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시트'의 이상근 감독을 지난달 2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 영화 '엑시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상근 감독의 첫 장편 상업영화 '엑시트'가 여름 극장가의 복병으로 떠올랐다. 관계자들 사이에서 '영화가 잘 나왔다'라는 말은 알음알음 돌았다지만, 재난 탈출 액션을 코믹하게 그린다는 설정이나 신인 감독 작품이라는 점에서 약체로 평가받았던 게 사실이다.
그런 시선을 '기우'로 만든 건 영화의 힘이었다. '엑시트'는 지난달 31일 개봉한 후 지난 6일까지 7일 내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관객을 모았고, 8일 현재 누적 관객수 405만 명을 넘겼다.
'엑시트'는 이상근 감독이 2012년부터 구상한 아이템을 다듬고 고친 결과물이다. 원래는 결혼 피로연장을 배경으로 둔, 지금보다 더 작은 규모의 영화였다. '엑시트'라는 지금의 제목도 바로 나온 게 아니다.
개봉을 약 일주일 앞둔 지난달 2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엑시트' 이상근 감독을 만났다. '엑시트'의 출발과 차츰 발전해 온 과정은 듣는 것만으로 흥미로웠다.
다음은 일문일답.
▶ 언론 시사회와 대규모 쇼케이스를 차례로 진행했다. 소감이 궁금하다.후반 작업할 때 후시 녹음할 때 언뜻 보긴 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건 (언론 시사회가) 처음이었다. 같이 고생해서 만들었는데 마음에 들어 하실까 신경도 쓰이고. 배급, 언론 쪽 분들이 어떻게 보실까 하는 떨림이 있었다. 평가받는 자리니까 부담도 되고. 굉장히 많이 떨리더라.
저는 언론·배급 시사회가 처음이지 않나. (분위기가) 좋은 건지 잣대가 없다. 관계자분이 말하길, 질문을 그렇게 많이 하시는 건 분위기 좋은 거라고 하더라. (웃음) 좋게 봐주시는 것 같은 공기 같은 게 조금 있어서, '이런 분위기 계속 이어나가면 좋겠다' 싶더라.
▶ 쇼케이스는 관객을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이기도 했는데, 기억에 남는 반응이 있나.한 분 한 분 붙잡고 묻기는 그런데… (웃음) 되게 호응이 좋아서 깜짝 놀라는 부분도 있었다. (팬 쇼케이스인 만큼) 아무래도 호감을 갖고 오신 분들도 많지 않나. 팬분도 많으시고. 그래도 굉장히 빵 터지셔서 되게 좋게 봐주시니까 되게 고마웠다. '여기가 웃을 만한 부분인데…' 그때 딱딱 들어맞으면 혼자 씩 웃고 그랬다. (웃음)
▶ '엑시트'가 관객들과 만나기까지 7년이 걸렸다던데. 언제부터 구상하기 시작했는지.아이템을 처음 상상해서 끼적대기 시작한 것부터 따지면 2012년부터니까, 7년 정도 됐다. 일단 혼자 기획하고 개발할 당시에는 제가 할 수 있는 깜냥이라든지 자본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오니까 돌파구이자 아이디어로서 공간의 한계를 둔 게 있다. 유독가스 재난을 한 것도, 미술을 많이 못 할 것 같으니까 많이 가리자는 마음이었다. 그래야 예산을 줄일 수 있으니까. (웃음)
(제작사) 외유내강을 만나면서 대중적인 영화로 만들어 보자는 제안을 들었다. (제 초안은) 좀 마이너했던 느낌도 있었는데 좀 더 대중적인 느낌으로 가자고 해서 규모가 커지고 캐릭터도 조금 더 많아졌다. 한 젊은 청년의 이야기보다 가족 이야기를 하게 되면 전 세대를 아우를 수 있으니까 가족 얘기가 됐다. (장소도) 결혼 피로연장이었다. 가족 이야기가 들어가며 설정이 바뀌게 된 게 가장 큰 변화다.
지난달 31일 개봉한 영화 '엑시트' (사진=외유내강 제공)
▶ 영화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제목이다. '엑시트'는 처음부터 '엑시트'였나.원래는 '결혼 피로연'이었다. 'Foggy'라는 이름도 있었다. 이중적인 의미였다. 안개가 둘러싸인 느낌, 먹먹한 느낌을 이미지화시키는 제목이었다. 한글로는 '포기'란 뜻이 있었고. 유독가스 재난이 나오니까 거기에 맞는 거로 생각했는데, 굉장히 마이너한 제목이라고 하더라. 영화를 포기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웃음) 댓글에 '영화 포기했냐?' 이런 게 올라올 거라고 하더라.
저는 아카데믹한 생각으로 어때요, 했는데 '아, 이게 아니구나. 덜 배웠구나' 깨달았다. 외유내강의 전통을 보면 잘된 영화는 '베를린'(2013)', '베테랑'(2015) 같이 '베'자가 들어간 거였다. 근데 '베'로 할 게 뭐가 없더라. '엑시트'는 비상구란 느낌이고 초등학생도 알 수 있는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비상구', '탈출' 같은 한글 제목도 좋지만 '엑시트'라고 하면 어감 자체가 대단한 액션 영화 같은 느낌도 있어서 하게 됐다.
▶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해 '유독가스'를 재난의 배경으로 삼았는데, 전문가 조언을 받은 게 있는지.주변에 과학 쪽 출판사 하는 분이 계신다. 그쪽 인맥을 동원해 전문가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좀 했는데, '실제로는 현실에 없는 가스니까 영화적 상상력으로 나가도 충분히 이해할 거다'라고 하시더라. 화학식이라든지 어떤 반응을 (관객에게) 설명하는 게 무리라는 말씀도 해 주셨고. (극중 가스의) 경과 시간이 말이 안 되니까 영화적 상상력으로 가라고 하더라. 실제 사건이나 고증이 필요한 게 아니니까.
어떤 가스인지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저희가 포커싱을 두는 건 두 사람의 앙상블이니까. (유독가스) 고증에 대한 압박도 있긴 했다. '무책임한 거 아냐?' 하실 수도 있는데, '영화니까' 설정만 해 놓으면 (관객들이) 충분히 따라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돌직구로 간 거다. (영화 속) 유독가스는 제가 창조를 한 거다.
(가스가) 무게에 따라 (아래에) 깔리고 올라가고 퍼지는 시간에 대해 기본 조사는 했다. (그게) 틀어지지 않는 선에서 했다. 제가 문과 출신이다 보니까… 이과 계열이시면 (영화 보고) '뭐야?' 하실 수 있지만, 귀엽게 봐주셨으면 좋겠다.
▶ 재난이 벌어지는 곳은 신도시다. 생활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잘 갖췄으나, 왠지 중심부에서는 좀 떨어져 있는 느낌이었다.국제미래신도시라는 게 제가 지은 정확한 명칭이다. 가상 도시로 설정한 건 서울 대전 대구 부산 광주 이런 실제 지역으로 하면 민폐가 될 수 있고 (관객들의) 호불호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한국 어딘가이지만, 간척지도 있는 새로 개발되는 도시라고 생각했다. 신시가지라는 고층 빌딩이 있는 업무지구와 시민들이 사는 구시가지. 주인공들이 달리는 부분은 구시가지의 낮은 빌딩이 주로 나온다.
높은 층일수록 구조되기 용이하다. 높은 층과 낮은 층의 위험도가 다르다 보니 (이걸 활용해) 재난 위험도를 차별화할 수 있지 않을까 했다. 나오는 건물을 보면 고깃집, 헬스장, 학원 등 우리가 너무 자주 스쳐 지나가는 곳들이다. 공감대를 두려고 노력했다. 국제미래신도시지만 우리가 많이 보던 건물이 나오는 건데, 거창한 이름 아래 현실적인 공간이 들어가면 좋을 것 같았다.
'엑시트'는 개발 단계에서 대단위 가족극으로 바뀌었다. 배경도 결혼 피로연장에서 칠순 잔치로 달라졌다. (사진=외유내강 제공)
▶ '엑시트'는 다른 재난 영화와는 다르게 재난이나, 재난이 일어난 원인, 재난으로 인한 피해를 보여주는 데 집중하지 않는다. 의도적인 연출인가.네. 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설정에 딱 맞게 최소한의 정보만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재난이 이 영화의 주인공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른바 설정이 중요했던 거지, 재난에 포커싱을 많이 안 두려고 했던 게 사실이다. 재난 영화에서 보이는 대규모 피해라든지, 이걸 국가적으로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혹은 재난을 맞는 인간 군상의 모습… 재난 영화에서 많이 보이는 장르적 특성인데, 이런 건 너무 많이 보지 않았나. 저희는 어떤 상황에서 그것을 돌파하는 청춘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장르적 특성에서 도움받는 건 받되 뜻밖의 재미를 주면 신선한 콘셉트가 될 것 같았다. 장르적 특성을 타개하고 새로운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했다.
▶ 특히 한국인들이라면 더 잘 이해할 만한 요소를 적재적소에 넣은 것으로 보인다.한국인의 정서랄까, 한국인들만 느끼는 동질감이 있지 않나. 오지라퍼의 등장이나, 한국적인 애정에 의해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블랙코미디… 비단 저만 그렇게 살아왔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충분히 공감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국적 정서가 많이 들어가면 후반에 재미를 많이 드릴 수 있지 않을까 했다.
재난과 코미디-유머는 반대에 있는 건데 일부러 섞으려고 하기보다는, 상황 안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페이소스를 담으려고 했다. 공감대가 제일 중요했던 것 같다. 말로서 웃길 수도 있고 몸으로 웃길 수도 있지만 제일 중요한 건 공감이었다. '나도 저랬는데' 하는 걸 보여주기 위해 가족도 많이 등장시켰다.
▶ 드론이 나오는 장면에서도 '한국적 정서'를 느낄 수 있었다.드론은 후반에 추가한 설정이다. 외유내강하고 개발하는 과정에서 드론 붐이 일었다. 이건 굉장히 좋은 장치다, 응원하는 시민들 모습을 대변할 수 있고, 드론에 인간적인 캐릭터를 넣고 싶어서 썼다. (웃음) 인터넷과 IT 강국 느낌!
▶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재난과 코미디는 반대말에 가까워 보이는데, '엑시트'는 유머와 짠내가 중요한 두 축을 맡는다. 어떻게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나.
조절하는 게 되게 중요했다. 단순히 상황이 끝났다고 해서 웃음을 주면 거부감이 있을 수도 있다고 봤다. 기대하지 않았던 감정으로 훅 치고 들어오는 재미가 잘못하면 모든 걸 붕괴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신경 많이 썼다. 의주(임윤아 분)가 이타심을 보여주는 장면을 예로 들면, 보통 재난 영화는 타인을 위해 희생한 영웅적인 모습으로 보여줄 거다. (저희는) 멀리 떨어져서 보면서 인간적이고 허술한 지점을 노출해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이라는 데에 다가갈 수 있게 했다.
가족들 모습은 영화 시작부터 설정하고 가는 캐릭터라서 크게 무리하지 않았다. 너무 복잡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많이 보여주기보다는, 으쌰으쌰하는 단합된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자는 마음이었다. 가족이 단합하고 뭔가를 같이 해결하는 따뜻한 분위기도 한국적인 모습일 거라고 생각해서.
'엑시트'의 이상근 감독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 유독가스가 계속 올라오기 때문에 주인공들은 더 높은 곳으로 가야만 살 수 있다. 이건 어떤 걸 비유하나.다양한 해석이 나오길 바랐다. 기본적으로 꿈을 향해 정진한다, 꿈을 이루려고 한다는 표현에는 수직적으로 올라간다는 뜻이 있다. 잘 안 될 때는 낙마, 떨어진다 이런 이미지가 강하고. '이동'에 대한 것이 메타포적으로 활용될 수 있지 않을까 했다.
우리 영화가 대단히 어려운 해석을 요구하거나 대단한 메시지가 강하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수직-상승-수평-이동 이런 부분에서 제가 기본적으로 의도한 메타포는 있다. 그게 어려운 상징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해해주시는 관객들이 계셔서 감사하다. 숨겨진 디테일에 깔아둔 상징을 잘 찾아서 재미를 잘 느끼셨으면 좋겠다. <계속>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