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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감·재봉틀 짊어지고 피난 가서도 가게 열었죠"



인물

    "양복감·재봉틀 짊어지고 피난 가서도 가게 열었죠"

    • 2007-11-26 14:13

    100년 노포(老鋪)를 꿈꾸는 종로양복점 이경주 사장

    [BestNocut_L]노포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늙을 로(老)에 가게 포(鋪), 노포란 말 그대로 오래된 가게를 말하는데요. 이웃나라 일본에는 500년 이상된 노포가 20여 개가 있고 100년을 넘긴 노포는 무려 만오천 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이 ‘노포’라는 존칭을 받을 만한 곳이 얼마나 될까,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라고 그래요.

    한국 최고의 가게 중 하나인 ‘종로양복점’. 1916년에 만들어졌으니까 올해로 창업 91년을 맞는 ‘종로양복점’은 3대째 가업을 대물림해오고 있는 양복점인데요. 정치인들과 유명 인사들이 단골로 찾는 잘나가던 시절도 있었지만 기성복의 위세에 밀리면서 위기의 순간도 있었습니다.

    ‘손님이 만족하지 않는 옷은 옷으로서 가치가 없다’는 부친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면서 할아버지의 양복점을 ‘100년 노포’로 만들겠다는 종로양복점 사장 이경주 씨를 11월 26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91년 전통의 국내에서 제일 오래된 양복점

     

    ▶ 가게 문을 연 지 100년이 되려면 이제 몇 년 남은 건가요?

    9년 정도 남았습니다.

    ▶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양복점이죠?

    그렇죠. 현재는 제일 오래된 양복점입니다. 전에 있었던 양복점은 많이 없어지고, 현재로는 우리 양복점이 최고로 오래된 양복점입니다.

    ▶ 양복점은 어디에 있나요?

    지금 광화문에 있습니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서대문 방향으로 한 150m 가량 내려오시면 우측에 있습니다.

    ▶ 양복점 하면 우리나라는 소공동 쪽이 유명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원래 종로양복점도 그 곳에 있지 않았나요?

    처음에 저희 할아버지가 양복점 가게를 내신 때가 남대문통이라고 하는 보신각 옆에서 시작하셨어요.

    ▶ 그럼 우리나라에서 양복을 처음 입은 것이 언제부터였을까요?

    아마 1881년도에 개혁파에 김옥균, 유길준, 홍영식, 윤치호 씨 등이 일본에서 양복을 입고 오신 것이 최초라고 되어 있습니다.

    ▶ 그러면 일본인 양복점이 먼저 개설되었었나요?

    그럼요. 처음에 일본인 양복점들이 있었죠.

    ▶ 할아버님께서는 어떻게 양복점을 개업하게 되셨나요?

    할아버지가 열다섯 살쯤에 양복 기술을 배우려고 일본인 양복점에 취직을 하셨어요. 거기서 양복 기술을 배우시다가 30대 때 일본의 양복학교로 유학을 가셨어요. 일본을 다녀오셔서 1916년에 개업을 하신 거죠.

    ▶ 할아버지께서 처음에 양복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떤 이유라고 들으셨나요?

    그 때 당시에는 전부 바지 저고리를 입었잖아요. 그래서 그 당시로서는 쉽지 않은 결정을 하신 거죠.

    ◇ 양복기술 배우러 일본 유학 다녀오신 할아버지... 종로에 양복점 개업하며 시작

    ▶ 종로에 양복점을 내신 것은 언제신가요?

    바로 보신각 옆에 은행 건물이 있었는데요. 그 건물에 세들어서 하시다가 종로1가에 집을 지어서 다시 냈죠. 그것이 한 40년 정도 되니까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바로 전에 하신 거죠. 그리고 나서 해방 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 일본 양복점이 있었으면 경쟁이 치열했을 것 같은데요.

    그럼요. 치열했죠. 그 때는 종로양복점이 신사복도 했지만 학생복도 했었어요. 우리나라 학생들은 우리 양복점에 와서 하고, 일본인 학생들은 일본 사람이 하는 양복점에서 교복을 맞췄어요. 그런데 학교에서 우리나라 학생들도 일본인 양복점에서 하라고 하는데도 전부 우리집에 와서 하니까 서로 경쟁이 되었었죠.

    ▶ 이경주 사장님은 젊을 때부터 멋을 많이 냈겠어요.

    아니요. 저는 어렸을 때 가게를 몇 번 나가보지 못했어요. 아버지가 가게에 나오는 것을 반대하셨어요. 아버지가 굉장히 무서운 분이셨거든요. 집에서도 아버지와 얘기를 못할 정도였으니까 가게에 나갈 생각도 못했죠.

    ▶ 함흥과 개성에도 분점을 냈다고 하니, 양복점이 정말 잘 됐었나 봅니다.

    그렇죠. 할아버지가 하실 때는 직원이 한 백여명 되었어요. 지금 같으면 대기업인 셈이죠. 그래서 개성과 함흥에도 지점을 내셨는데요. 그래서 일본 사람들한테 미움도 많이 받고 하신 것 같아요.

    ▶ 일본인의 시샘으로 어떤 어려움이 있으셨나요?

    여러 가지가 있었다고 들었어요. 아까 말씀드린 교복 이야기도 그렇고요. 그 때 당시에 상인들이 돈 많이 걷어서 주는 일도 있었는데 그런 데서 미움을 받았던 것 같아요.

    ▶ 그 당시에 멋을 내는 사람들은 돈 많은 사람들이었을 텐데요. 단골 손님은 어떤 분들이었다고 하던가요?

    그 때 당시에는 양복은 일반 사람들은 입어보기 어려울 때 아닙니까? 그래서 정치라든가 문화계의 유명한 분들이 와서 양복을 했죠.

    ▶ 김두한 선생님과 얽힌 이야기도 들으신 것이 있으신가요?

    맞춘 양복을 입고 다니시다가 불쌍한 사람이 있으면 벗어주거나 전당포에 가서 옷을 맡기고 돈을 빌려주기도 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 그 때는 전당포에서 옷을 받아줄 정도였나요?

    옛날에는 전당포에 시계를 맡겼던 것처럼, 양복점에서 양복을 맞추고 계약금 대신 시계를 맡겨 놓기도 했어요. 그것을 잡아놓고 있다가 양복 찾아갈 때 돈 받으면서 받아둔 시계를 내주기도 해서 아버지가 가게에 시계를 여러 개 가지고 계셨어요. 계약금 대신 맡겼다가 안 찾아간 시계들 말이죠.(웃음) 그래서 제가 어려서 그 시계를 얻어 차기도 했어요.

    ▶ 그 당시에는 시계를 찬 것만으로도 돈 있고 멋내는 분 아니었나요?

    그렇죠. 그 때는 시계를 차고 다니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았죠. 그래서 학교 다닐 때 일부러 시계를 보이게 해서 다니기도 했어요.

    ▶ 그럼 언제 할아버님이 아버님께 가업을 물려주셨나요?

    할아버지가 1881년에 태어나셔서 1942년에 돌아가셨거든요. 돌아가실 때 저희 아버지가 만주에 계셨어요. 만주에서 일본 양복 회사를 다니고 계셨어요. 저희 아버지 형제분들이 9형제신데 저희 아버님은 넷째셨거든요. 그런데 저희 아버지를 후계자로 점찍으신 거죠.

    아버지가 양복에 관련된 일을 배우기 위해서 일본회사에 취직했어요. 그 때 당시에 아버지가 보성전문대학교 상과를 나오셨거든요. 그래서 은행에 취직 합격을 했는데, 할아버지가 양복 기술을 배우라고 하셔서 은행을 안 가시고 만주의 양복회사를 들어가신 거예요.

    만주에서 해방된 후에 오셔서 그 때부터 종로양복점을 아버지가 운영하시게 된 거죠. 1945년부터 하셔서 1996년에 돌아가셨거든요. 한 50년을 아버지가 하셨죠.

    ◇ 김두한, 김진규 씨등 유명인들이 많이 찾아

    ▶ 해방과 6.25 전쟁, 그 후로도 계속된 격동의 시기에 어떻게 영업하셨어요?

    6.25때 다들 피난을 가잖아요. 그래서 저희는 양복감을 다 짊어지고 대구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 때 당시에는 양복감이 귀했거든요. 그래서 양복감과 미싱 등을 짊어지고 공장 식구들과 같이 피난을 간 거예요. 대구 경산으로 가서 거기서 양복점을 내서 계속 했죠. 그러다가 서울 수복하면서 올라와서 종로에서 다시 시작했죠.

    ▶ 아버님이 하실 때는 영업이 어땠다고 하시던가요?

    그 때 당시에는 좋았죠. 제가 1970년대부터 나왔는데요. 그 때 당시에도 일이 많았어요. 그 때는 기성복은 전혀 없었고, 있어도 군소업체에서 만드는 것만 조금씩 있었죠. 일이 많을 때는 제가 하루에 열 개 이상, 한 달이면 300벌 정도 만들었었죠. 그런데 80년 후반부터는 기성복이 많이 나오면서 조금씩 줄어들었죠.

    ▶ 기성복이 나오면서 양복점은 위기가 될 수 있었을 텐데요. 실제로 어떠셨나요?

    저는 그 때 당시에는 상관없다고 큰소리를 쳤어요. 그런데 돌아가는 세태를 보니까 젊은 사람들은 기성복을 많이 선호하더라고요. 맞춤 양복은 맞추러 가고 가봉도 해야하고 찾으러 가야 하잖아요. 몇 번씩 번거로우니까 젊은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해결할 수 있는 기성복을 선호하게 되죠.

    ▶ 편리성 문제도 있지만, 맞춤양복이 기성복보다 대여섯 배는 더 비싸지 않았나요?

    그것이 정상이예요. 원래는 세 배 정도가 비싸야 정상인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거든요. 아주 싸게 세일하는 것이 아니면 기성복이라도 저희보다 더 비싸니까 기성복이 무조건 싸다는 개념은 없어요.

    ▶ 우리나라 ‘양복지’가 나온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제가 알기에는 1960년대로 알고 있습니다.

    ▶ 예전에 보면 영국 양복지가 유명하고 그러지 않았나요?

    1930-40년대는 ‘마카오 신사’ 라고 해서 그 쪽에서 많이 들어왔어요.중절모를 쓰고 지팡이 짚고 파이프를 물고 하는 스타일이죠.조끼가 있어서 거기다가 회중시계를 꽂아 넣고 다녔죠.

    ▶ 종로양복점에 오신 유명한 분들은 어떤 분이 계셨나요?

    그 때는 대통령까지는 못 오시고요. 부통령이신 이시형 부통령이 오셨고요. 국무총리도 오시고 정치하는 분들이 많이 오셨죠. 그 때 당시에 종로1가가 ‘정치 1번지’라고 했어요. 그래서 정치인이 상당히 많이 다녔거든요. 또 연예인으로는 김진규 선생님이 저희 집에 오셔서 제가 양복을 해드린 기억이 납니다. 그 때 김진규 선생님이 아주 유명하실 때는 아니고 약간 연세가 드셨을 때 오셨죠.

    ▶ 1970년대에는 양복이 한 벌에 얼마 정도 했나요?

    그 때 제가 알기로는 한 삼천원 했던 것 같아요.

    ▶ 또 그 때는 바지는 항상 두 벌을 맞추라고 했었죠.

    1960-70년대에는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집에서 양복 한 벌씩 해주었어요. 그리고 예복은 거의 맞춰서 입었죠.

    ▶ 김두한 선생님 얘기 더 들은 것은 없으세요?

    아주 멋쟁이셨죠. 그리고 몸이 아주 단단하시고 남자답게 생기셨죠. 또 자신이 어렵게 컸기 때문에 어려운 사람을 많이 도와주었다고 하더라고요.

    ▶ 이경주 사장님이 가업을 물려받으신 것은 언제인가요?

    제가 1970년부터 아버지 밑에서 배우기 시작했죠. 아버지가 양복일을 배우라고 하는데도 제가 안 배우다가 1969년에 학원에 가서 배웠어요. 그래서 그 뒤로 아버지 밑에서 아버지와 36년을 같이 했죠. 그러다가 1980년대에 가게를 물려받았습니다.

    ▶ 원래는 건축 전공을 하셨다고요? 건축과 양복 만드는 일이 서로 비슷한가요?

    예. 자로 재는 것이 서로 비슷하죠. 그런데 건축은 지어진 상태로 서 있는 정정인 상태인 것에 비해서 양복은 사람이 입고 움직이는 동적인 상태인 점이 다르죠. 그래서 양복 만드는 것이 더 어렵다고 생각해요. 움직이는 사람이 입는 것이니까요.

    ▶ 그 때는 양복도 오래 입고 했죠?

    그럼요. 오래 입었죠. 그 때는 거의 단벌신사죠. 여름에는 더우니까 잘 안 입고, 춘추복과 동복 한 벌씩 해서 일 년 내내 버티니까 그래서 단벌신사라는 말이 나왔죠.

     


    ◇ 까다로운 손님에게도 항상 친절과 정성을 원칙으로

    ▶ 늦은 나이에 시작하셔서 쉽지 않으셨을 것 같아요.

    제가 처음 가위를 잡았을 때 떨려서 자르지를 못했어요. 학원에 가서 연습을 했는데도 막상 하려니까 떨려서 가위질을 하지 못하겠더라고요. 처음에는 가게에 계시던 재단사 옆에서 보조일도 하면서 배웠는데요. 1970년대에 종로1가에 지하철 공사를 했어요. 그 때 길이 파여서 통행이 불편하니까 손님도 없고 장사가 잘 안됐어요. 그래서 제가 그 때부터 재단을 시작했어요.

    처음에 시작을 했는데 맞추면 맞추는 대로 다 손님한테 옷이 안 맞는 거예요.(웃음) 그래서 단골손님들이 다 떨어져 나갈 판이 되었어요. 그렇게 몇 년을 고생했죠.

    ▶ 그럴 때 아버지가 뭐라고 하셨어요?

    아버지는 별 말씀이 없으셨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30년 넘게 같이 일했어도 아버지한테 양복 잘 만들었다는 말을 못 들어봤으니까요.(웃음) 그래서 공장에 올라가서 일본에서 기술을 배워오신 분한테 다시 처음부터 배우고 고생을 많이 했죠. 기술이라는 것이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지금은 제 나름대로는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사람의 몸이라는 것이 생김새가 다른 것처럼 다 다르거든요. 똑같은 체형이 없어요.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 다 그 본을 떠야 돼요. 한 사람 한 사람 다 종이에 그려서 해야 돼요.

    ▶ 양복에도 유행이 많지 않습니까?

    옛날에는 유행이 한 10년 넘게 오래 갔거든요. 그런데 요즘에는 1-2년내에 확 바뀌더라고요. 그런 유행도 빨라졌더라고요.

    ▶ 아버님이 가업을 물려주시면서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아버지는 “손님이 만족해야지, 네가 양복을 잘 했다고 해봐야 입는 손님이 싫다고 하면 잘못된 옷이다.” 라고 말씀하셨죠.

    ▶ 사장님 아들이셨어도 꾸중을 듣거나 울기도 하셨어요?

    제가 재단을 몇 년 하니까 자신 있다고 생각했었어요. 그 때 제가 결혼하고 나서도 월급을 안 주시고 용돈을 주셨는데요. 그래서 생활하기가 어려우니까 제 집에 가서 한 달 살고, 처갓집가서 한 달 살고 했어요. 이사도 한 열댓 번은 다녔어요. 그렇게 어렵게 했었죠.

    ▶ 아버님이 양복점이 잘 안 돼서 월급을 안 주셨던 것은 아니죠?

    그렇죠. 그 때 당시에는 양복점에 일도 많았고, 손님도 많았죠. 그런데 그 당시에 그 양복점 하나로 세 집이 살았으니까 그렇게 넉넉하지는 못했죠.

    ▶ 손님 중에 까다로운 분들도 계셨겠죠?

    까다로운 것보다도 손님의 취향을 잘 맞춰야 했던 것들이 기억이 납니다. 한 25년쯤 됐는데요. 손님이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 자리에서 찢어버리더라고요.(웃음) 물론 손님 마음에 들지 않게 했으니까 제 책임이죠. 그래서 아무 소리도 못하는 거죠.

    그리고 어떤 분은 거의 양복을 한 달에 한 벌씩 하는 분이 계셨어요. 취미가 양복을 맞춰 입는 분이셨는데요. 그렇게 옷을 많이 해서 입었는데도 얼마나 까다로운지 꼭 고쳐야 해요. 옷이 잘 안 맞는다기보다는 성격인 것 같아요. 어디를 몇 mm 줄여달라, 혹은 늘여달라 라고 하는 식이예요. 그런 분이 제일 기억이 나죠.

    ▶ 그런데도 철저히 서비스 하셨나요?

    그럼요. 군소리 없이 불평 안하고 하니까 좋아하면서 지금은 친구가 되었어요.(웃음)성격이 그런 것이니까요. 그래서 그 부인이 오셔서 “저 사람, 다른 양복점에 갔더니 오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하시더라고요.

    ▶ 포항공대의 어느 교수님 손님은 20년 만에 다시 찾아와 양복을 맞추신 경우도 있으시다고요?

    종로2가에 있을 때 오셔서 결혼예복을 하셨던 분이셨어요. 그리고 나서 미국에 가서 공부하시고 박사학위를 받고 포항공대에 오셨는데요. 그 분이 다시 양복점을 찾으러 종로2가에 오시니까 재개발 되고 없어져서 저희한테 전화를 하셔서 찾아오셨어요. 그래서 참 반갑고 고마웠죠.

    ▶ 그런 손님들 중에는 재벌 되시는 분들도 많이 오셨다고요?

    김우중 회장님의 형님분도 자주 오셨고요. 한보의 정태수 회장님도 자주 오셨어요. 옛날에 한보 사무실이 종로2가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가까우니까 자주 오셨었죠. 그런 분들은 한 번 오시면 서너벌씩 하기도 하셨고, 잘 부탁한다면서 팁을 주시기도 하셨죠.

    ▶ 양복부문에도 기능올림픽이 있지 않나요?

    그럼요. 있죠. 양복부문도 거의 우리나라가 금메달을 휩쓸었죠. 우리나라 사람들이 손재주가 좋죠. 보통 쓰는 바늘이 2cm 정도 되는데요. 그런 것으로 손으로 일일이 다 꿰매는 겁니다. 넓은 부분은 미싱으로 하지만, 섬세한 부분은 바늘로 다 하죠. 그러니까 양복 저고리 한 벌 만들려면 열다섯 시간 정도 걸리죠. 그 조그만 바늘로 아침부터 나와서 해도 저녁까지 완성하기가 힘들어요. 그런 힘든 과정을 생각하면 양복이 비싸다고 할 수도 없죠.

    ◇ 때와 장소에 어울리게 옷을 깨끗하게 손질해서 입는 것이 진짜 멋쟁이

    ▶ 이경주 사장님은 경영의 역할을 주로 하신 겁니까? 아니면 디자이너 역할을 많이 하신 겁니까?

    디자이너로서 시작을 했죠. 그리고 지금은 경영과 디자이너를 같이 하고 있죠.

    ▶ 옛날에는 양복 안에 손님 이름을 새겨 넣기도 했는데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기성복에는 없지만 맞춤양복에는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 종로양복점 만의 특별한 뭔가가 있으신가요?

    저희 가게의 상표를 보면 ‘종’이 세 개가 있어요. ‘삼대’라는 의미예요. 할아버지가 하실 때는 종이 하나가 있었고요. 아버지가 하실 때는 종이 두 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세 개입니다.

    ▶ 그런 역사와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 종로양복점은 지금까지 문을 한번도 닫은 적이 없으시다고요?

    그렇죠. 한 번도 닫은 적이 없습니다. 피난 갔을 때도 가게를 열고 장사를 했으니까요.

    ▶ 80년대부터 기성복이 나오면서 찾아온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우리 가게가 어려웠던 적은 1970년대에 지하철 공사를 할 때 좀 어려웠었고요. 또 1980년대 후반에 기성복이 많이 나오면서 좀 어려웠는데, 그래도 우리 가게는 단골 손님들이 많이 오셔서 그렇게까지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저희는 IMF도 별로 못 느꼈어요. 그러니까 물론 큰 돈을 번 것도 없지만 그렇게 큰 위기도 없었어요. 지금도 장사가 잘 안된다고 하는데 그래도 많은 분들이 도와주시니까 그렇게 힘들거나 한 것은 별로 느끼지 못합니다.

    ▶ 그런 것이 다 삼대를 내려오는 동안 쌓인 기술과 신용 때문 아닐까요? 이경주 사장님은 거기에 어떤 것을 더 보태야 할까요?

    저는 정성을 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희 아버지가 항상 ‘지성무식(至誠無息)’이라고 해서 “정성은 끝이 없다”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손님한테 해주는 것은 끝이 없다’라는 말씀이 항상 제 머리 속에 남아 있습니다. 굳이 홍보를 많이 하지 않아도 손님들이 저희들의 마음을 알고 잘 찾아주시니까 참 감사하죠.

    ▶ 그렇게 정성을 다해서 하시려면 손님의 취향이나 직업, 성격도 파악하셔야겠어요?

    오래 하다보니까 어느 정도 척 보면 어떤 일을 하시는지 어렴풋이 알 수가 있어요. 대개 법조계에 계신 분들이나 교수분들 많이 오시죠.

    ▶ 옷의 중요성이나 옷을 바르게 입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해주시죠.

    ‘옷이 날개’라는 옛말도 있는데요. 지금도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잘 입은 거지가 먹을 것도 잘 얻어먹는다’는 말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꼭 새 옷을 입어야만 좋은 것이 아니고, 오래된 옷이라도 깨끗하게 잘 손질해서 입고 자기 몸에 잘 맞는 옷이 좋은 옷이죠.

    ▶ 정말 옷이 정감이 가는 옷이 따로 있더라고요.

    그렇죠. 옷이 여러 개 있어도 아주 비싸지 않더라도 하나 마음에 드는 옷만 입게 되고, 아무리 비싸도 마음에 안 드는 옷은 안 입게 되는 거죠.

    ▶ 장소와 목적 시간에 따라서도 옷을 맞춰 입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죠.

    그렇죠. 남의 결혼식에 가는데 상하의를 다르게 입는 콤비 스타일은 좀 실례이고, 정장을 입고 가야 보기에도 좋죠. 또 장례식에는 화려한 옷을 입고 갈 수 없고 짙은 감색이나 검정 정장을 입고 가는 것이 예의죠.

    ▶ 무엇보다도 4대, 5대 계속 이어 내려갔으면 하는데요. 계획은 어떠신지요?

    제가 슬하에 남매를 두었습니다. 둘 다 미술을 전공했거든요. 그래서 한 녀석을 가르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꼭 되어야 할 것 같아요.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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