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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라는 말이 사회자의 입을 통해 들리는 순간, 왈칵 눈물이 났다. 남자들만 가득한 삭막한 세계에서 10년 동안 한 방울의 눈물도 보이지 않았던 당찬 그녀였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같은. 젖은 눈동자 위로 프로게이머 시절의 과거와 오늘이 순식간에 스쳐지나가는 듯했다. 스타크래프트에 꽂혀 처음 마우스를 잡았던 입문부터 시작해 사상 첫 우승의 순간, 청와대를 방문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났던 기억, 그리고 승부 조작에 가담해 선수 자격을 박탈당한 팀 후배 진영수의 마지막 모습과 위암으로 투병 중인 오랜 팬의 안타까운 사연 등등. 억눌렸던 눈물은 봇물 터진듯 쏟아져내렸다.
"17일 은퇴식을 치루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살벌한 승부 경쟁 속에서 눈물이 다 메말랐다고 생각했는데…. 팬들이 제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 코끝이 찡해지더니 십수년 만에 처음으로 소리 내며 운 것같아요." 서지수. 지난 2002년 열여덜에 프로에 데뷔했다.
2003년 온게임넷 여성 프로게이머 특별전을 2회 연속 거머쥐면서 타이틀 사냥을 시작했다.
''베리'' 이은경, 김영미 등 강자를 연거푸 꺾으며 독주의 시대를 열었다.
이어진 1인 천하 시대. 서지수는 살아남았지만 여성부는 사라졌다.
어쩔 수 없이 성대결에 나섰다.
하지만 남성 프로게이머들과의 경기에선 닿을 듯 말 듯한 간극을 넘지 못했다.
대부분 예선탈락하거나 실격, 하위권을 맴돌기 바빴다.
그럼에도 서지수의 성대결은 늘 언론과 팬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남자들이 모두 피했죠. 여자라고 무시하기도 하고, 여자한테 지면 은퇴해야한다는 말도 공공연히 나돌았으니까. 모두가 적인 분위기였어요." 승승장구하던 서지수는 남성들과의 경기에서 냉혹한 현실을 맛봤다.
그녀에게 실전은 너무나 벅찼다.
참가한 대회마다 예선탈락을 당했다.
연습경기에서도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밤잠까지 설쳐가며 연습을 했지만 그녀에게 경기부스는 그렇게 차가웠다.
"남성리그는 넘지 못할 벽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남자들과 경기를 할수록 실력차이가 느껴졌죠. 2, 3수 이상 차이가 났다고나 할까." 다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며 비아냥거렸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집념은 더 강해졌다.
여성 게이머 최고 위치에서 내려와 남성리그 바닥부터 다시 시작했다.
남자 프로게이머들도 하기 힘들다는 합숙훈련을 자청했다.
하루 10시간 이상 게임에 매달렸다.
깨지고 넘어져도 또 덤볐다.
그렇게 두드리자 열렸다.
2005 월드사이버게임즈 예선에서 임요환에 이어 프로게이머랭킹 2위를 지켜왔던 홍진호를 2대 0으로 물리쳤다.
해냈다는 뿌듯함을 만끽했다.
아주 잠시 동안이었지만. 홍진호가 경기 전날 저녁 회식에서 육회를 먹은 뒤 복통과 설사 등 식중독 증세를 보여 인근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는 뉴스가 쏟아졌다.
콕 찍어서 언급하진 않았지만 식중독 때문에 패했다는 뉘앙스였다.
뭔가를 해냈다는 홀가분함보다 이젠 어떡하나 하는 부담감이 더 크게 엄습해 왔다.
"솔직히 충격이었죠. 축하받을 일인데도 오히려 안티들이 많이 생겨났어요. 남성은 나쁜 컨디션에도 여성과의 승부를 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웅 대접을 받는 반면 여성은 그런 남성을 이겼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한 거죠." 아무 소리도 못했다.
상처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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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딸만 셋인 딸 부잣집의 둘째딸인 그녀는 가정에서 선입견이나 차별을 느껴보지 못했다.
사내아이들이나 할 법한 낚시, 운동, 게임을 늘 함께 했다.
그러나 사회는 많이 달랐다.
단순히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비교적 개방적이라고 여겨지는 게임계에서조차 보이지 않는 입김들이 그녀를 괴롭혔다.
"차별 때문이라기 보다 멘탈이 문제였어요. 솔직히 심적으로 많이 약했죠. ''정신적으로 좀 더 강했으면 오래 버틸 수 있었을 텐데''하는 아쉬움이 들어요." 모든것을 걸면 외로운 법. 모두가 피했다.
대부분의 프로게이머가 남자인 탓에 기껏해야 아침저녁으로 팀에 출퇴근을 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서지수는 이마저도 어려웠다.
함께 밥만 먹어도, 연습만 같이해도 지극히 남성적 시선으로 ''누구랑 사귄다더라''는 등등 시답잖은 이야기가 쏟아졌다.
홍진호 사건 이후 언론의 관심도 이미지 변신에만 초점이 맞춰졌다.
팬들의 관심이 점차 실력보다는 외모로 옮겨갔다.
악플과 소문이 이어졌다.
"남자 선수들이 거리를 두기 시작하더라고요. 정보공유도 안 해주고 연습도 없었고. 내성적인 성격이라 더 어려웠죠. 정신적인 고통을 심하게 받았어요. 밥 먹는 것조차 힘들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녀는 여성에 대한 보이지 않는 불평등을 게임에 대한 집념과 열정으로 극복했다.
포기하지 않고 남자부 경기에 도전했다.
2009년 이스타즈 헤리티지에선 평소 존경하던 선배 박정석을 물리쳤고 스타리그 예선에선 MSL(엠에스엘) 우승자 출신인 박태민을 이겼다.
무엇보다 팀 대항전인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에 최초의 여자 선수로 STX(에스티엑스) 소울 유니폼을 입고 나섰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이기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남자들과의 경기에선 이겼지만 행복하지 못했다.
점차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는 것을 느꼈다.
결국 그동안 자신에게 지워졌던 짐을 홀가분하게 벗어던졌다.
"이렇게 떠나는 게 아쉽지만, 어느 순간부터 열정도 없이 무의미한 도전을 반복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제 더 이상은 관성적으로 게임을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죠. 은퇴 선택은 옳았다고 믿어요." 하지만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은퇴 이후 쇼핑몰을 오픈하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자신의 프로게이머 아이디에서 따와 ''토스걸''(www.tossgirl.co.kr)이다.
주요 품목은 여성 의류. "참 신기한 게, 팬분들이 하루에 수 백, 수천 명씩 찾아오시는 걸 보고 많이 놀랐죠.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많이 사랑 받았구나라고 생각해요. 선수때는 오히려 얼떨떨하고 실감이 나지 않았던 거 같은데. 10년이 넘게 한우물만 파고 달려온 삶이 헛되지 않았구나 싶어 참 뿌듯해요."
서지수 프로필 생년월일 =1985년 5월 21일 출생 = 서울 직업 = 전 프로게이머 출신교 = 구리여자고등학교 소속 = STX 소울 가족관계 = 3녀 중 둘째 수상경력 = MBC게임 레이디스 스타리그 우승(2004년), 제4회 겜티비 여성부 스타리그 우승(200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