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을 구했을 때가 오스카 쉰들러의 황금기였어요. 그 이후 몰락의 길을 걸었죠."
1966년부터 쉰들러가 숨진 1974년까지 8년간 쉰들러의 이웃이었던 우르줄라 트라우트바인 씨는 유대인 1천100명을 구한 `홀로코스트의 영웅''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BestNocut_R]
쉰들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가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덴가세 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가운데 그의 비참한 말로가 전해지면서 주변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가 상영된 후 쉰들러는 휴머니즘의 전도사로 국제적인 명성을 떨쳤지만 정작 그의 말년은 가난과 은둔생활로 처참했다고 AFP통신이 15일 보도했다.
이혼과 거듭된 사업실패, 가난이 그를 세상과 등지게 했던 것.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쉰들러는 2차 세계대전 전까지만 해도 여성편력이 화려하고 술과 도박에 탐닉했던 탕아였다.
하지만 유대인 박해의 모습을 보고 자신이 사업에서 쌓아올린 전 재산을 탕진해가면서 유대인을 보호했던 수수께끼같은 인물이다.
1939년 오스트리아에서 폴란드 `크로코우''로 이주, 식기 납품공장을 경영하던 그는 임금이 싸다는 이유로 유대인을 노동자로 고용했지만 나날이 더해가는 나치의 잔혹한 행위를 목격한 뒤 유대인 보호자로 나섰다.
나치 독일 비밀경찰(게슈타포)의 의심을 받아 3차례나 체포됐지만 그 때마다 풀려났고 결국 1천 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키는 데 성공했던 것.
이 같은 행운도 잠시, 불행은 그를 곧 엄습했다.
선행의 덕을 쌓은 후 쉰들러는 동유럽을 거쳐 아르헨티나에 정착했으나 사업 실패로 빚더미에 앉게됐고 결국 사랑하는 부인 에밀리와 이혼했다.
1957년 서독으로 돌아와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1962년 이스라엘에 있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콘크리트 공장을 운영하기 시작했지만 1년 만에 경영악화로 사업을 접은 것. 이후 1974년 숨질 때까지 몇몇 친구들과 교류를 나누며 적막한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트라우트바인 씨는 "그의 아내(2001년 사망)는 교황도 미 대통령도 만나며 모든 영예를 독차지했다. 하지만 쉰들러는 그러한 영예 중 극히 일부분도 누릴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