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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당시 코미디언계의 이효리’하면 여러분은 누구를 떠올리실까요? 권귀옥이란 이름 세 글자, 많은 분들 기억하실 겁니다.
‘늘씬한 미녀 미스 권과 땅딸이 이기동’ 이 언밸런스한 콤비로 70년대 최고 인기를 끌었던 권귀옥 씨가 요즘 탤런트로, 사회운동가로, 또 도예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 모르시는 분들은 ‘어,그래?’ 하실 겁니다.
'왈가닥 루시'라는 별명으로 코미디언은 못 생기고 뚱뚱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드린 장본인 권귀옥 씨. 인기 절정이던 지난 80년 결혼을 위해 미국으로 떠났던 그녀가 1997년 영구 귀국한 이후, 다양한 활동을 통해 다시 한 번 권귀옥이라는 이름 석자를 팬들의 뇌리에 각인시키고 있는데요.
한국의 왈가닥 루시, 권귀옥 씨를 3월 21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땅딸이 이기동 선생과 콤비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BestNocut_R]▶ 요즘도 많이 바쁘시죠?
제가 지난달에 어머니를 여의었어요. 그래서 요즘 외로워서 우울증이 도졌어요. 그래서 오랜만에 미국에를 갔다가 지난주에 돌아왔습니다. 우울증이 암보다 무서워요. 암은 점진적이지만 우울증은 순식간에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병이거든요. 저는 우울증이란 사실을 알고 있는 상태라, 여러 가지 활동으로 잘 대처하고 있습니다.
▶ 권귀옥 씨 이름 앞에 도예가, 사회운동가, 코미디언, 탤런트 등 많은 수식어가 붙어있는데요?
저는 도예가라기보다 ‘흙장난쟁이’라는 말을 씁니다. 장난 수준으로 흙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거죠. 또 친구들과 함께 수양부모협회를 통해 버려진 아이 돕기도 하고. 요즘은 하도 바쁘니까 옛날말로 ‘미스 가래톳’이라고 그런 별명까지 붙었어요.
▶코미디언이시던 70년대. 늘씬한 미녀 미스 권, 땅딸이 이기동 선생과만 콤비로 기억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는 그 당시로서는 큰 키였어요. 166cm 으로 미스코리아 수준이었거든요. 상대역이 거의 없을 정도였어요. 우리시대 탤런트들은 거의 키가 작았어요. 지금은 여자 탤런트들이 키가 굉장히 크지만, 그때는 키 큰 배우가 드물었어요. 당시 이기동 씨가 작은 키에 지금 생각해도 귀여운 몸짓을 많이 하셨는데요.
이기동 씨는 키도 작은데다, 다리가 오형으로 휘어지셔서 더 작아 보이셨어요. 거기에 저같이 키 크고 날씬한 여자가 작고 뚱뚱한 남자하고 서면, 그림이 어울린다고 하셔서 콤비로 많이 활동하게 된 것 같습니다.그때, ‘부부만세’ 같은 코너에서 구봉서, 배삼룡 선생님, 이대성 씨, 이기동 이런 분들이 저를 사이에 두고 사랑의 쟁탈전을 벌이는 역할도 많이 하고 그랬습니다.
▶ 그때 인기가 폭발적이셨죠?
당시는 시청률조사가 없을 때였어요. 일요일 저녁 '웃으면 복이 와요' 같은 프로는, 시청률조사를 했었다면, 거의 100% 정도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당시는 여성 코미디언이 거의 없었어요. 코미디 연기가 굉장히 어렵거든요. 원래 비극보다 희극이 10배 더 어렵다고 해요. 비극을 마스터해야 희극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거든요. 또, 조직 사회가 굉장히 어려웠어요.
코미디언들이 선후배 서열이 엄격하거든요. 거기에서 버티지를 못해서 자기 재능을 피우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하지만 저는 배우에서 시작해서 코미디를 했기 때문에, 제가 그때 많이 분위기를 바꾸었죠. 당시에는 선배가 서 있으면, 후배는 의자가 있어도 앉지 못하던 시절이었거든요. 지금은 돌아가신 이주일 씨도 제가 MBC ' 웃으면 복이 와요' 방송하던 동안에는 그 프로에 합류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을 정도였어요.
▶ 그때 남자 분들한테 인기가 많았겠어요?
그때는 직업이 코미디언이라면 좋은 규수감은 아니었어요. 지체 높은 집안에서는 저 같은 말괄량이 같은 사람을 어려워했죠. 또 제가 일하는 재미에 빠져서 상대방이 눈에 안차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때 데이트도 한 번 못해봤어요. 정동 MBC 다니면서 덕수궁 돌담길의 연인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죠. 하지만 만약 그렇게 걸었다면, 당시 '명랑'이나 '아리랑' 혹은 '선데이 서울'같은 잡지에서 난리가 났었겠죠.(웃음)
▶ ‘왈가닥 루시’라는 별명은 어떻게 얻게 되신 거예요?
당시 70년대 암울했던 시기에 외국 코미디가 인기가 높았어요. 왈가닥 루시는 TV 외화 시리즈의 주인공이었어요. 그때 루시가 미국에서도 예쁘고 날씬한 코미디언으로 인기를 얻었을 때였거든요. 그 주인공의 왈가닥스럽고 도시적이고 말괄량이인 모습이 저와 잘 맞아서 그런 별명을 지어 주신 것 같습니다.
▶ 당시 '웃으면 복이 와요' 말고 어떤 프로그램을 하셨나요?
' 부부만세', '쇼 반세기'같은 프로그램을 했어요. 또, 'OB그랜드쇼' 같은 프로에서 제가 후라이보이 선생님 하고 MC도 봤구요. '싱글벙글쇼' 같은 라디오도 했어요. 24살 정도부터 활동을 시작해서, MBC 최우수 연기상을 5년 연속 탔어요.
◇ 탤런트에서 희극 배우가 되기까지▶ 원래 탤런트 출신이시죠?
예. MBC 탤런트 공채 2기 출신이에요. 당시 박원숙 씨, 김자옥 씨, 양정화 씨. 이렇게 공채 동기입니다. 근데, 제가 어린 시절에 좀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 같아요. 선진국을 보니까 희극 배우가 더 각광을 받더라고요. 그래서 ‘희극을 해야겠다’ 결심을 했습니다. 그것이 어려운 줄도 모르고 당돌하게 뛰어들게 된 것이에요. 그래서 후회도 참 많이 했어요. 희극을 하면서 너무 힘드니까, 언제라도 탈출할 수 있게 한쪽 다리는 밖으로 빼놓은 상태였었죠.
그리고 70년대는 암울하고 어두운 시절이어서 국민들이 잘 웃지를 않았어요. 겨드랑이를 직접 간질여야 조금 웃는 정도랄까. 그래서 희극이란 것이 저한테는 너무 어려웠어요. ‘한 번 웃기기 위해 열 번을 울어야 하는구나’ 라고 느낄 정도였었죠. 지금은 후배들이 활동도 많이 하고 대접도 받으니까 보람이 있지만 우리 때는 참 어려웠어요.
그때는 데모도 많던 시절이라 검열이 많았어요. 대본도 전부 검열 당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의사를 소재로 코미디를 하면 의사협회에서 항의가 오고, 간호사는 간호사대로 항의가 오고. 그래서 소재로 쓸 수 있었던 것이 거지, 도둑놈 이런 정도였어요. 협회가 없으니까요.(웃음) 당시 남들에게는 웃음을 주었지만, 그때 생각하면 저는 참 눈물이 많이 납니다.
▶ 코미디언으로 어떻게 뽑히게 되신 것입니까?
당시 탤런트 공채 합격 후 단체 교육이 있었어요. 그때는 쇼프로, 드라마 이런 구분이 없었어요. 그래서 연수기간동안 ‘수사반장’이나 ‘웃으면 복이 와요’ 같은 프로에 박원숙, 김자옥, 양정화, 한혜숙 이렇게 한꺼번에 몰려 들어가서 연수받으면서 단역도 받고 그랬어요. 그때 제가 조금 재치가 있어서 남들보다 두드러져 보였나 봐요.
제가 대사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배삼룡 선생님이 자꾸 내 대사를 먼저 가져가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나도 말 좀 하자' 하면서 치고 들어갔어요. 당시 신인들은 감히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NG가 나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녹화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근데 저는 당돌하게 '나도 대사 좀 하고 넘어갑시다.'하고 제 대사를 다 하니까 당돌하기도 하고. 또, 애드리브도 재치 있게 하니까 당시 대머리 김경태 선생이라고 코미디계의 대부셨죠.
그분이 유수열 선생님하고 ‘조그만 게 맹랑하다’ 하시면서 집중적으로 코미디 하자고 하셨어요. 처음에는 실연당한 슬픈 여자주인공이 하고 싶어서 도망 다녔는데, ‘너는 코미디를 해야 한다’고 하시며 저를 설득을 하셨어요. 그래서 멋모르고 뛰어들게 되었죠.
▶ 다른 동기 분들은 그때 뭐라고 하셨나요?
왜 코미디를 하냐며 말렸어요. 특히 김자옥 씨가 ‘언니 그런 것 하지 말고 계속 드라마 하자’고 했어요. 당시 김자옥 씨는 비련의 여주인공 역할을 많이 했었거든요. 근데 너무 웃긴 것이 제가 미국생활 오래하고 돌아오니까, 그 자옥이가 '공주는 외로워' 하는 거예요.(웃음) 제가 보면서, 너무 놀랐어요.
그 비련의 여주인공이 예쁜 척 하면서 노래를 하는데.(웃음) 너무 놀라서 세상이 바뀌긴 했구나.. 싶었죠. 지금은 많이 장르를 넘나들고 있어요. 지금 비극배우들이 희극을 굉장히 하고 싶어 해요. 그렇지만 코미디언이 웃기는 사람이라고 코미디까지 우습게보면 큰일 납니다.
◇ 집안에서 딴따라 날수 없다고 호적 파라고 하셨던 부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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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창시절은 어떠셨어요?
제가 32 대 안동권가 가문의 딸이에요. 증조할아버지 때 안동에서 부산으로 내려오셔서, 저는 부산에서 나고 자랐어요. 제가 처음에 코미디언 한다니까, 집안의 어른들이 집안에 사당패가 나왔다면서, 호적에서 파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린마음에 호적이 땅에 묻혀있는 줄 알았어요. 자꾸 파내라고 하니까.(웃음)그 정도로 문중에서 반대가 심했어요.
부산 동래여고를 나왔는데, 중 고등학교 시절에는 교지 제작반, 미술반, 합창반 이런 걸 했어요. 문학소녀였거든요. 지금 동래여고 교장선생님이신 그때 저의 담임선생님이 제가 딴따라가 될 줄 몰랐다고 하세요. 명랑하고 호기심이 많긴 했지만, 소풍 때 사회보고 이런 것은 없었거든요. 조용하고 그때도 소녀적인 감성이 참 풍부했었어요.
또 그때부터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아서, 버려진 아이들이 있는 부산 시립 영아원이라는 곳에 가서 주말마다 아이들 기저귀 갈아주고 그랬었죠. 당시 그곳에 버려진 아이들이 처음 오면, 이름이 없기 때문에 '엄앵란', '신성일'이런 이름들을 임의로 붙여주었어요. 당시 팔다리가 가늘고 기저귀찬 자리는 헐어있는 모습의 아이들이 눈에 아른거려 주말마다 친구들과 찾아가고 그랬었죠.
▶ 당시 주변에서 탤런트 하라는 소리 많이 들으셨죠?
그때 명동에 초미니 스커트가 유행할 때였어요. 그래서 육교 같은데 다니기가 참 어려웠어요.(웃음) 제가 다리에 좀 자신이 있어서, 짧은 스커트를 입고 명동을 다니면 '미워도 다시 한 번'의 감독이 지나가다가 영화하자고 말 걸고 그랬어요. 당시 큰오빠가 한국일보 기자였는데, 용돈을 타러 한국일보가면 미스코리아 나가라는 권유도 많이 받았죠. 그러면 저는 수영복 입고 방송 나가면 집에서 쫓겨난다고 거절하고 그랬는데, 패션쇼는 공짜로 옷을 준다고 해서 그런 곳에는 좀 나갔었어요.
탤런트는 그 당시 생각에 집안에서 용서해 줄 것 같았어요. 그래도 몰래 시험을 치긴 했죠. 20명 뽑는데 3000명 넘는 분들이 왔어요. 제가 그때 2696번이었는데, 정동 일대부터 광화문 이화여고까지 인산인해였어요. 다들 당시 유행하던 닥터 지바고 머리 스타일을 하고, 전국에서 잘난 사람들은 다 온 것 같았죠. 그래서 저는 떨어질 줄 알았어요. 근데 어떻게 제가 붙었더라고요.
▶ 연기 연습은 안하시고 붙으신 거였나요?
탤런트 합격하자마자, 집안의 아는 분을 통해서 극단 '산하'에 입단하게 되었어요. '산불' 공연할 때 뒤에서 군중도 하고 보조출연도 하고 선배들 식사도 챙겨주고 그랬죠. 그리고 '왕교수의 직업' 같은 몇 편의 연극에 참여하면서 거기서 연기 기초를 다졌어요. 그게 도움이 참 많이 되었죠.
◇ 돈도 없고 자살시도도 2번이나, 고통스러웠던 미국 생활 ▶ 결혼 후 일을 그만두시고 미국에 가셨나요?
당시 인기가 굉장했었어요. 밖에 나가면 머리카락 뽑히기 일쑤였고요. 그랬는데 회의가 많이 들었어요. 나이는 서른이 넘었는데 아이도 낳고 싶고. 제가 아이를 참 좋아했어요. 그래서 아이를 낳기 위해 결혼을 해야겠다고 결심을 했죠.(웃음)제가 딸 하나를 낳은 것이 태어나서 가장 잘 한일 하나중의 하나에요. 지금은 친구처럼 지내고 있죠. 어떤 여자든 좋은 남편 만나서 행복하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저는 운명의 장난으로 딸 하나만 얻고, 결혼에 실패를 했어요. 결혼생활을 거의 못해봤습니다.
저는 한 번도 결혼한 적이 없고, 남자하고 살아본 적이 없어요. 나 자신이 여성적인 매력도 있고 섹시하다고 생각하는데.(웃음) 남자 복이 없죠. 친구들이 세계 8대 불가사의라고 이야기를 해요. 얼마 전 조수미 씨 이야기를 들었는데, 조수미 씨가 한 번도 프러포즈를 받은 적이 없다는 거예요. 저도 똑같거든요. 제가 너무 세 보여서 그런지 무서워서 그런지 프러포즈를 해주신 분이 한사람도 없었어요.
▶ 미국에서 고생을 많이 하셨겠어요?
예. 저는 한국에서 미국처럼 생활하고 미국에서 한국처럼 생활했어요. 너무 어렵고 고독해서 자살시도도 2번이나 해봤어요. 모든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떠났기 때문에, 그들에게 실망을 주는 것이 너무 두려워서 한국에 들어올 수 없었어요. 차라리 모르는 곳에서 고생하자고 결심했죠. 혼자서 애도 낳고 키웠거든요.한국에서 돈을 부쳐줘야 집세도 내고 아이 먹을 것을 샀었어요.
근데, 집에서 한국에 들어오라고 돈을 안 보내 주셨을 때는 아이 이유식 살돈 외에 제가 먹을 계란 한 줄 살 돈도 없었죠. 아이 아프면 급하게 병원을 가려고 남겨 둔 20$ 외에는 한 푼도 없었어요. 또 일주일이 넘게 말을 한마디도 안 해서 목소리가 안 나올 정도였어요. 한국 신문을 사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광고판까지 다 읽은 적도 있었어요.
당시에는 제 자신이 온 우주를 통틀어 가장 불행한 사람인줄 알았어요. 신경정신과도 다니고 그랬었죠. 사람이 감기가 걸리면 병원에 가듯이 정신이 아프면 반드시 신경정신과를 가야해요. 거길 다닌다고 이상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신경정신과에 가서 아무에게도 이야기 할 수 없었던 것을 의사와 이야기하면서 많이 극복을 했어요.
◇ 농익은 삶의 향기를 다양한 그릇에 담아▶ 회장님으로 계시는 수양부모협회는 무슨 일을 하는 단체인가요?
오늘날의 권귀옥이 있기까지 주변 모든 사람들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동안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옷을 해주시는 분, 음식 갖다 주시는 분. 이제는 그 사랑을 돌려주는 연습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연예인들은 많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돌려주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혼자서만 잘 살면 뭐합니까. 특히 저는 혼자 아이를 키워서 미혼모나 해체 가정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요. 둘이서도 한 아이를 키우기 힘든 세상인데, 혼자서 아이를 키울 때 국가가 지원은 못해줄망정 손가락질을 하면 안 되는 것이거든요.자기 자식은 자기가 키우는 게 제일 합당합니다.
피치 못하여서 고아원에 보낼 때 어떤 경우 친권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생겨요. 그래서 일시적인 어려움에 처해있는 분의 자녀를 수양딸처럼 보통 가정에서 키우다가 그 부모가 정상적인 생활을 찾았을 때 다시 데려가는 운동이에요.
▶ ‘흙장난쟁이’ 라고 표현하셨는데, 도예는 언제부터 하셨나요?
도예한 지 한 10년 되었어요. 워낙 손이 바지런해서 철들고 나서부터 손톱을 길러본 적이 없어요. 제가 성우 송도순 씨한테 지점토도 가르치고 빵 만드는 것도 가르치고 그랬어요.(웃음) 제가 제과제빵사 자격증이 있거든요.음식은 많이 할 기회가 없었어요. 해도 먹을 사람이 없어서 음식솜씨는 없지만, 딴것은 다 잘해요. 못 하나도 예술적으로 박는다고 해요.(웃음)도공들이 굉장히 힘이 들어요. 흙 반죽 하는 과정부터 중노동이거든요.
저는 동적인 활동을 많이 하는 이 작업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어요. 어릴 때도 놀이터의 흙에 앉아서 노는 것이 재미있었잖아요. 우리가 흙에서 나서 흙으로 가기 때문인지, 참 매력 있는 작업인 것 같아요. 저는 형식과 기법을 다 무시해요. 절대 그릇은 안 만들어요. 물레도 쓰지 않아요. 전부 손장난으로 인형도 만들고 도판 작업이라고 주로 액자 작업을 해요. 명화가 있으면 명화를 흙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제가 지금 ‘고통 시리즈’, ‘청계천 시리즈’를 하고 있는데, 청계천에 맑은 물이 흐를 때 너무 기뻐서 ‘도심 속의 청계천’ 작업을 하고 있어요.절대 도예가는 아니고 장난 수준이에요. 처음에는 도예를 한다니까 그릇 몇 개 구워놓고 괜히 생색내는구나 하시다가 와보고 색다른 기법 등에 많이 놀라시는 것 같더라고요.
▶ 정, 재계 문화예술계에 인맥이 넓으시다던데요?
아니 그렇지는 않아요. 저의 이메일 주소가 '보자 클럽'이에요. 얼굴 좀 보자고.(웃음) 수시로 얼굴 보는 사람들이 전부예요. 그리고 집안에 정치하는 분들이 몇 분 계셔서 그 인맥이 전부죠.
◇ 젊은 모습을 기억하시는 분들께, ‘나이 들어 죄송합니다’▶ 50대로서 현재의 삶은 어떠신가요?
나이든 저의 모습이 조금 슬퍼요. 옛날이야기 자꾸 하면 그것이 늙은 증거라고 잘 안하려고 하는데. 예전과 지금이 너무 달라서, 예전 생각을 잘 안하려고 해요. 큰 차 타다가 작은 차 타려고 하면 신경질 나잖아요.(웃음) 마찬가지로 옛날 좋았던 차는 생각하지 말아야지. 지금 달구지 타고 다니더라도.(웃음) 제가 요즘 하고 다니는 인사가 '늙어서 죄송합니다'예요. 20대 시절의 젊고 발랄한 모습을 생각하시다가 몇 십년 만에 저를 만나면 팍 늙은 모습이 놀라실 것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먼저 선수를 치죠. 늙는다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없잖아요.
그렇다고 한 번도 주사를 맞은 적도 없고요. 늙으면 자기얼굴에 책임을 져야 하잖아요. 저는 아름다운 주름이 졌으면..하고 생각을 해요. 더불어 아름다운 밑거름이 되어야 다음 세대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피우지 않겠는가..해서 거름역할도 하고 싶어요. 하지만 늙는 것을 생각하면 화가 나긴 해요. 한번은 젊은 사람들 많이 가는 커피숍에를 갔는데, 예약을 안했다는 핑계로 못 들어오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화가 나서 돌아와서는 나이든 사람들 마시는 경로당 커피숍하나 차리자고 했죠.(웃음)
▶ 따님이 뒤를 이으신다고 들었는데요?
제가 항상 하는 농담이, ‘재료가 좋으니까, 작품이 잘나왔어’ 라고 해요. 딸이 아주 예쁩니다. 나의 자랑이에요. 뮤지컬 공부를 했는데 이번에 단국대학교 석사과정 마치고 뮤지컬 연출을 공부하겠다고 해서 지금 미국에 가있어요. 그 학비를 대려고 지금도 아끼면서 살아요. 시금치 한 단을 다듬으려 해도 최소한으로 다듬는 등 이모저모로 아끼려고 노력을 해요. 물론 쓸 때는 팍팍 쓰고요.(웃음)
물론 예전의 생활이 있었기 때문에 저도 허영과 사치하는 부분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것을 갑자기 바꾸긴 싫어요. 자존심도 상하고. 할 수 있는 한은 우아하게 살고 싶어요. 내가 날 소중하게 생각함으로써 다른 사람도 저를 소중히 여겨주고. 하지만 저는 나 자신보다 주변을 돌아보는 편이에요. 저는 우리나라가 정말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인지, 최저 출산율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참 속상하고, 애국가만 불러도 눈물이 나고 그렇습니다.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