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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정부 "성실한 공무원, 가습기 책임 없다" 법정서 발뺌



법조

    [단독]정부 "성실한 공무원, 가습기 책임 없다" 법정서 발뺌

    법조계 "마땅히 있어야 할 법령 만들지 않은 '부작위' 책임"

    (자료사진/황진환 기자)

     

    정부가 부실 심사와 늑장대응으로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키웠다는 정황이 드러났음에도 법정에서 여전히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논란이 일고 있다.

    특히 정부는 "평균적인 공무원에게 모든 물질의 위해성 확인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취지의 주장을 펼친 것으로 확인됐다. 국민의 생명과 신체를 마땅히 보호해야 할 국가가 사실상 책임을 방기한 것으로 해석되는 대목이어서 후폭풍이 예상된다.

    19일 CBS노컷뉴스 확인 결과 정부는 지난 3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의 항소심을 맡은 서울고법 재판부에 이러한 내용의 준비서면을 제출했다.

    지난해 1월 1심은 "국가의 과실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그로부터 1년 후 검찰이 본격적인 수사에 나서면서 업체 뿐 아니라 정부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해졌지만, 정부는 여전히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정부는 준비서면에서 "법령상 규정이 존재하지 않은 상황에서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모든 물건에 포함돼 있는 개개 물질의 위해성을 일일이 확인하고 검사하는 등의 처리 방법을 성실한 평균적 공무원에게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경우에까지 국가배상법상 공무원의 과실을 인정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보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지난 2011년 가습기 살균제 사태가 불거진 이후부터 현재까지 정부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내세우는 논리는 '규제할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세퓨 살균제 주성분인 PGH(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의 경우 2003년 환경부에서 경구독성만을 평가한 채 유해성 심사를 통과시켰고, 이 성분이 포함된 가습기 살균제가 출시된 것은 2009년이었다.

    미국에서는 이미 신고된 화학물질이라도 용도가 변경되면 다시 환경청의 심사를 받도록 하고 있지만, 당시 국내에는 이와 같은 규정이 없었다. 가습기 살균제로 용도 변경이 이뤄졌어도 정부로선 재심사에 나설 법적 근거가 없었다는 주장이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준비서면을 통해 "PGH 검사 신청인에게 관계자료의 제출을 추가로 명하지 않았거나, 흡입 독성 실험을 추가로 실시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정부 공무원이 관계 법령을 위반하여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항변했다.

    질병관리본부가 2011년 4월 서울아산병원으로부터 역학조사 의뢰를 받기 전인 2006년과 2008년 질본 소속 연구원이 급성 폐질환 발생에 관한 논문의 공동저자로 참여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지만, 정부는 사전에 알지 못했다는 주장만 반복하고 있다.

    정부는 "질본이 역학조사와 동물실험 등을 통해 가습기 살균제와 폐손상 간 인과관계 여부를 확인하기 전까지 위험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며 "관련 규정상으로도 사전에 인지할 수 있는 아무런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았다"고 재판부에 주장했다.

    마땅히 의약외품으로 지정됐어야 하는 가습기 살균제가 공산품으로 둔갑해 안전 인증을 받지 않아도 되는 제품으로 버젓이 팔렸음에도 정부는 '제도 미비' 탓만 하고 있다.

    "공산품안전법상 자율안전확인이나 신고 의무를 강제할 수 있는 법령상 근거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국가에 신고하지도 않은 공산품에 포함된 모든 물질을 확인하고 그 유해성을 인지하는 것은 당시 법령과 제도상으로는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정부는 2011년 질본의 역학조사 발표 이후 신속한 조치를 취했다며 '사후약방문'식 조치를 정당화하기까지 한 것으로 준비서면을 통해 드러났다.

    정부는 "유해물질의 정의나 기준이 유동적인 것이고, 결과적으로 국가의 조치가 적정·충분하지 못한 것으로 판명됐다는 것만 가지고 함부로 위법하다고 속단해선 안 된다"는 내용의 2011년 '석면 탈크 베이비파우더' 사건의 판례를 인용했다.

    이어 "비록 원인 규명이 완벽하게 이뤄지진 않았으나 폐손상 관련성을 확인한 후 국민들의 건강 보호를 위해 살균제 사용 자제를 권고했고, 의약외품으로 지정했으며, 공산품안전법 시행규칙을 개정하는 등 대책을 마련하고 바로 후속조치를 취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마땅히 있어야 할 법령을 마련하지 않았다면 정부에 '부작위'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태현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유해화학물질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신체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를 마련하지 못한 국가는 손해배상의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제도적으로 미진한 부분이 있다면 정부가 시행령과 시행규칙 변경 등을 통해 얼마든지 제도에 반영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명백히 국가로서의 책임을 방기한 것"이라며 정부 책임론을 주장했다.

    헌법 36조는 "모든 국민은 보건에 관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 29조는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손해를 받은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정당한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현재 법원에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이 항소심을 포함해 10건 가량 계류돼 있다. 지난 16일에는 피해자 436명이 기업과 국가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냈다.
    {RELNEWS: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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