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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9회 말 두 아웃부터라죠. 경기가 다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안타와 홈런 한 방으로 역전이란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야구! 정말 매력적인 스포츠인데요.
하일성 KBO 사무총장의 인생을 보면, 9회 말 투아웃에서의 역전이 생각납니다. 주먹질하며 말썽만 피우던 무명의 야구선수에서KBO 사무총장이 된 하일성 씨. 그는 ‘나를 키운 건 8할이 야구’라고 말하는데요.
‘맞습니다. 그렇습니다’라는 말밖에 못해서 방송국에서 쫓겨 날 뻔했던 그가 최고의 야구해설가로 인정받기까지 사연. 또 갑자기 찾아온 병마로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KBO 사무총장이 돼 새로운 야구인생을 살고 있는 이야기.
12월 27일, 어제에 이어 오늘도 하일성 KBO 사무총장을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첫 해설 때 너무 떨려 “네, 네, 네”만[BestNocut_R]▶ 그러면 강인숙 여사님과 결혼하신 때가 언제였나요?
1976년도였어요.
▶ 그 때 나이 차이는 얼마나 나셨던 건가요?
나이 차이는 그렇게 많이 나지 않았어요. 일곱 살 차이거든요. 왜냐햐면 제가 학교를 일곱 살에 들어가서 중간에 한 번도 쉬어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지금 제 제자들이 51살이 되었습니다. 정말 같이 늙어가고 있어요.
▶ 그 날 결혼식 풍경은 어땠나요?
한 마디로 코메디였죠. 제자들이 와서 자기 친구 신랑인데, 공적으로는 선생님이니까 호칭이 어떻게 우물우물 넘어가는 거예요.(웃음) 지금도 우리집에 오면 저한테 다 선생님이라고 하죠.
▶ 야구 해설의 장을 새로 열었다는 측면에서 인기가 많으셨죠?
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만, 빨간 장갑의 마술사라고 하는 김동엽 선배님, 지금은 고인이 되셨습니다만, 그 선배님이 저를 많이 예뻐해 주셨어요. 참 특이하고 성격도 강하신 분이었는데, 하루는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해주시더라고요. “야, 일성아! 우리가 여지껏 했던 해설은 어떤 상황을 쫓아가는 해설을 했다. 너는 그러지 마라. 해설에 승부를 걸어라. 그 날 경기의 승부를 감독이 승부를 걸듯이 너는 해설에 승부를 걸어라. 무슨 얘기인가 하면 네가 정확하게 예상이 되면 과감하게 해라. 이렇게 될 것이다.” 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예측해설이라는 것을 그 때부터 하기 시작한 것이죠.
▶ 그러면 그 전에 해설하시던 분들은 소위 예측 해설을 하신 분들이 없었나요?
예측해설보다는 벌어진 상황에 대해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가를 많이 설명하는 스타일이였죠. 그런데 저는 김동엽 선배님의 조언을 듣고서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쪽으로 바꿨죠.
▶ 그렇게 예측하는 것은 일종의 상당한 모험이었겠는데요?
저도 나름대로 승부를 건거죠. 왜냐하면 워낙 기라성같은 선배님들이 해설을 하고 계시니까 그분들과 경쟁해서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도 승부를 걸어야겠다는 생각에서 패턴을 바꿨죠.
▶ 그 당시 유명한 해설가로 활동하시던 선배님들은 누가 있나요?
김동엽 선배님, 이 원 선배님, 박상규 선배님, 한을용 선배님, 정두영 선배님, 김병호 선배님, 강태정 선배님 등 참 인기 많으시고 기라성 같은 분들이었죠.
▶ 이 야구 해설을 하시게 된 것도 인생에 있어서 하나의 터닝 포인트가 되지 않았나 싶네요.
그 당시에 배구 해설을 했던 오관영 선배님이 계세요. 그 때 환일고등학교 교사생활을 하시면서 배구 해설을 하셨는데요. 그 당시에 TBC라는 방송이 있었습니다. 거기의 김재길 체육부장님께서 야구가 프로화가 된다는 전제하에 대비해서 앞으로 5년 동안 해설자를 좀 키우고 싶다고 했을 때, 오관영 선배가 저를 추천하셨어요.
그런데 이런 말씀은 다 지나가서 해도 되고 김재길 선배님의 책에도 나오는 내용이니까 그대로 말하면요. 그 때 조건이 뭐였냐 하면, 이 방송에는 맞지 않지만 양해 좀 해주십시오.(웃음) 싸움 잘하고, 여자 사랑할 줄 알고, 술 잘 먹는 선수 출신 없냐고 해서 제가 발탁이 된 겁니다.
그 세 가지를 이야기 하니까 오관영 씨가 “그런 놈 하나 있어요. 제가 데려올께요.” 해서 데려온 사람이 바로 접니다. 그 때 저는 양곡고등학교에서 환일고등학교로 옮겼을 때였고요. 또 제가 일본 유학을 가려고 하던 때였어요. 그래서 일본 체육대학으로 유학을 가서 다시 공부하고 돌아와서 대학교로 가려는 꿈을 가지고 준비 중이었던 때였어요.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죠. 목표를 그렇게 설정했었어요.
▶ 그럼 첫 해설은 언제 하신건가요?
1979년 청룡기 때 제가 첫 해설을 시작했죠. 약 28년 전쯤에 시작한거죠.
▶ 결혼한 지 3년 정도 지났으니까 가정적으로도 많이 안정이 되었을 때였겠네요.
가정적으로는 안정이 되었는데, 1984년도인가 학교냐, 해설이냐 양자간에 택일을 하라는 거예요. 그 때는 학교 체육교사라는 직업은 보람도 있지만 정년이 거의 보장되어 있는 직업 아닙니까? 야구 해설이라는 것은 언제 짤릴지도 모르고 정년 보장이 안 되었는데, 제가 사표를 내고 해설 쪽을 택했죠.
그 때 저희 집사람이 큰 용기를 주었어요. 그 때 제가 서른 셋이었는데, 이 나이에 하고 싶은 것을 해야지 실패하더라도 다른 것을 할 수 있지 않느냐, 집안걱정 하지 말고 하고 싶은 것 하라고 해서 제가 사표를 냈죠. 그래서 시작이 된 거죠.
▶ 마이크 앞에 처음 앉으셨을 때 어떠셨어요?
지금 저보고 말을 잘한다고들 하시는데요. 그 당시 저와 처음 같이 하셨던 아나운서 분이 박종세 아나운서, 유수호 아나운서, 이장호 아나운서 세 분이셨어요. 제가 지금도 잊지 않고 있는 것이, 해설자가 말을 해야 해설자 아닙니까? 긴장을 해서 너무 말을 안하니까 PD가 급해서 컵에다가 술을 따라 왔더라고요. 이것 먹고 진정하고 말 좀 하라고 말이죠.(웃음) 긴장한데다가 그걸 먹으니까 취해서 말 한 마디도 안 했을 거예요.“네, 네, 네” 이것만 하고 말이죠.
또 비화를 말씀드린다면요. 그 때는 어떻게 또 했어요. 그런데 중간에 동양방송 간부진에서 회의가 열렸는데, 하일성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 해설자로서 재능이 없는 것 같으니 내리자 했는데, 그 때 김재길 선배님과 박종세 선배님이 진짜 사표를 걸고 저를 옹호했어요. 현장에 있는 담당자로서 “하일성이는 6개월만 있으면 제가 만듭니다. 6개월만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하셨어요.
그 때 저를 짜르자고 했던 분이 KBS 사장님이셨던 홍두표 사장님이 편성국장님 하실 때입니다. 원체 밑에 실무진에서 우기고 책임지겠다고 그 두 분이 저를 그렇게 옹호해주셔서 제가 살아남게 되었어요. 정말 저는 인복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살아남은 거예요. 그래서 김재길 선배님이나 박종세 선배님한테 제가 나중에 여쭤봤어요. 그런데 제게 뭔가 정도 가고 상당한 가능성이 있었다는 겁니다.
▶ 첫 해설에서 “네”, “네”만 했는데 무슨 가능성이 있었던 거죠?
그 다음에는 좀 했죠. 공부를 하기 시작했죠. 그래서 조금씩 달라졌어요. 내용은 제치고 말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거죠.(웃음) 깊이있는 해설도 아니고 기본적인 얘기, 누구나 할 수 있는 야구팬들도 할 수 있는 이야기 위주로 많이 했죠.
▶ 그러면 언제부터 조금씩 인정을 받게 된 건가요?
이를 악물고 공부를 했죠. 그 당시 일본의 야구 책을 구해다가 공부하기 시작했고요. 그 때는 주로 고교야구 중심의 라디오 방송을 할 때였는데, 저희 집사람이 제가하는 해설, 이 원 선배님이나 김동엽 선배님들이 하는 것까지 같이 녹음을 세 개를 합니다. 그러면 똑같은 상황에서 나는 이렇게 설명했는데, 우리 선배님들은 어떻게 설명 했을 까 하는 식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죠. 정말 피나게 공부를 했죠. 그랬더니 정말 달라지더라고요. 야구가 조금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더라고요.
▶ 그런데 어떻게 보면 중계하는 아나운서보다 더 많이 이야기 하시는 것 같이 기억되거든요?
그렇지는 않았을 겁니다. 또 한 가지, 물론 다른 방송국에 계신 분들도 다 잘하시지만, 제 입장에서 본다면 역시 박종세 아나운서, 유수호 아나운서, 이장호 아나운서, 정도영 아나운서, 표영준 아나운서와 같은 진짜 대가들과 했다는 것이 저한테는 정말 큰 행운이었죠.
▶ 그런 것도 영향이 있습니까?
옆에 캐스터가 나를 어떻게 이끌어 주고 유도해 가느냐에 따라서 제가 달라지는 거죠. 그것은 엄청나게 큰 도움이 되는 것이죠.
◇ 한·일 고교야구전 중계 때 한국 선수, 일본 선수를 뒤바꿔서 불렀던 실수담▶ 그럼 6개월 기간이 지나고 어떤 계기로 자리를 잡게 된 건가요?
그리고 나서 뭔가 눈 뜨려고 하는데, 1980년에 방송 통폐합이 되었죠. 그래서 KBS쪽에 여러 방송국에서 하던 해설자들이 다 모였죠. 경쟁이 되기 시작했는데 그 때도 어떻게 제가 거기서 살아남았어요. 한마디로 정말 제가 인복은 있었던 것 같아요.
▶ 방송에서 요구하는 것이 자꾸 새로운 스타일과 트렌드인데, 그런 점에서 인정을 받으신 것 같아요.
저는 굉장히 위험하게 방송을 했죠. 막 예측을 하고 하니까요. 듣는 사람은 신선할지 몰라도 방송국의 책임PD들이 들을 때는 아슬아슬했죠.
▶ 그럼 혹시 “왜 저렇게 잘난 척 해?” 하는 이야기는 안 들으셨나요?
그런 얘기는 안 들었어요. 그냥 실컷 하라고 하면서 너무 지나치게 하지 말고 조절을 하라고 했죠.
▶ 다른 스포츠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야구라는 종목은 경우의 수라는 것이 너무나 변화무쌍하고 예측 불가능한 경우가 많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생각한 해설은 컨셉을 이렇게 잡았어요. 내가 야구를 많이 알고 있다는 어떤 세미나식의 해설보다는 다양한 정보를 시청자나 청취자들에게 줌으로써 그 분들이 선택할 수 있는 그런 컨셉을 가지고 시작했죠.
▶ 그러면 참담한 실패를 했던 적도 있나요?
많죠. 제가 가장 실패했던 적은 한국과 일본이 게임을 하는데 선수 이름을 바꿔 부른 거죠. 한국 선수를 일본 선수라고 하고, 일본 선수를 한국 선수라고 얘기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눈에 뭔가 씌인다고 하잖아요. 저하고 정도영 씨만 해도 베테랑이었는데, 한국 선수가 타석에 들어오면 일본 선수라고 소개를 하고, 일본 선수가 들어오면 한국 선수라고 소개를 하고 그렇게 TV중계를 우리가 한 십 몇 분을 했다고 합니다. 그 때가 낮 1시 경기인데 모니터가 해를 받아서 보이질 않았어요. 그리고 중계석이 좀 멀었어요.
그리고 고등학교 학생들 게임이라는 것이 유니폼 색깔이 비슷비슷하거든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건 있을 수 없는 방송이 시작됐어요.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지금은 KBS내에서 국장정도 된 분인데, 그 당시에는 그 양반이 졸병때였어요. 주조에서 진행을 하는데, 슬슬 시청자들한테서 전화가 오는 거예요. 뭐 잘못된 것 아니냐고 말이죠.
‘KOREA’라고 쓰고 나오면 일본 선수라고 하고, ‘JAPAN'이라고 쓰고 나오면 한국 선수라고 하니까 말이죠. 그러면 이 친구가 우리한테 빨리 연락을 해주었어야 되는데, 친선 경기라 유니폼을 바꿔 입고 하는 것이니까, 그런 것 신경쓰지 말고 게임이나 조용히 잘 보라고 했대요. 그러니까 더 오래 간 거죠. 그래서 제가 지금도 조계현 코치한테 만나면 “계현아, 너 때문에 내가 해설자를 이때까지 했다, 고맙다.”라고 해요.
왜냐하면 그 때 우리나라가 지고 있었어요. 3:1로 지고 있었는데 8회말에 1, 3 만루에서 조계현 선수가 3루타를 때려 역전이 되어서 우리나라가 5:3으로 경기를 이겼어요. 너무 극적으로 이기고 그 때는 고교야구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때니까, 앞에 실수한 것은 다 잊어먹은 거예요. 반대로 역전패 당했으면 그 때 잘렸을 거예요.(웃음)
▶ 그 뒤로 늘 성공만 하셨던 것은 아니죠?
저는 지금도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성공한 사람만이 우리에게 스승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실패한 사람도 우리에게 스승이 될 수도 있고, 오히려 실패를 통해서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젊은 친구들한테 얘기할 때 도전하라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도전을 했을 때 성공이냐 실패냐 하는 결과는 생각지 말라고 해요. 도전은 도전 그 자체에 큰 의미가 있다, 실패를 했을 때는 내가 무엇 때문에 실패했는지 알게 되면 그것은 성공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는 것이고, 성공은 성공한대로 보람 있는 것이기 때문에요. 도전이라는 것은 도전 자체의 의미를 가지고 도전해야지, 내가 도전했을 때 성공할까, 실패할까하는 생각은 하지 말라고 이야기 합니다.
▶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계속 도전의 연속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끊임없이 도전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아왔어요. 저는 도전을 생명처럼 여깁니다. 역시 물이 흐르듯이 계속 나는 결과에 만족하지 않고 흘러가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끊임없이 흘러가야죠. 나도 흘러가야 돼요. 안주하고 정체하면 그건 퇴보니까요. 그런 생각으로 살고 있습니다.
▶ 도전하는 삶 가운데 가장 참담하게 실패한 것이 있다면 뭘까요?
가장 실패한 것은 내가 내 자신을 관리 못했다는 거죠. 병을 많이 얻고 내 몸을 관리 못 했고, 내가 내 자신을 돌보지 못한 것이 인생의 가장 큰 실패죠.
▶ 건강을 잃었던 경험 때문에 그러신 건가요?
내 자신을 관리하는 것도 하나의 도전 중에 가장 큰 도전인데, 내가 내 자신을 관리 못했다는 것은 100% 실패한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도전이다, 프로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 굉장히 목표를 크게 잡고 그 목표만 생각하지 가장 기본적인 것은 소홀하게 하거든요. 그런데 사실은 그건 아니거든요.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완성하고 도전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제 자신에게 실패를 한 거죠.
◇ 생과 사의 갈림길까지 갔던 힘든 투병생활,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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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건강을 잃게 된 데는 역시 좋아하시는 술, 담배, 과로의 영향이 컸던 거죠?
술, 담배, 과로, 또 하나는 지금 와서 생각하면 ‘믿음’이라는 것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제가 어느 프로에 가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제가 CBS의 ‘새롭게 하소서’에 한 번 출연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굉장히 당황스러웠어요. 저는 사실 그 프로가 토크 프로인 줄만 알았지 간증프로인 줄 몰랐거든요. 그래서 제가 첫 마디에 그런 말을 했어요. “이것도 하나님이 시키신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약하고 믿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기까지 불려왔다는 것은 언젠가 큰 믿음을 가지고 자신 있을 때 제가 자청해서 다시 한 번 나오겠습니다. 그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했어요. 솔직하게 이야기 했어요.
그런데 이런 것은 있더라고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안 갖고 있는 사람은 아플 때 보면 알아요. 그건 100%입니다. 저는 수술을 받고 죽을 수도 있다는 점, 한 번도 그런 생각을 안해보고 건강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큰 병을 얻었을 때는 더 겁을 많이 내게 되어 있어요.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내가 내일 눈 뜰 수 있을까?’하는 걱정을 할 때도 많았어요.
그런 공포에 살아가는데, 나보다 더 큰 수술을 받은 사람이 계속 밝게 명랑하게 살아가는 거예요. 그 분이 뭐하시는 분인가 했더니, 사업을 하시는 분인데 정말 강한 믿음을 가지고 계시더라고요.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런 큰 일이 닥쳤을 때 믿음이라는 것이 큰 무기가 되고, 우리는 그런 무기가 없으니까 굉장히 공포에 살아가더라고요. 다른 건 몰라도 제가 그것은 확실히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 때 그런 이야기를 주로 했었죠.
▶ 단순한 수술을 받으신 것이 아니고, 생과 사의 갈림길까지 가셨던 거네요.
나중에 집사람한테 들었습니다만, 제가 심장수술할 때 의사 선생님이 심장 수술하다가 “어렵다.”라고 하시고, 저희 집사람이 수술실까지 들어왔었다고 합니다. 마지막일지 모르니까 보라고 말이죠. 마지막 길일지 모르니까 가족들 다 부르라고 하고요. 그런 상황까지 갔었던 거죠. 그 때가 2002년도였어요.
▶ 그 해에 따님 결혼도 있으셨죠?
결혼도 겹쳤었죠. 제가 지금도 우리 큰 아이한테 제일 미안한 것이 그 때 2월 12일 날 쓰러져서 수술을 받았고, 저희 아이가 3월 15일날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식 때는 제가 앉았다 섰다 하기 힘들 정도로 건강이 안 좋아서 앉아서 하객을 받고 그랬었죠. 그 때 우리 아이가 결혼 날짜는 잡았는데 아빠가 자꾸 쓰러지니까 결혼식을 연기를 해야 하는가 하는 기로가 있었어요. 지금도 큰 아이한테 그것이 가장 가슴 아파요.
▶ 그렇게 생과 사의 갈림길까지 갔었기 때문에 아내나 가족에 대한 고마움도 참 절실하셨겠어요.
그건 안 당해 본 사람은 모르죠. 내가 왜 일어나야 되느냐 하는 것은 가족이 있으니까 일어나는 겁니다. 어떤 분은 믿음이 있어서도 일어나고 여러 가지 계기가 있겠지만, 나는 가족이라는 개념에서 내가 여기서 쓰러지면 안되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 사업도 하시고 너무 무리하셔서 건강이 더 나빠지신 것 아니었나요?
그건 반대로 생각할 수 있어요. 사람이 바쁘면 죽을 시간도 없다는 얘기가 있죠. 정말 그 말이 맞는 이야기입니다. 바쁘게 살면 정말 죽을 시간도 없어요. 그러니까 제 생각에는 인생 사는 것이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겁니다.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굉장히 큰 것 같아요.
▶ 건강을 잃어본 경험이 삶을 모습을 크게 만나는 절대적인 계기가 되셨네요.
‘사람이 이래서 종교를 믿게 되는 구나’ 하는 것이 사람이 얼마나 무기력한지 아세요? 위암이라고 해서 수술을 다섯 시간 반을 했어요. 그리고 종양을 떼어내서 조직검사에 들어갔어요. 일주일 안에 그것이 악성이냐 양성이냐 나옵니다. 그 일주일 시간은 정말 10년 이상의 고통이예요. 그런데 일주일 후에 조직검사 결과가 나왔어요. 의사 선생님이 오셔서 “축하합니다. 양성이네요. 암이 아니네요. 내일 퇴원하세요.” 하더니 소화제 몇 통 주고 퇴원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나 그것이 악성으로 나와서 암이 되었을 경우에는 내 인생이 또 달라지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사람은 그렇게 무기력 한 거예요. 내가 가지고 있는 힘은 아무 것도 없어요. 괜히 큰 소리 치는 거죠. 종양이 악성이냐 양성이냐에 따라서 그 한 글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지는 거예요.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 되고’라는 노래가사처럼 말이죠. 저는 유행가 가사 중에 그 가사가 최고인 것 같아요.(웃음)
이래서 사람에게는 살아가는 데 종교라는 것이 필요하고, 우리가 힘에 부치고 힘들 때 그래서 종교가 필요하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더라고요.
▶ 최헌 씨와는 중학교 동창이신데, 학교 다닐 때는 최헌 씨가 쳐다도 못 봤다고요?
최헌 씨는 눈도 부리부리하고 잘 생겼잖아요. 며칠 전에도 만났어요. 중학교 다닐 때는 작았어요. 우리는 컸고요. 최헌 씨는 공부 잘했고, 착했죠. 그런데 저는 학교 다닐 때 헌이를 잘 몰랐죠. 저희는 운동하니까 다른 학생들이 저희를 다 알았고요. 지금도 둘이 만나면 얼마나 오래된 친구입니까? 둘이 만나면 항상 그래요. “야, 새로 지금 또 친구 사귀면 정 붙이고 과거 알고 하려면 힘들다. 그냥 지금까지 사귀어 온 친구나 잘 관리하자” 라고 서로 이야기 합니다.
▶ 책을 처음 내신 건가요?
처음은 아닙니다. 그런데 제 살아온 과거를 이렇게 적나라하게 이야기 한 것은 처음이죠.
▶ 건강이 안 좋으시면서 우울증까지 겪으셨다는 것이 맞나요? 우울증은 아주 무서운 병이라고 하던데요.
무서운 정도가 아니예요.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합니다.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요. 그 때 제가 판단을 잘 했어요. 다른 사람은 보통 숨기는데, 저는 그 와중에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어요. 치료해달라고 말이죠. 정신과에 가면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는데도 그것보다는 내가 빨리 살아야 하니까요. 선생님이 성심껏 치료해주셔서 한 달 만에 한 80% 고쳤고, 또 3개월에 한 번씩 다녀서 이제는 옛날로 돌아왔죠.
▶ 요즘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시는지 궁금해요.
건강관리는 편하게 맘 먹고 그냥 하고 싶은대로 살아가는 것이 건강관리입니다. 밥 먹을 때마다 “이것 먹으면 안돼, 저것 먹으면 안돼” 하면 못 살아가요. 먹되 소식을 하고. 그 다음에 운동이예요. 잠 잘 자고, 물도 많이 먹고요. 그 네 가지만 하면 되요. 그리고 가능하면 생각 자체가 자꾸 긍정적으로 가야 돼요.
◇ 진짜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과 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이죠▶ 그런데 사무총장 자리가 긍정적으로 살기에는 스트레스가 너무 많지 않나요?
속된 말로 아주 돌아버리는 일이 많죠.(웃음) 힘듭니다. 사람 관리도 힘들고, 제도 관리도 힘들고, 새로운 아이디어 창출하기도 힘들고, 또 현대 문제 같이 큰 문제가 터지면 그것도 해결하려면 여기저기 뛰어다녀야 하고요. 또 본의 아니게 오해를 받는 경우도 있고, 다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인생 살다 보면 나를 믿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내가 하는 일이 못마땅한 사람도 있거든요. 거기서 일어나는 괴로움도 있고 다 그렇죠. 이겨나가야죠.
▶ 프로야구계의 큰 숙제인 ‘현대문제’ 때문에 담배를 다시 태우신다고 하던데요. 맞습니까?
속상해서 한 때 또 피웠어요. 그랬다가 요즘은 다시 안 피워요.
▶ 이 문제는 어떻게 되어 가는 겁니까?
그 문제는 열심히 하니까 좋은 결과가 나올 겁니다.
▶ 자서전을 보면 ‘지금은 하일성의 모든 면을 사랑한다.’라고 표현 하셨던데요. 어떤 의미인가요?
이건 진짜 솔직한 이야기인데요. 과거에는 정말 행복이 뭔지를 몰랐어요. 그런데 지금 행복은 좋은 사람과 내가 같이 어울려 살아가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 제일 행복이예요.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내가 열심히 살고 최선을 다하고 좋은 모습으로 살아가면 부와 명예는 나를 쫓아오는 거거든요. 그런데 지금까지는 부와 명예를 앞에다 놓고 잡으려고 뛰어다니니까 그 인생이 행복을 모르고 살아왔던 것 같아요. 그 차이인 것 같습니다.
부와 명예가 반드시 나에게 행복을 주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진짜 행복이라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좋은 모습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며칠 전에 김동주 선수라든가 이종욱 선수 주례를 봤어요. 그 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결혼이라는 것, 부부가 된다는 것은 사랑과 애정도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연’이라고 했습니다. 부부는 인연으로 사는 것이다 라는 거죠.
우리가 사랑한다고 해서 다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진짜 부부는 하늘에서 맺어준 성스러운 인연이다, 그 인연의 끈은 굉장히 성스러우니까 놓치지 마라, 그리고 부수적으로 중요한 것은 ‘부부간의 믿음’이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그것을 알 때까지 굉장히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고요.
▶ 저도 어느 결혼식에 갔더니 주례하시던 목사님이 “짝을 만난다는 것은 정말 하나님이 정해주신 일이다.”라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것이 소중하고 성스러운 인연이예요. 그러니까 그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돼요.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뭐냐면 부부는 사랑과 애정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고 그래요. 그것은 잘못된 이론입니다. 부부가 사랑과 애정이 뒷받침 된다는 것, 이것은 당연한 거예요. 사랑과 애정이 목적이나 목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바탕입니다.
야구선수가 아마추어에서 프로 선수가 됐는데, 프로선수로서 목표가 뭐냐고 하면 “저는 열심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한다면 그건 제일 잘못된 인터뷰예요.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것은 프로야구 선수가 되는 순간에 반드시 해야될 의무입니다. 목표가 있어야죠. 최선을 다하는 것은 프로선수가 되는 순간 가져야 할 의무입니다. 부부가 되는 순간의 의무인 사랑과 애정이 밑바탕에 깔린다는 것, 이것은 당연한 거예요.
▶ 사람이 그런 고난을 통해서 소중한 가치를 만나게 되는 경우가 많죠?
그럼요. 그리고 가장 행복한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거죠. 내가 살아 있어야 역전도 하고 사랑도 하는 거니까요.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 받은 거예요.
▶ 그런데 야구 해설을 하시다가 갑자기 KBO 사무총장을 하시게 되었는데요. 그에 따른 의무와 책임도 큰 자리 아닙니까?
제가 사무총장이 된다는 것은 의무와 책임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무총장으로서 내가 남을 것인가 하는 것이 목표죠. 최선을 다하고 의무와 책임을 다 한다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목표나 목적이 될 수는 없는 것이죠.
◇ 많은 분들이 오셔서 야구를 즐길 수 있는 쾌적한 운동장 만들고 싶어▶ 사무총장으로서 이것 하나는 꼭 해야 되겠다 하는 것은 뭔가요?
저는 좋은 운동장에서 야구팬들이 야구를 볼 수 있게끔 운동장을 어떻게 정비하느냐, 쾌적한 운동장을 만드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시설개선을 위해 많이 노력해야죠. 하여튼 야구장에 오면 편안하고, 맛있는 것도 많고, 추억이 될 수 있는 그런 장소를 만들고 싶은 거죠.
▶ 지금 프로야구 관객 수가 자꾸 줄어들고 있지 않나요?
올해 4백만 관중으로 늘어서 굉장히 청신호가 보였고, 내년에는 5백만 관중이 되도록 해야죠.
▶ 일본에 가서 보면 참 부러우시죠?
부럽다기보다는 그 사람들은 그렇게 될 때까지 그만한 노력과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해왔기 때문에 우리도 부러운 것보다는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더 중요한 거죠.
▶ 관객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야구를 즐길 수 있도록 하려면 엄청난 예산이 드는 겁니까? 아니면 발상의 전환만으로도 가능한 겁니까?
그것은 발상과 예산과 정열, 야구에 대한 애정이 다 복합적으로 같이 가야죠. 돈만 가지고 되는 것도 아니고요. 아이디어만 있어서도 안 되고요. 야구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죠.
▶ 이렇게 열정적으로 KBO 사무총장으로 일하시는데 하 총장님 마음을 너무 몰라주는 것 같은 섭섭한 생각이나 안타까움도 많이 만나실 것 같아요.
그럼요. 본의 아니게 제가 의도했던 것과 다르게 결과가 나온다든가 그래서 받는 스트레스는 참 괴롭죠. 내 뜻은 이건 아니었는데 결과가 그렇게 나왔기 때문에 내가 남에게 그렇게 보여 주었다는 것이 굉장히 괴롭죠.
▶ 유명하고, 능력이 있으셨기 때문도 있겠지만, KBO 사무총장의 자리까지 가신 것은 어떤 점에서 좋은 평점을 받으셨던 건가요?
모르겠습니다. 제 입으로 뭐라고 말씀드리기 뭐합니다만, 저한테 하나의 계기가 되었겠죠. 그런 계기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저로서는 최선을 다해서 야구인이 보여주는 행정가로서의 능력도 보여주어야 또 제 후배가 될지 선배가 될지 다른 분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니까요. 제 한 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야구인 전체의 위상이나 그런 능력면으로 결부시킨다면 제가 꼭 최선을 다하고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죠.
▶ 지금까지는 진행이 잘 되고 있는 거죠?
반반이라고 볼 수 있어요. 성공한 부분도 있고요. 처음부터 길을 잘못 잡은 부분도 솔직히 있고요.
▶ 예를 들면 어떤 부분이 그런가요?
있는 운동장이라도 정비를 해서 쾌적한 운동장을 만든다는 생각보다 자꾸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생각이 조금 제가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어섰던 부분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 부분은 제가 처음 컨셉 자체를 잘못 잡은 것 같아요.
▶ 그런 것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중요한 능력 아니겠어요?
인정할 건 인정해야죠. 제가 다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요.
▶ 그래도 유소년 야구 활성화 쪽은 많이 좋아졌죠?
많이 됐어요. 제가 사무총장 될 때 16개 리틀 야구팀이 지금은 47개로 늘었으니까요. 그것은 저 뿐만 아니라 이광한 육성위원장과 한영관 리틀야구연맹 회장 분들이 많이 도와 주셨고, 그 분들의 공이 굉장히 크죠.
▶ 하일성 사무총장님 인생에 있어서 홈런은 뭐였습니까?
제가 ‘야구인’이라는 거죠. 야구와 인연을 맺었던 것이 가장 큰 인연입니다.
▶ 끝으로 신년 계획과 바램이 있다면 한 말씀 해주시죠.
2008년도에는 더 많은 분들이 야구가 참 재미있는 스포츠라는 것을 느꼈으면 좋겠고, 그렇게 되도록 선수들과 저, 야구 관계자들 모두가 노력을 해야겠죠. 뭐니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저는 역시 모든 분들이 다 건강해야 한다는 건데요. 평범한 이야기지만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는 것이 최고입니다. 평범하게 받아들이는데,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는 거예요. 제가 그것을 몰랐기 때문에 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