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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이 된 가족, "아직 억울한 죽음은 해결되지 않았다"



전북

    간첩이 된 가족, "아직 억울한 죽음은 해결되지 않았다"

    일가족 풍비박산 낸 '김제 가족 간첩 조작 사건'
    조국 장관, 재판 종결과 신속한 권리구제 지시
    고문에 의한 자살과 경찰의 위장은 없다는 법원
    유가족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우리집에 머물렀다"

    1974년 7월 24일 울릉도 간첩단 사건 선거공판, 고문을 통해 허위자백을 받아내는 간첩 조작사건이 잦았다 (사진=연합뉴스)

     

    조국 법무부 장관은 지난 26일 '김제 가족 간첩단 조작 사건' 피해자의 유가족에 대한 신속한 권리구제를 지시했다. 조 장관이 취임하고 법무부에 단일사건에 대한 공개 지시를 내린 건 처음이다. 그러나 유가족의 억울함은 가시지 않고 있다. CBS노컷뉴스가 유가족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북한과 같이 남한에서도 보이지 않게 잔혹한 만행들이 있었어요. 자신들의 권력과 탐욕에 의해서 희생자를 만들어냈습니다. 법원의 결정이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아픔에 대한 위로와 그 아픔을 잊으라는 뜻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제 가족 간첩단 조작 사건'의 피해자 故 최을호씨의 아들 최봉준(56)씨의 말이다.

    2017년 6월 29일 서울중앙지법은 최을호씨와 조카 故 최낙교 故 최낙전씨의 국가보안법 위반에 대한 원심을 파기, 무죄를 확정했고, 지난 26일엔 유가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를 판결했다.

    그러나 유가족은 법원이 내린 손해배상 소송의 원고 일부 승소 판결에 대해 항소할 예정이다.

    유가족은 재판부가 낙교씨와 낙전씨의 죽음을 국가 배상에서 제외해 억울한 죽음이 해소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낙교씨는 남영동 고문실에서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40여일동안 고문을 당했고 검찰 조사를 받던 중 사망했다. 경찰은 낙교씨가 구치소 나무못에 수의를 걸고 목을 매 자살했다고 밝혔다.

    김제를 떠나 서울에서 택시운전을 하고 있는 봉준씨는 "당시 남영동에 간 누이가 말하길 '여자가 손에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은 못에 어찌 남자가 목을 매 죽을 수 있겠냐'고 했다"며 "경찰이 고문사를 자살로 위장한 것이다"고 말했다.

    고문기술자 이근안 (사진=자료사진)

     

    법원은 손해배상 소송에서 낙교씨의 죽음을 당시 경찰이 했던 주장과 같이 자살로 판결했다.

    또 법원은 낙전씨가 9년간 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출소한지 4개월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에 대해 그의 죽음이 고문과는 관계없다고 판결했다.

    봉준씨는 "낙전 어르신은 고문에 대해 생생히 기억했고 전기·물·고춧가루 고문과 쥐를 방에 넣어 잠 못 자게 하는 고문도 당했다"며 "고문의 후유증을 겪으며 매달 경찰서에 가서 반성문과 자술서를 쓰며 비참한 보안관찰 생활도 해야 했다"고 덧붙였다.

    낙전씨는 성경에 유서 두장을 남기고 세상을 등졌다. 그러나 그의 유서엔 이근안과 정부에 대한 어떠한 원망도 없었다.

    '고문기술자 이근안'을 비롯한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경찰들은 최을호씨를 남영동으로 끌고 간 뒤에도 봉준씨의 집에서 머물렀다.

    봉준씨는 "경찰이 아버지가 실종돼 수사하는 줄 알고 7명의 경찰에게 수일 동안 밥을 해주며 먹여주고 재워줬다"며 "그때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우리 집에 있었다"고 말했다.

    봉준씨는 아버지가 남영동에 끌려간 지 5년 뒤인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터지고 나서 TV에 나온 '고문기술자 이근안'을 알아봤다.

    고문이 자행됐던 남영동 대공분실 (사진=자료사진)

     

    봉준씨는 아버지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남영동에 끌려가자 집성촌이었던 마을을 떠나야만 했다. 마을 사람들이 빨갱이라고 피하고 간첩의 아들이라고 손가락질했기 때문이다.

    최을호씨의 둘째 아들 최승연(56)씨도 고등학교 조회시간에 교장에게 "우리 학교에 간첩의 아들이 있다"며 "반공을 철저히 교육해야 한다"는 치욕스러운 말을 들었다.

    고문 조작 사건으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봉준씨는 마을주민의 따가운 눈총을 피해 서울로 갔다. 봉준씨는 현재 서울에서 개인택시를 하고 있다.

    37년 만의 신원. 재판부는 국가의 과오에 대한 용서를 구했지만, 정작 용서를 해야 할 당사자들은 억울함을 안은 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아직 풀지 못한 원한이 남아있다.

    '김제 가족 간첩단 조작 사건'은 : 전두환씨의 집권시절인 1982년 8월 전북 김제시 진봉면 고사리의 한 집성촌, 농사를 짓던 故 최을호씨와 조카인 낙교·낙전씨는 간첩 활동을 했다는 누명을 쓰고 남영동에 끌려가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고문당하고 기소됐다. 이후 최을호씨는 1985년 10월 31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낙교씨는 1982년 12월 구치소에서 사망, 낙전씨는 9년을 복역하고 출소 4개월 만인 1991년 5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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