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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님, 이건 반칙입니다!''''

  • 2004-03-04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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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치인 ''노무현''을 좋아했던 이유가 있다.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특권과 반칙이 통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보겠다"고 한 그의 뜨거운 열정이 좋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 길이 옳은 길이라 고집하면서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그 뚝심이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했다.

''새 세상''을 꿈꾸어온 젊은이들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고, ''낡은 질서''에 염증을 느껴온 국민들에게 새로운 기대를 갖게 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그런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엄정하고 가장 중립적이어야 할 선거판에서 사실상의 ''옐로카드''를 받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달 24일 열린 방송기자 클럽 토론회에서 "대통령이 뭘 잘 해서 열린우리당이 표를 얻을 수만 있다면 합법적인 모든 것을 다하고 싶다. 국민들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한 발언이 문제가 됐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3일 이 발언의 선거법 위반 혐의를 인정하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중립의무 준수''를 강력히 요청했다. 한 마디로 노무현 대통령의 잇따른 열린우리당 지지 발언에 대해 ''반칙'' 판정을 내린 것이다.

"반칙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공언해온 대통령이 ''반칙'' 판정을 받은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은 지나친 법 해석이라고 볼멘소리를 하고 있고, 한나라당과 민주당 등 야당은 선관위의 조치가 여전히 미흡하다며 불만을 거두어들이지 않고 있다.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선관위의 결정에 대해서 어떤 법적 해석을 덧붙일 수 있을만한 법적 소양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정치권의 공방에 대해 가타부타 끼어 들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러나 일련의 과정을 쭉 지켜본 정치부 기자로서, 한 편으로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대목이 적지 않았다는 점도 함께 말하고 싶다.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도 정치인인데 왜 정치적 의사 표시를 못하게 하느냐?",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한 것인데 그것까지 문제 삼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역정을 냈다고 한다.

더군다나 선관위의 ''반칙'' 판정이 난 뒤에도, 이병완 청와대 홍보수석의 입을 통해, "대통령은 정무직 공무원으로 현행 선거법도 필요한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정치적 의사 표시는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언뜻 들으면 일리가 있어 보이기도 한 항변이다. 그러나 말을 잘한다고 해서, 그 말이 그럴 듯하게 들린다고 해서 다 옳은 말은 아니다. 내 판단으로는 대통령의 말이 잘못 됐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그런 생각은 정말 위험하기 짝이 없다는 점을 함께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복잡하고 어렵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어느 정도의 상식만 갖추고 있으면 대통령의 말과 생각이 왜 잘못됐는 지를 금방 알 수 있다.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한국과 일본이 월드컵 결승전에 진출해 며칠 후면 국가적 명예와 국민적 자존심을 건 한 판 승부를 펼치게 된다고 해보자. 그런데 이 경기가 미국에서 치러질 예정이고, 경기를 총관리하는 감독관은 한국계 미국인이다. 비록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만 그에게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또 세계 축구인들도 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FIFA는 그에게 결승전 총관리 책임을 맡겼다. 탁월한 축구선수 출신으로 결승전을 잘 치러내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 전 세계 축구인의 명예를 걸고 엄정하고 중립적으로 잘 관리해나가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승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세계 축구 전문기자들이 그를 상대로 기자회견을 했다. 한 기자가 그에게 "당신에게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데 엄정하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결승전을 잘 치러낼 수 있겠느냐? 이번에 아예 한국 국적을 취득할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그라면 어떻게 대답을 하겠는가? 그는 이렇게 대답을 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에게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 축구는 일본 축구보다 분명히 한 수위에 있습니다. 한국이 이길 수만 있다면 합법적인 모든 것을 다하고 싶습니다. 세계 축구인들이 이번 결승전에서 한국팀을 압도적으로 응원해 줄 것을 기대합니다."

세계 축구계가 발칵 뒤집히고 일본 열도가 들끓었다. 그것은 내가 일본 팬이냐 아니냐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비난이 빗발치고 해명하라는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럴 때는 또 어떻게 하겠는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내가 먼저 말을 꺼낸 것도 아니고 기자들이 질문을 하기에 그렇게 대답을 했는데, 그게 그렇게 잘못된 것이냐?"고 반문할 터인가?

결국 FIFA까지 나서서 "엄정 중립의 의무를 준수하라"고 경고하기에 이르렀다. 이번에는 또 "축구인으로서 축구에 관한 견해를 밝힐 수 있는 것 아니냐? 나는 앞으로도 축구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해 나갈 생각이다" 이렇게 항변을 할 것인가?


나는 일개 정치인이 아닌 ''대통령 노무현''이 이 문제의 본질을 전혀 꿰뚫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금 ''이번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꼭 이겨야 할 텐데'' 하는 간절한 바람과 대통령으로서의 한계(!) 사이에서 외줄타기 곡예를 하고 있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명백한 ''반칙''이다.

그런 간절한 바람을 가지고 있다면, 열린우리당의 총선 승리를 발판으로 삼아 한국 정치를 한 단계 더 끌어올리고자 하는 소망을 안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열린우리당에 입당하는 것이 차라리 옳다. 백 마디 말이 필요 없다. 입당 그 자체가 열린우리당에 대한 압도적인 지지 표시가 되지 않겠는가? 그것이 설령 ''가시밭길''이 될 지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한번 다루도록 하겠다.)

혹자들은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르겠다. 정치를 전혀 모르는 너무나도 순진한 생각이라고. 노무현 대통령이 그걸 몰라서 저렇게 어렵게 외줄타기 곡예를 하고 있는 줄 아느냐고.

그러나 감히 말하건대, 그렇게 하는 것은 이른 바 ''노무현 식(式)''이 아니다. 국민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라는 뜻이다. 정치인 노무현이 그 동안 국민들에게 심어왔던 이미지 내지는 색깔은 ''꼼수''나 ''장난''과는 거리가 멀다. 서두에서 밝혔듯이, 노 대통령은 반칙하지 않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로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여왔다.

백 번 양보해서 노무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을 돕기 위해 그렇게 처신하는 것이 불법은 아닐 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것은 법 이전에 도덕적 자질에 관한 문제요, 보편적 상식에 관한 문제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노무현''을 지지했던 사람들이 왜 ''노무현''을 지지했는지를 다시 한번 깊이 되새겨 보기 바란다. 그가 돈이 많아서도 아니요, 집안이 좋아서도 아니요, 뒷배경이 좋아서도 아니요, 학식이 뛰어나서도 아니요, 그를 따라가면 호의호식하게 될 것 같아서도 더 더욱 아니다. 살아 생전 그의 성공을 볼 수 있으면 더 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꼭 그것 때문에 좋아했던 것도 아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반칙''을 범하지 않고 정도(正道)를 걸어가려고 몸부림치는 그 모습, 그 열정을 사랑했던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더 이상 ''반칙''을 범하지 않고 정도를 걸어가기를 기대한다. 그것이 ''노무현''이다.


노컷블로그 <김준옥의 ''그물에 걸린 정치판''> 中

CBS정치부 김준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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