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닦아내지 못한 '사북항쟁의 눈물'



강원

    닦아내지 못한 '사북항쟁의 눈물'

    '정부 사과, 배상권고' 진실화해위 권고 이후 11년 후속 조치 전무
    사북항쟁 특위 발족, 명예회복 촉구

    1980년 4월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에서 노동 탄압에 반발해 일어났던 사북항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료 사진)

     

    "짧게는 1년 6월, 길게는 3년 징역을 살았던 28명 가운데 지금 살아있는 사람이 13명이에요. 정부의 제대로 된 사과라도 받고 눈을 감아야하지 않겠어요"

    2020년이면 1980년 4월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노동자들과 가족들이 산업역군이라는 미명아래 강요됐던 노동탄압에 맞서 싸웠던 '사북민주항쟁'이 40주년을 맞는다.

    노동력 착취와 열악한 임금에 항의해 생존권 투쟁에 나섰던 이들을 계엄 당국은 '폭력 시위꾼' '빨갱이'로 몰아 구금하고 모진 고문을 가했다. 뒤늦게 사북항쟁은 회사와 어용노조, 이를 묵인한 정부에 맞선 민주화 운동으로 재조명됐다.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 노동운동의 모태라는 의미가 부여됐지만 고통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가 사북항쟁에 대해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을 권고했지만 현재까지 후속 조치는 전무하다.

    "징역 살고 수사기관에 끌려가 고문받았던 사람들, 쟁의를 벌였던 광부와 가족 등 6천여명 대부분이 이제 나이가 80세가 넘어가고 있습니다. 살면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못 배우고 힘 없다는 이유로 정부와 광산 기업의 노예처럼 살고 희생을 강요당했던 광부들과 그 가족들의 명예를 이제라도 되찾고 싶습니다"

    마흔 나이에 항쟁을 이끌고 이제는 팔순이 된 이원갑 사북항쟁 동지회 명예회장의 간절한 바람이다.

    39년 전 4월 '인간답게 살아보자'며 나흘간 동원탄좌 사북영업소 철로를 점거했던 청장년들은 이제 모두 노년이 됐다. 하지만 사북항쟁 관련자들은 지친 몸을 일으켜 다시 어깨를 맞대기 시작했다.

    '사북민주항쟁'에 대한 명예회복과 정부의 사과를 촉구하는 사북항쟁동지회 사북민주 항쟁 특별위원회(이하 사북항쟁 특위)가 21일 발족했다.

    사북항쟁 특위에는 사북항쟁동지회와 고한 사북 남면 신동 발전 공추위는 물론 주요 정치권 인사들과 종교계, 법조계, 경제계 대표들이 대거 참여했다.

    진실화해위의 결정대로 사북민주항쟁 명예회복과 정부의 사과 및 배상, 관련자 직권 재심 등 요구사항도 강원도와 강원지방경찰청, 국방부, 정부부처 등에 전달할 예정이다.

    가칭 '사북항쟁기념 사업회'를 조직해 운영할 수 있는 국가의 제반 조치도 요구할 계획이다.

    오는 27일부터는 정선 사북에서 도보로 이동해 다음 달 2일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과 행안부 장관, 대통령 비서관 면담도 요구하기로 했다. 11월에는 특위를 사북항쟁 4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로 전환해 사북항쟁의 역사적 의의와 성격을 명확히 하는 학술대회도 진행한다.

    사북민주항쟁 경위 및 경과
    1. (주)동원탄좌 사북광업소의 광부들은 1970년대 정부의 노동3권 탄압 등으로 인해 기본권이 제한된 노동환경에 처해 있었고, (주)동원탄좌 경영주의 부당한 임금 책정과 노조 지배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어 있었다. 또한 지역 경찰, 정보기관 등 공권력은 회사 측과 유착하여 노조활동에 부당하게 개입하고 있었다. (주)동원탄좌 노동조합은 1979. 4.부터 6대 노조지부장선거 부정의혹을 둘러싸고 1년여 동안 노조 운영이 파행사태를 겪고 있었다.

    2. 1980. 4. 18. 오후 이○○ 노조지부장과 사북지서장 어○○ 경위는 사북지서 앞마당에서 노조원들에게 집회를 열어 토론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1980. 4. 21. 14:00경 노조원들은 예정된 집회가 불허된 사실을 알고 그에 항의하였고, 이 광경을 찍고 있던 정선경찰서 소속 사복 경찰관이 도주하면서 경찰차량으로 광부들을 치고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뒤 교대 근무를 위해 출․퇴근하는 광부들이 합세하면서 군중들의 숫자는 급격히 늘어났고, 교통사고로 인해 흥분한 광부들은 사북지서 등 주요 건물들을 습격하고 기물을 파괴하였다.

    3. 1980. 4. 22. 오전 일단의 광부와 부녀자들은 노조지부장 이○○의 부인을 사북광업소 정문 게시판 기둥에 묶어놓고 집단폭행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강원도경 경찰의 진압작전에서는 광부들과 주민들이 던진 돌에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부상을 입는 유혈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작전이 실패하면서 강원도지사와 (주)동원탄좌, 광부 대표들과의 3자 협상이 시작되었으며 동시에 1군 계엄사령부는 ○○특전여단 2개 대대병력을 현지에 투입키로 결정했다.

    4. 1980. 4. 24. 08:00경 노․사․정 대표가 11개항의 합의사항을 발표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10여 일 후 군․검․경으로 구성된 계엄사령부 ‘사북 사건 합동수사단’은 200여 명의 광부와 주민들을 연행하여 물고문, 고무호스 구타, 각목 구타 등의 가혹행위를 하였고, 임산부를 포함한 40~50명의 부녀자들을 상대로 성적 가혹행위를 저질렀다. 1군 검찰은 이 가운데 폭력행위를 주도하고, 경찰에 투석하고, 노조지부장 부인 린치 사건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31명을 기소하였고, 1군계엄보통군법회의는 이원갑, 신경, 최○○, 신○○, ○○○ 등 관련자들에게 징역 5년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하였다. 사북 사건 이후 출소한 광부와 그 가족에 대한 취업 제한과 감시는 계속되었으며 일부 출소자들은 생계의 어려움을 겪고 사북을 떠나게 되었다.

    5. 조사결과에 따라, 국가는 부당한 공권력행사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관련자들의 신체적․정신적 피해와 명예를 회복시키며, 사북 사건의 수사과정에서 자행된 위법한 가혹행위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고, 화해를 이루는 적절한 조치가 필요하다.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진실규명결정 보고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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