위해서는 사람 하나 죽어도 아무렇지도 않아. 그래서 제주도 땅 뿌려가지고 84년 동안."

    "시민도, 자기 친척도 물어본대요. 연금은 얼마씩 받냐고, 그렇게 물어본대요. 자기들은 안 당했으니까 그런 소리를 보통 한 것 같아도 우리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그만 좀 아프게 했으면 좋겠어요."

    "생각을 안 하려고 많이 했어요. 수족관에 물고기를 보든지 아니면 트럭에 동물들이 이렇게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 자꾸 그때 생각이 들어요. 철창 차를 타고 갔던 그때가 자꾸 떠오르고."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하여 현 지역 계엄을 전국 비상계엄으로 전환 선포하고."

    ◇내레이션> 1979년 대한민국은 박정희의 독재에 맞서 자유를 열망하는 이들의 목소리로 가득했습니다. 이는 10월 16일, 대학생 5000여 명이 거리로 뛰어나온 부마항쟁으로 이어졌으며,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피살됩니다. 그 후 국무총리 최규하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12월 6일,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하지만,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12월 12일, 전두환 당시 보안 사령관은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하는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민주화를 기대하는 대한민국의 열망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정치 상황을 이끌어 갔습니다.

    국민들의 반발에 전두환은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광주에서 계엄 해제와 휴교령 철폐를 요구하는 학생들을 상대로 공수부대원들을 투입해 무자비한 진압을 자행했습니다. 이후 27일 새벽까지 열흘 동안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은 신군부의 무자비한 폭력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정의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현대사의 비극으로 기록된 5·18에 대한 책임자는 규명되지 않고, 위로와 치유가 필요한 피해자들은 폭도, 북한군, 불순분자로 규정돼 핍박받아왔습니다. 이는 죽은 자와 산 자, 그리고 대한민국에 씻을 수 없는 상처와 한으로 남아 있습니다. 80년 5월, 리어카 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광주의 진실을 외쳤던 저는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한 달 앞둔 지금, 보안사령부의 직속 부대로 5·18을 기획하고 시행했으며 군사 정권이 쓰러질 때까지 집요하게 무고한 시민들을 괴롭혔던 505보안부대의 진실을 알리고자 합니다. 저는 80년 5월, 가두방송으로 광주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차명숙입니다.

    광주CBS 특별기획 '전두환의 공작, 505보안부대 1부' - '5·18 10일 간의 비밀 작전'

    (사진=자료사진)

     

    ◇내레이션> 길고 높고 이어진 나무들, 지하실 계단, 차가웠던 보안대의 관사, 제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505보안부대는 5·18의 비밀이 감춰진 사적지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폐허가 되어 모두의 관심 속에서 잊혀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505보안부대를 역사 속에서 소환하는 이유는 505보안부대가 80년 5월 당시 군 지휘체계의 정점에 있었던 보안사령부의 직속 부대로, 5·18 진상규명의 키를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1) 505보안부대는 어떤 부대인가?

    ◆허장환> 광주 항쟁의 끝은 망자들이 누워있는 망월묘지입니다. 그리고 광주사태의 시작점은 보안사령부를 옮겨 놓은 것 같은 505보안부대인데, 그 시작점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이 거기서 시초 되고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505보안부대 전 수사관 허장환 씨입니다.

    ◆허장환> 보안부대는 보안사령부가 서울에 소재해 있고 전국 주요 도시에 상설부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시 말해서 부대 막사도 무슨 군부대 막사 같지 않고 일반 민간지역에 일반 회사같이 시설이 돼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광주 505보안부대 본대가 있으면 여수, 목포, 순천, 강진 이렇게 해서, 여수하고 목포는 분견대고 강진, 순천은 반?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요원들이 다 나가 있었고 일개 군마다 군 담당관이라고 해서 한 명씩 다 상주를 했습니다. 그런 기구입니다. 보안 사령대가. 사령부는 별도로 서울에 있었고 보안사의 업무가 일반 정보 입수, 또 대공 정보, 그리고 정보과가 있고 그렇게 해서 평상 업무를 수행하다가 광주 항쟁이 발발이 되고 나서 광주 항쟁 동안 주요 인사, 그때는 그 지하실이 7개인가? 방을 나누고 칸막이를 나누고 하니까. 처음에 7개인데 나중에 8개인가 취조실이 그럽니다. 그게 각 방마다 유치되는 등급이 다 달랐습니다. A급, B급 해가지고. 그리고 방 분위기가 그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이 그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전에도 간첩 용의자들 잡고 하면 저승에 몇 번 갔다 오는 그런 고문을 했어요. 그런데 진술 번복을 한다든가 또는 우리가 요구하는 진술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엄청난 고문이 행해졌고 심지어 공판이 되기도 전에 재판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 사람 죄명이 뭐고 뭐 이런, 재판이 이루어지기 전에, 공판이 이루어지기 전에 보안부대에서 대상자들에 대한 죄명을 선고내용을 기작성해서 그 당시 군 공판부에 줄 정도로 이렇게 공판해라, 그러면 그 사람들은 앵무새같이 그냥 공판하는 입만 빌려서 하는 거지 사실은 선고 내용이 사전에 전부 다 짜였습니다. 예를 들어서 누구는 사형, 누구는 무기, 이렇게 해라, 그렇게 했습니다.

    ◇내레이션> 전두환의 보안사령부, 그리고 보안사령부를 그대로 광주로 옮겨놓은 것과 다름없던 505보안부대, 당시 군 지휘권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있었음에도 실질적인 5·18의 모든 시나리오와 작전이 이곳에서 계획되고 실행됐습니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 이원화된 지휘체계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전두환을 비롯한 당시의 지휘관들이 지금까지 책임을 회피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2) 이원화된 지휘체계 '작전조언권' 그리고 전두환

    ◆허장환> 전두환 씨가 "나는 명령권이 있지 않다." 명령권은 없죠. 그런데 명령권보다 더 무서운 것이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는 작전조언권입니다. 대통령권으로 정해져 있는. 그 업무를 수행하는 보안사령관의 명령 한 마디가 바로 최종 명령입니다. 그래서 최종명령 사살자는 전두환이다, 라는 말이 거기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군의 통수권에 대한 룰을 잘 모르시니까 혼동을 하고 전두환 씨는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빠져나가는 수단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확연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일일이 작전부대에 작전 지시가 다 이루어졌고, 거기에 다시 말해서 지시가 아닌 조언이라는 명령 하에 지시가 다 이루어졌습니다. 모든 작전 수립을 마친 일선 부대는, 작전부대는 이 작전에 타당성을 검토받기 위해서 보안사에 작전 전반을 통보합니다. 그런데 그 작전 계획을 면밀히 분석한 대전복 업무관에서는, 보안사 대전복 업무를 담당하는 보안처에서는 일개 말단 부대에서 이동하는 부대 병력까지도 전부 다 보고되는 내용을 종합 검토합니다. 총부리가 어디로 향할지 모르겠다, 하는 과정을 면밀히 검토합니다. 그것이 바로 작전조언권입니다. 그래서 작전조언권 없이는 작전 부대에서 기수립된 작전이라 하더라도 보안사에서 이 작전에 적합성을 검토를 해서 이 부분은 수정을 하고 이 부분은 이렇게 하세요, 하는 작전조언권이 법적으로 대통령령에 의해서 보안사에 고유 권한으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 작전조언권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이 그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입니다.

    ◆정수만> 이것을 보면 보안사에서 내건 거예요.

    5·18민주유공자유족회 정수만 전 회장입니다.

    ◆정수만> 어떤 내용들이 있냐면 보안사에서 정교 사령관에게 조언을 해요. 강력하게 다루도록 조치할 것을 요청했다고 나와요. 이게 보안사 요청이거든요. 이렇게 해달라고 보안사에서 정교사에게 지휘를 해요. 이렇게 돼요.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전부 작전 관여를 한 거예요.

    ◇내레이션> 보안사령부는 계엄령에 의해 군, 검, 경의 지휘권을 쥐고 있었으며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보안사령부의 주요 인물들을 직접 505보안부대로 내려보내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보고받았으며, 모든 작전의 최종 결정자였습니다.

    (3) 급파된 보안사령부의 주요 인물들

    ◆이재의> 505보안부대가 사실은 서울에 보안사령부와 더불어서 여기가 이제 보안사령부의 예하 부대 아닙니까.

    5·18기념재단 이재의 비상임연구원입니다.

    ◆이재의> 보안사령부의 예하 부대이면서 광주에서 진압 작전을 사실상 그쪽에서 컨트롤하는 집단이라고 봐야죠. 그리고 그때 당시에는 전두환 쪽에서, 보안사령부에서 현지에 있는 보안부대원들은 현지에 오래 살다 보니까 광주에 아는 사람들이 많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자신들이 요구했던 강경 진압을 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던 것이죠. 그러니까 우선 보고가 잘 안 올라온 거예요. 군대를 투입을 해놓고 그랬는데, 5월 17일 밤에 7공수를 내려보내잖아요. 그리고 18일에 상황들이 터지는데 그 시위 상황이나 진압하고 있는 내용이나 이런 것들이 보안사령부로 실시간으로 즉각 보고를 했던 데가 505보안부대라고 할 수 있죠. 보안부대에서 생각같이 정보가 빨리빨리 안 올라오더라는 거죠. 그런 것에 대한 불만이 있었어요. 그래서 5월 19일 날 오전 아침 회의 때 보안사령부 참모 회의 때 전두환이 그것을 불평을 토로해요. 왜 광주는 시위가 있다는데 상황이 보고가 이렇게 시원찮냐, 좀 더 자세히 보고가 되어야 할 것 아니야, 그렇게 화를 내면서 그러니까 그 자리에 있었던 참모장이라든지, 기획실장, 일처장, 이처장, 삼처장, 이런 사람들이 핵심적인 참모들이거든요. 이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한 사람을 내려보냅시다, 그래서 내려 보냈던 것이 최예섭이라는 준장, 보안사 기획실장을 이렇게 내려 보내죠. 그리고 그날 오후에 홍성률이라는 사람을 또 내려 보내는 것으로 결정해 가지고 별도로 내려오고 또 그다음에 수사를 담당할 최경조라는 사람을, 이 세 사람을 내려보내요. 그래서 서울에서 내려온 그 사람들의 역할이 더 중요한 거죠. 이 사람들이 필요하면 시키는 거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지시를 하는 것이고, 큰 틀은 이 사람들이 방향을 설정하고 진압 작전을 사실상 뒤에서 컨트롤하는 이런 역할을 했다고 보여 지는데.

    ◇내레이션> 505보안부대가 신군부의 핵심적인 기관이었다는 점은 5·18 당시의 군사 작전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 군사 작전은 바로 80년 5월 22일 국군광주병원 확보 작전입니다. 5월 21일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군이 27일 전남도청 진압 작전까지 단 한 번 시내로 진입한 작전, 이 작전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요?

    (4) 국군광주병원 확보 작전

    ◆김희송> 조금 맥락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요.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김희송 연구교수입니다.

    ◆김희송> 5월 18일부터 촉발된 광주에서 시위가 확산되고 결국엔 5월 21일 날 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 이후에 시민들도 무장을 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계엄군은 신군부는 전략적으로 계엄군을 외곽으로 배치시키고 광주를 고립시키는 작전. 그래서 이제 계엄군을 도심 외곽으로 철수시키는 이 일련의 과정들 속에서 거의 대부분들의 군인들이 이제 주둔지역이 지원동 무등산 쪽으로 빠지든가 3공수여단은 광주교도소. 그리고 나머지 병력들은 다 어디로 철수를 했냐면 상무대로 철수를 했죠. 상무대로 철수를 해서, 그때 당시는 상무대는 광주시 외곽이라고 다들 생각을 하는 거니까. 광주 시내를 비워두고 외곽을 철저하게 봉쇄하고 차단하는 차단봉쇄작전이었거든요. 차단봉쇄작전은 5월 21일부터 27일까지 지속됐죠. 단 한 번도 내부로, 시내로 진입한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공교롭게도 5월 22일 날, 5월 21일 날 철수했는데 5월 22일 날, 5시에 작전을 시작했으니까 채 24시간이 지나지 않은 거예요. 24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국군통합병원에 20사단을 투입해가지고, 20사단 투입 작전 과정은 전차까지 동원하는 대규모 작전을 전개해서 국군통합병원 확보 작전, 이름만 그쪽의 주장은, 국군통합병원 확보 작전을 전개를 했고, 실제 작전은 50분 만에 종료돼요. 50분 만에 종료돼서 20사단이 국군통합병원을 확보했고. 이 작전 과정에 국군통합병원 근처에 살고 계셨던 시민 8분이, 어찌 보면 학살을 당하신 거죠. 총을 난사해버리니까. 이 작전 과정에 여덟 명의 시민이 희생됐고 또 이 과정에서 군인도 한 명 사망하는, 그러면 9명이나 되는 사망자가 발생하는 사건. 그리고 5월 21일부터 27일 도청탈환작전이 다시 전개되기까지 단 한 차례의 시내 진입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계엄군이 유독 왜 국군광주병원은 확보하려고 했는가. 여기에 의문점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당시에 신군부는 발표를 어떻게 했냐면, 국군통합병원의 안전의 문제, 특히 환자 수송에 위협을 받고 있고 환자 치료가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원활한 환자의 수송과 총상 환자를 비롯한 모든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인도주의적 목적이라고 했거든요. 인도주의적 목적에 의해서 불가피하게 작전을 전개했다. 그게 지금 80년 5월 22일부터 지금까지 신군부의 주장이었고, 실제 그런가 보다 했죠. 저는 궁금했던 게 정말 인도주의적 작전이었을까. 일단 8명의 시민이 학살되었기 때문에 인도주의적 작전은 아닌 것 같고, 그다음에 그러면 군이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시기에 부상병 후송에 위협을 받고 있었는지, 내지는 국군통합병원의 안위가 안전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었는지. 그런데 역설적으로 생각하면 그때 당시는 5월 20일 총을 쏘고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국군통합병원에 시민들도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거든요. 전남대 병원도 있고 기독교 병원도 있지만 이쪽 상무나 도심 외곽에 있는 군인들도 물론 치료를 받지만, 시민들도 그쪽으로 후송돼서 치료를 받았던 그런 상황. 그럼 본인들도 부상을 입는다든가 불의의 사건이나 사고를 당하면 국군통합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통합병원의 안전을 위협한다? 이건 비상식적인 거죠. 또 하나는 국군, 그들 표현은 부상자 후송에, 시민들이 시내를 장악하고 있고 후송되는 과정에 안전에 위협을 가했다, 라고 하는데 당시 군인들의 부상은 대부분 헬기로 수송했거든요. 헬기로 수송했기 때문에 지상을 거쳐 오는 게 하나도 없는 거죠. 시민들이 시내를 장악하고 있다 하더라도 부상자 수송과 국군통합병원의 안전에 위협을 받을 일이 하나도 없다. 그러면 어떤 목적일까? 국군통합병원을 확보하면 자연스럽게 505보안부대, 당시 안기부 광주 분실까지 특히 505보안부대의 안전을 확보하게 되는 거죠. 가장 큰 부분들은. 그런데 이제 505보안부대 안전을 확보한단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거죠. 왜? 자연스럽게 국군통합병원을 확보하면 그때 당시 5월 22일 날 실제 국군통합병원을 확보하니까 시민들은 어디까지 밀려 버리냐면 돌고개 너머 양동시장까지 밀리죠. 돌고개 아래쪽을 장악하게 되니까 지금 이제 농성동 쪽 인근을 계엄군이 장악하고, 국군통합병원 확보하고, 자연스럽게 국군통합병원에서부터 상무대까지 완전히 확보되니까 바로 국군통합병원에서 채 1km도 안 되는 반경에 있었던 505보안부대도 확보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그러면 505보안부대는 5월 21일 날 어떤 상황이었냐, 실은 505보안부대는 5월 20일 날 도청 철수를 할 때 505보안부대에 시민들이 몰려온다는 첩보가 있어서 505보안부대도 부대를 비우고, 실은 그들한테는 정말 치욕적인 일이긴 한데, 505보안부대를 비우고 상무대로 철수를 해버리거든요. 이건 심각한 문제죠, 안전 문제. 그런데 보안부대 확보 작전을 했다고 이야기를 하면, 이건 상당히 논쟁적이기도 하고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이런 걸 본인들은 군 용어로 기만작전이라고 하더라고요. 애초에 작전의 목적을 숨기고, 가령 공격할 지점이 있는데 그 공격 지점을 엉뚱한 곳으로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 하는 방식도 있지만, 기만 작전은 애초의 작전 목적이 드러나지 않게 또 다른 작전을 전개하고 본질적 작전만 해가는, 5월 22일 작전은 국군통합병원을 확보하기 위한 군의 기만작전이었고 실제 기만작전을 해야 되는 505보안부대의 안전 문제가 심각했다는 것은 21일 군 기록 그다음에 더 결정적인 건 그 작전을 수행했던 20사단 중대장이 이제 95년 특검에 가서 증언을 할 때 그 이야기를 하거든요. 본인들이 작전 전개하고 있는데 보안사에서 장군이 내려와서 왜 작전을 빨리하지 않느냐고 재촉했다, 그래서 그걸 사단장한테 압력을 행사했고 우리는 시민들을 설득해서 작전 없이 진주하려고 했다. 실제 그런 설득작업을 했던 기록은 존재하거든요. 그런데 워낙 보안사 쪽에서 강하게 압력을 행사하니까 전격적인 작전을 수행했다. 그러면 보안사가 국군통합병원 확보 작전을 빨리해라, 그것도 이제 장군이. 그래서 보안사 장성이 사단장한테 직접 압력을 행사할 정도로 보안사에 장군이 무슨 이해관계에 있었을까, 국군통합병원하고?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다. 그러한 내용으로 보면 5월 22일 국군광주병원에 대한 작전은 실은 505보안부대를 확보하기 위한 작전이었고, 505보안부대를 확보해야 할 만큼 가치가 있었던 부대가 505보안부대다.

    (사진=스마트이미지 제공/자료사진)

     

    ◇내레이션> 당시 보안사령부, 즉 보안부대의 창설 목적은 군내 방첩 업무와 군사기밀에 대한 보안 감시였습니다. 이후 여러 번의 개편을 거쳐 간첩 검거와 부정부패자를 색출하는 기능도 담당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 보안부대는 권력자의 정치적 도구로 이용돼, 여론 조작과 민간인 사찰, 폭행, 고문 등의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전두환의 하수인인 505보안부대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5) 505보안부대에 끌려간 사람들

    ◆홍기섭> 505보안부대 지하실에서 있었죠.

    홍남순 변호사 기념사업회 홍기섭 이사입니다.

    ◆홍기섭> 그래서 이제 아버님 방이 있었고, 그 옆방에 제가 있었고 어머님은 조금 떨어진 데 계시고, 이렇게 이 사람들이 배치를 하더라고요. 결국 아버님이 광주 5.18을 총 진두지휘한 수계다. 그래서 지금 내란 음모로 그 당시에 잡혀 있던 김대중과 아버님과 두 분이서 이것을 그렇게 광주를 선도하고 내란 음모를 일으켜서 이렇게 국가를 잠복하고자 하는 그러한 음모에 의해서 광주 5·18을 선동했다. 그래서 김대중과 둘이 모의해서 했다는 것을 실토를 해라, 그 당시만 해도 저는 한 십 며칠 있다가 어머님도 혈압으로 쓰러지셔가지고 입원을 하시게 되고, 긴급후송으로 가시게 되고. 저도 거의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이렇게 그 당시의 상황은 아비규환이죠. 사실은 이게 그놈들이 보면 고의적인 것 같아요. 이것은 아버님 고문하는 아버님 방하고 나하고 지하실이기 때문에 다 들립니다, 이게. 말소리까지 다 들려요. 그러니까 일부러 나를 심문할 때는 아버님이 들으실 거고, 아버님을 심문할 때 내가 들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부자지간의 정신적인 고통을 주는 거죠. 100% 자신들의 시나리오에 맞춰놓고, 사인하라는 거죠. 24시간 조사를 하고 아버님은 그 당시 제가 나오기 전까지도 한 시간도 잠을 못 주무시게 하는 거예요. 그게 48일간을 잠을 안 재우셨다는 거죠.

    505보안부대 피해자 양기욱 씨입니다.

    ◆양기욱> 거기서 내가 아마 삼 일인가 있었을 거예요. 지하 벙커에서, 조사받느라고. 조사받으면서 구타도 많이 당했죠, 거기서 이제 군인을 데리고 오더만. 때리려 하니까 군인이, 발로 차고 워커발로 차고 주먹으로 치고 그 조사관이 약해요. 그니까 자기가 때려도 안 되니까 군인을 하나 데리고 오더라고. 군인한테 여기 좀 혼 좀 내주라고 나를, 그러니까 군인이 나를 때린 거야, 거기서. 나도 좀 들어가서 놀랐어요. 보니까 몽둥이가 막 있고 의자에 전기 고문하는 것도 있고 돌로 받쳐다가 싹 옆문으로. 겁나더라고요, 거짓말이 아니라.

    505보안부대 피해자 이삼자 씨입니다.

    ◆이삼자> 가니까 어떤 계단이 나오더라고요. 계단이 앞뒤로 차에서 내린 순간 군인들이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군인들한테 인수인계를 하더라고요, 데리고 온 분들이. 그러니까 군인들이 지하실로 끌고 가서 계단 밑으로 쭉 내려갔는데 거기서 이제 이렇게 신원조회 같은 그런 것을 먼저 묻고 어떤 방으로 가서 거기서 이제 그동안 있었던 일을 되묻는 거죠. 거기서 조금만 틀리면 거기서부터 구타가 시작이 되는 거죠. 그러면 이제 오싹하고 무섭고 그러니까 한 번 맞다가 또 쉬었다가 맞고 너무 그런 것은 생지옥이라고 할까요. 사람이 너무 공포에 질려가지고 아무 생각이 안 나는 그런 백지상태, 그런 것 같아요. 무조건 때리고 무조건 개머리판 같은 것으로 치고 각목 같은 게 준비해 놓은 게 있고. 이렇게 봐서 때리는 게 아니라 무자비하게 때려버리니까. 야구 선수들이 공을 치기 위해서 치듯이 그렇게 무자비하게 힘 있는 대로 때려버리니까 거의 쓰러져 버리죠. 한 대만 맞으면. 그렇게 무서운 덴 못 봤어요. 아직까진.

    "김용장 씨와 허장환 씨가 광주시민들 앞에 섰습니다. 직접 목격하고 상부에 보고했던 1980년 5월 상황을 현장에서 증언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시 미 육군 정보요원으로 일한 김 씨는 신군부의 5·18 기획서를 다시 한번 주장했습니다."

    ◇내레이션> 505보안부대는 이처럼 무고한 시민들을 감금하고 폭행하였으며 만행을 은폐하고 왜곡하기 위해 협박과 고문, 회유를 자행했습니다. 특히 505보안부대는 지난 5월 당시 미군 정보요원이었던 김용장 씨, 505보안부대 전 수사관 허장환 씨가 증언한 바와 같이 편의대를 운용하면서 시민들 속에 침투해 정보를 수집하고, 시민들을 선동하는 작전을 펼쳤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39년 만에 공개된 보안사 사진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6) 보안사 사진첩의 의미

    "5·18광주민주화운동 직후 군 보안사령부가 만든 사진첩 13권이 오늘 공개됐습니다. 1700여 장에 이르는 사진 속에는 당시 참상이 그대로 담겨있었습니다."

    ◆김희송> 보안사가 이제 존안하고 있던 5·18 관련 사진첩이죠.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김희송 연구교수입니다.

    ◆김희송> 계엄군의 시각에서 5·18을 기록한, 전혀 다른 관점에서 80년 5월을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의미도 있다. 또 하나는 미처 몰랐던 지금까지 없었던 사진도, 일부는 새로운 사진도 있거든요. 물론 새로운 사진이라는 게 새로운 상황을 찍은 게 아니라 보안사 5월 18일부터 27일, 그리고 27일부터 사태 수습 후에 이 과정들까지도 다 사진으로 찍었어요. 완파된 차랑, 피해 상황, 이런 사진까지 남겼기 때문에 5·18에 대한 촘촘한 신군부의 기록이 이번에 최초로 공개됐다는 의미가 있는 거죠. 지금까지 공개된 사진은 작전 종료하고 나서 어느 정도 정리된 사진을 공개했다면, 이번 사진의 몇 장은 바로 직전에 진압하고 그 참상이 그대로 기록된 그래서 생포된 시민분, 사망하신 시민분이 같이 겹쳐 있어요. 한 공간에. 그런 참혹한 사진들 5월 21일의 정황들, 또 하나는 우리가 알고 있는 김 군, 광수 찾기에 김 군 사진이 있잖아요? 거기서부터 지만원 씨나 5·18 왜곡 세력들이 이용했던 광수, 그게 그 사진으로부터 나왔다고 보는 거고. 추후에 그것은 규명해야겠지만 어찌 됐든 의미 있게 볼 수 있는 부분들은 카메라가 어디서 바라보느냐, 시선이 중요하니까, 만약에 지금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대치 국면이라면 계엄군의 입장에서 봐야 하는데 한 3분의 1에서 반 정도는 시민들 속에서 찍은 사진이에요. 시선이 계엄군을 바라보고 있는 거죠. 그런데 이 사진은 계엄군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니라 시민이 속해 있는 공간들 속에서 시민을 찍은 거예요. 그러면 이 사진은 어떻게 찍혔을까, 이게 당시 보안사 편의대를 운용했다 보니까 편의대가 찍었던가 아니면 보안사의 요원들이 시민으로 위장을 했겠죠. 그다음에 일부 사진들을 보면 시민들이 무장한 사진이라든가 결연한 모습들인데 아무런 경계, 사진을 찍을 때 긴장하고 경계하는 이런 사진들이 아니라 너무나 자연스러운 사진들, 자연스럽게 사진이 찍혔다, 라는 거는 그 옆에서 사진 찍는 사람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라는 판단이 드는. 다시 역설적으로 보면 그 사진은 누구 사진이냐면, 보안사 사진첩이거든요. 보안사의 요원들이 내지는 보안사를 위해 사진을 찍었던 사람들이 80년 당시에 시민군들 속에 그렇게 깊숙하게 들어와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진을 찍어도 아무 문제가 안 됐다, 머그샷 정도로 정확하게 신원이 확인될 수 있을 그런 사진들도 싹 찍었어요.

    ◇내레이션>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었던 505보안부대의 비밀은 505보안부대가 생산한 문건인 광주 소요 사태 상황일지 등을 통해 조금씩 세상에 알려졌지만, 대부분의 문건은 이미 조작되거나 식별 불가능한 상태로 존재하며, 집단 발표 명령자 등을 밝혀낼 수 있는 핵심적인 자료는 의도적으로 은폐됐습니다. 하지만 보안사 사진첩과 같이 80년 5월의 진실을 말해 줄 증거들이 계속해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505보안부대가 80년 5월에 생산한 기록을 끝까지 추적하고 밝혀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시대적 과제입니다.

    (7) 지문 기록 추적 중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최정기 소장입니다.

    ◆최정기> 505보안부대가 깊숙이 개입했다는 것은 다 알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개입했지? 사실 잘 몰라요. 그것은 당시 편의대라는 것을 운용했다고 이야기가 되고 있는데 편의대 본부가 심지어 충장로 근처에 있었다고 이야기를 해요. 거기에 누구누구 있었다는 것까지 아는 거죠, 사람들이. 그러니까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한 부분으로 5·18을 했을 때 이미 거기서 근무했던 사람들을 만난 조사관도 있어요. 그러면 5·18 당시에 보안사에서 어떤 일을 어떻게 했다, 라고 하는 것은 드러나 있지 않죠. 그런데 그게 중요한 이유가 뭐냐면 시민들 내에 들어와서 공작을 맡았어요. 그러니까 지금 그 사람들이 우리를 비판하고 있는 폭력, 간첩이 어쨌니, 이렇게 떠든 것들 중에 실은 자기들의 자작극이 있을 수도 있는 거죠. 그런데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거기 충장로에 있어서 모든 상황들을 파악하고 있는 거고, 서울에서 내려온 사람이 20여 명 정도 편을 데리고 와서 활동을 했다, 이렇게 말을 하거든요. 정말 그랬는지, 도청 안에는 그 사람들이 없었는지. 가령 다이너마이트 네 가지 제거하고 있는 게 그 사람들 공작의 결과거든요. 그러니까 굉장히 깊숙이 개입해 들어왔어요. 어디까지 개입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보안사에서 사진이나 동영상을 많이 찍은 것 같아요. 지금 기록관에 가면 궐기대회 하는 사진이 있습니다. 사진이 아니라 동영상이 있습니다. 그 동영상의 각도나 이런 걸 봤을 때 시민들 쪽에서 찍은 게 아니라는 거죠. 수습위 쪽에서 찍은 것도 아니고. 그러면 이걸 누가 찍었을 거냐. 그런데 내가 물어보니까 기록관에서는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보내줬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 말은 뭐냐면 누군가가 동영상을 찍었어요. 신문 기자도 아니에요. 그렇게 찍었기 때문에 그런 사진도 진상 규명에 굉장히 중요한 사진들이죠. 제가 얼마 전에 기록관에서 그 동영상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아 이런 게 그대로 지금까지 남아 있냐, 어디서 났냐고 그랬더니 그런 식으로 표현을 하던데. 저는 그래서 505보안부대를, 물론 지금 그 자료들은 여기에 안 있고 없어졌거나 서울 쪽에 가 있겠죠. 그런 것을 찾아야죠. 사실. 가장 중요한 자료일 수 있습니다.

    민주평화당 김종배 최고위원입니다.

    ◆김종배> 그래서 그때 당시에 죽은 사람들을 우리가 수습을 못 했어요, 도청 지도부가. 시내에서 그때 5월 21일 날 집단 발포를 한 것은 수습을 해가지고 대체적으로 병원 영안실에 있었는데 시 외곽에서 죽은 사람들은 우리가 수습을 못 해서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계엄군들이 그 야산에다가 가매장을 했더라고요. 그리고 좌표 같은 걸 설정해 놓고. 그리고 5월 27일 날 진압이 끝나고 나서 11공수 애들이 다시 와가지고 좌표 설정해 놓은 가매장 해놓은 것을 다 팠어, 파내 가지고 지문채취를 다 했어요. 광주경찰서 지문채취 전문가가 있었는데 추삼덕 경사하고, 또 505보안부대에 있는 그 두 사람이 지문채취 전문가였는데 그 가매장된 사람들 다 파내가지고 혹시 거기에 불순불자가 있지 않느냐 해가지고 전부 지문채취를 해가지고 신원 확인까지 다 했는데, 그 당시에 시 외곽에서 가매장된 사람을 어떻게 처리를 했냐, 우리도 몰랐어요. 그런데 이번에 그 시신들을 파다가 광주국군통합병원 보일러실에다가 임시 화장 시설을 만들어 가지고 200~300개 정도 거기서 태웠다는 거예요. 그래서 벙커 식으로 태우다 보니까 화력이 낮아가지고 뼈까지 안 녹았대요. 그래서 그 뼈를 추슬러다가 광주시 청소차에다가 실어서 광주 여러 군데 묻었어요. 그래서 몇 군데 우리가 파내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그 200~300명 정도의 시신들을 갖다가 거기서 전부 태워가지고 소각한 거죠. 그래서 흔적도 없이 없애버렸어요. 그것을 이제 우리가 김용장 씨나 허장환 씨 증언에 의해서 나타난 거란 말이에요, 지금. 그래서 우리가 앞으로 해야 될 일들이 그런 일들이에요. 행방불명자들, 그때 당시에 가매장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강제로 그때 당시에 지문을 채취했던 사람이 추상덕 경사가 죽었더라고요. 나이가 많았대요, 그때도. 그 지문채취 기록만 있으면 행불자들 다 찾을 수 있어요. 신원 확인 해가지고. 그때 자기들도 신원 확인을 했으니까. 지금 그것을 우리가 입수를 못 했단 말이에요. 그 지문채취 한 거. 그래서 이번에 진상규명위원회가 만들어지면 강제로 그것을 데려다가 조사를 해야 할 부분입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 정수만 전 회장입니다.

    ◆정수만> 위안부 문제를 일본한테 직접 위안부를 이용을 했다는 기록 자체가 없다고 기록에 나오더라고요. 쉽게 말하면 기록의 중요성이에요. 아무리 말로 이야기하는 것은 안 되는 거예요. 전두환이 광주를 온 것은 나는 사실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물증이 없잖아요. 우리가 물증이 없는데 그것을 계속 우겨나갈 수는 없거든요. 헬기에서 총 쐈다, 쐈다고 생각을 해요. 분명히 쐈다고 생각을 하지만 총소리야 나가버리면 끝인데 그것을 무엇으로 증명일 합니까. 총을 사진을 찍을 수는 없잖아요. 쏜 걸 봤냐, 라고 하면 봤다고 해도 총소리를 다 들었지 총 쏘는 걸 실탄 날아가는 걸 어떻게 볼 수 있나요? 그렇지 않나요? 이런 것들이 중요해요. 전두환이 광주를 왔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나는 온 거로 알고 있다면 왜 그것을 내가 믿느냐면, 그때 이공사령관이었던 진종채가 전두환이 광주에 내려왔다가 올라간 것 같다는 내용을 자기가 직접 보고를 받았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나는 보고를 받아서 알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면 비행장에 있으면서 정교사에 연락을 해서 뭐라고 하면은 보안사령관이 혹시 전교사를 갈 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거기 이동하는 사람들을 전부 차단을 시켜라, 이런 지시를 해요. 그래서 그 보고 소리를 다 들어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있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안 왔다라고 주장을 해버리니까 그러면 우리 상식은 그래요. 우리가 그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 구태여 듣지 않아도 항공대일지만 있으면 항공대가 누구누구 언제 실어서 언제 데리고 서울로 가고 이거 다 나오거든요. 이것만 해버리면 싸울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도 왜 안 내놓거든요.

    ◇내레이션> 505보안부대에는 80년 5월의 진실을 풀기 위한 많은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저지른 만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많은 시민들이 국가폭력에 의해 가족을 잃었고 총에 맞아 부상을 당했으며 5·18과 이후의 민주화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구금돼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협박과 회유, 인권 탄압은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내일 이 시간에는 505보안부대가 80년 5월 후 어떻게 피해자들을 관리하고 이용하는 선무공작을 펼쳤고 5·18의 진실 은폐를 위해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 방송합니다.

    지금까지 광주CBS 특별기획 '전두환의 공작, 505보안부대 1부' - '5·18 10일간의 비밀작전'을 방송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기획 조기선, 연출 조성우, 취재 조시영, 내레이션에 차명숙이었습니다. 내일 이 시간에는 '전두환의 공작, 505보안부대 2부' - '끝나지 않은 비밀작전'을 방송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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