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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 한국 군사독재 증언 "학살 막기까지 주어진 3시간"



책/학술

    이방인의 한국 군사독재 증언 "학살 막기까지 주어진 3시간"

    [6월민주항쟁 29주년 세미나 ③] 한국의 민주화에 협력한 빅터 슈 교수

    1987년 6월,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반독재·민주화를 열망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박정희·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진 26년 군사독재의 악순환을 끊고,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6월민주항쟁이죠. 10일로 6월민주항쟁이 29주년을 맞았습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지난 8일과 9일 '2016 민주주의 국제연대 세미나'를 열어 이를 기념했죠. 6월민주항쟁으로 얻어낸 우리네 민주주의의 성과와 과제는 무엇일까요? 그 실마리가 될 세미나의 주요 발표 내용을 전합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지배 아니면 굴복…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훼손되는가
    ② 우리나라 화폐에는 왜 근대의 지도자가 없을까
    ③ 이방인의 한국 군사독재 증언 "학살 막기까지 주어진 3시간"


    1987년 6월 9일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이한열 열사가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피를 흘리며 다른 학생의 품에 안겨 있다. 이 사건은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사진=이한열기념사업회·당시 로이터통신 정태원 기자 촬영)

     

    "1980년 5월 17일 토요일 오후였다. 전화벨이 울렸을 때 나는 제네바에 있는 아파트에서 생후 11개월 된 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전화는 한국에 있던 독일 선교사 폴 슈나이스가 일본에서 걸어온 것이었다. 그는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긴급히 알리기 위해 막 도쿄로 왔다고 밝혔다."

    한국 사회의 민주화에 협력해 온 빅터 슈(Victor W. C. Hsu) 교수(대만장로교회 부총무)는 '한국 민주화에서 세계교회연합 운동은 어떤 역할을 했는가'라는 공개토론 발표를 통해 이방인으로서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맺어 온 인연을 소개했다.

    "그(독일 선교사 폴 슈나이스)는 무장봉기를 가라앉히기 위한 미 낙하산 부대원들의 개입이 임박했다는 신뢰성 있는 정보를 갖고 있었다. 그는 '한국의 교회와 민주화 운동가들은 세계교회협의회(WCC)가 향후 발생할 대량학살을 방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줄 것을 원한다'고 밝혔다. 그의 말에 따르면 대량학살을 중단시키기까지 주어진 시간은 고작 세 시간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어려운 책무를 맡은 적이 없어 완전히 겁을 먹었으나, 전미그리스도의교회협의회(NCCCUSA) 클레어 랜달 회장과 앨리스 위머 국제업무 담당 회장 비서관에게 연락해 이 긴박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들은 백악관으로 전화해 지미 카터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알리겠다고 약속했다."

    빅터 슈 교수는 "한국의 민주화와 처음 연을 맺게 된 것은 1975년에서 이듬해까지 뉴욕시의 당시 연합장로교회(UPC) 신학교 인턴으로 있을 때의 일이었다"며 "나는 인터처치센터에서 국제연합(UN)의 주요 이슈를 UPC에 알리고 이를 해석하는 일을 담당했다"고 전했다.

    "UPC는 대표로서 나를 작성위원회에 참석케 했다. 이 위원회의 국제분야에서 미국 교파들의 활동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이들의 의제 중 최우선순위에 한국 여성 봉제공의 근로 조건이 있었다. 당시 국제노동기구(ILO)는 한국 근로자들이 매우 적은 봉급을 받으면서 최악의 조건에서 18시간을 일하는 가장 심한 착취를 당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WCC 도시농촌선교(URM)의 지지에 힘입어 시위를 했고, 다수가 투옥되고 목숨을 잃었다. 이로 인해 WCC는 이 여성 근로자들과의 연대를 표명하기 위해 서울을 방문할 성직자 사절단을 조직했다."

    그는 "이 근로자들을 위한 국제 연대활동은 한국 정부(박정희 정권)에게는 매우 민감한 정치적 이슈가 됐다"며 "한국 정부는 자국의 경제모델을 '기적'으로 홍보해 왔으며 경제적 기적의 기반으로서 인권과 근로자의 권리를 크게 침해했다는 사실이 국제적으로 조명받지 못하도록 했다"고 꼬집었다.

    "나는 1976년부터 1977년까지 UN교회센터에 있는 WCC UN 사무소에서 국제문제에 대한 WCC 국제문제교회위원회(CCIA)의 컨설턴트로 일하면서 한국의 민주화 투쟁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옆 사무실에 있던 코리아 스코프(Korea Scope)의 박상증 편집장 겸 선교사를 처음 만났다. 코리아 스코프는 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ICNDK)가 출판했다. 그를 만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그와 그의 작고한 부인 선애 씨는 고국의 민주화 투쟁에 대해 열정적으로 알리고 글을 썼다."

    빅터 슈 교수는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던 WCC 시절 자신의 역할에 대해 두 가지 중요한 일화를 전했다. 먼저 '한국인권보고서'(Human Rights in the Republic of Korea)의 출판이다.

    "이 문서는 한국에서 작성돼 CCIA 배경 해설 자료로서 출판됐다. WCC 홍보부에 따르면 이 문서는 전세계 대부분 매체의 조명을 받았다. 이 출판물의 저자들을 추적하려는 한국의 적극적인 노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어디에나 존재하며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한국의 중앙정보부는 저자일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을 조사했으며, 한국 사절단이 나의 제네바 사무실을 수 차례 방문해 내가 넘겨줄지 모르는 정보를 캐내고자 했다. 이들의 조사는 실로 전문적이고 철저한 것이었다. 이들은 한국에서 타이프라이터와 CCIA 배경 해설 자료와 비교했으며, 또한 한국에 있는 잠재 저자들의 문법을 조사했다."

    그는 "나머지 일화는 1980년 광주대학살에 대한 WCC 중앙위원회의 토론이었다"며 말을 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WCC가 잔혹행위를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길 원했다. 그러나 중앙위원회의 한국 위원들은 여러 이유로 이에 반대했다. 중앙위원회는 열띤 토론 끝에 한국의 3개 회원 교회에게 교서를 내리고 성직자 사절단을 보내 이 교회들을 방문케 하기로 결정했다."

    ◇ "통일을 위한 노력은 한국의 민주화를 수반할 것이라고 인식했다"

    지난 9일 서울 신촌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열린 '제29주기 이한열 동판 제막식'에 참석한, 1987년 당시 이한열 열사가 쓰러지는 장면을 취재했던 전 로이터통신 정태원 사진기자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노컷뉴스)

     

    빅터 슈 교수는 "한국의 인권에 대한 이해는 1950년에서 1953년까지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은 한국전쟁에서 시작돼야 한다"고 전했다.

    "한국전쟁은 휴전협정이 체결 되면서 멈췄지만, 휴전은 평화가 아니며 냉전의 적대감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막강하고 현대적인 무기를 가진 대규모 군대들이 비무장지대를 사이에 두고 아직도 서로를 위협하고 있다. 권력을 가진 자는 매년 교전상황이 벌어지는 이와 같은 끝없는 대치를 이용해 '안보는 핵폭탄을 포함한 무력에 의존해야 한다' '정의는 이와 같은 피상적인 평화와는 무관하다'는 점을 계속해서 증명한다. 30년 전 한국의 세계교회연합 운동은 군부 독재정치를 다뤘다. 이 정부는 수많은 인권 침해 사례를 기록했으며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북한으로부터 국가 안보를 보호하기 위해 냉혹한 통치가 필요하다'는 논리로 이를 정당화했다. 이는, 방치하면 도미노처럼 퍼져나갈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세계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전략으로서 미국이 여러 국가에 적용한 국가 안보 논리의 일환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이 논리는 국가보안법의 근간이 됐다. 국가보안법은 71년 전 제정됐으며 아직도 시민들의 의사표현 및 결사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 적용되고 있다"며 "인권 침해가 공산주의와의 투쟁에 필요한 경계 조치로서 정당화됐기에, 인권의 실현을 위해 일하는 모든 이는 자동으로 공산주의자로 간주되거나 의도적으로 또는 부지불식간에 공산주의자의 행위를 하는 것으로 간주됐다"고 지적했다.

    빅터 슈 교수는 "전두환의 군사 쿠데타가 있고 1980년에 끔찍한 광주 대학살이 일어난 뒤 한국교회협의회(NCCK)와 같은 인권단체들은 한국이 계속해서 독재정치로 신음할 것임을 깨닫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이에 따라 "이들은 '인권이 먼저이고 통일이 나중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첫 단계로서 북한과의 대화를 먼저 시작했다"며 "그 뒤 한국과 북한의 민주화에 대해 논의하자는 입장을 수립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1980년대 초반 NCCK는 통일을 80년대의 우선순위로 지정했다. NCCK는 한반도의 분단이 지속되는 한 통일을 위한 노력은 한국의 민주화를 수반할 것이며, 국가보안법이 인권 운동가는 물론 통일을 지지하는 모든 사람을 탄압하고 투옥할 것임을 인식했다. NCCK는 잔혹한 군부독재정치 아래 놓인, 폭발하기 쉬운 한국의 상황에서 WCC에게 북한의 기독교 공동체와 접촉해 통일 의제를 함께 논의하게 해 줄 것을 요청했다. NCCK의 지도하에 한국의 교회들은 희망의 등불이 되겠다는 비전을 실현했다. 주요 지도자들은 세계교회연합 운동이 정의, 인간의 존엄성, 평화, 한국의 통일을 위한 한국 국민의 투쟁과의 연대를 표명해 줄 것을 촉구했다."

    그 열매 가운데 '도잔소 협의'가 포함된다. 빅터 슈 교수는 "1984년 일본 도잔소에서 '동북아의 평화와 정의'에 대한 세계교회연합 협의가 이뤄졌다"며 "도잔소 협의는 물리적·영적 분단과 장벽에도 불구하고 복잡한 장벽의 그물을 뚫고 북한과 한국의 기독교인 사이 의사소통의 물꼬를 텄다"고 평가했다.

    이어 "이 역사적인 협의에서는 교회들이 다음과 관련된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제안이 있었다"며 △이산가족을 위한 인도주의적 배려 △통일 논의에 공개적으로 참여 △주적의 이미지 극복 △ 평화와 정의를 위한 투쟁에 여성과 청소년의 참여 확대 △무력으로 평화를 이루는 것 저지 등을 들었다.

    빅터 슈 교수는 "도잔소 프로세스로 WCC는 한반도에서 아직도 펼쳐지고 있는 드라마의 구심점이자 최전선에 서게 됐다"며 "WCC는 기꺼이 지지를 보내줄 관련 주체들로 구성된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다. 리더십·자원·전문지식을 새로이 집중시키고 전 세계의 세계교회연합 네트워크를 재가동해 한국의 정의와 평화라는 의제를 위해 다시 뛰어야 할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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