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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관가는 인사철마다 투서로 몸살을 앓는다. 경쟁 상대방을 헐뜯고 끌어내려야 자신에게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에 투서는 승진이나 출세의 유력한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
군과 검찰, 경찰 등 권력기관은 말할 것도 없고 정부부처는 물론 심지어 청와대에도 장차관이나 공공기관의 사장, 감사 자리를 염두에 둔 투서가 쇄도하고 있다.
A공사 사장직에 공모한 B씨는 ''모씨로부터 금품을 수수했다''는 투서가 청와대 인사팀에 접수되는 바람에 임명 직전 인사절차가 정지됐고 수 개월에 걸친 확인절차를 거친 뒤에야 사장에 임명됐다. 익명의 투서 접수자는 투서 내용을 그대로 검찰에도 흘려 내사가 진행되면서 임명절차가 아예 중단된 것이다.
C공기업의 유력한 사장 후보에 올랐던 D씨 역시 투서 때문에 임명이 상당기간 지연된 경우였다. 투서의 내용은 "D씨가 과거 정권 대통령 부인의 4촌"이라는 내용이었다. 청와대 검증팀이 사실관계를 조사한 결과 투서내용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청와대 인사비서관실에는 주요인사 때마다 이같은 내용의 근거없는 "카더라"식 투서가 수십통씩 접수돼 직원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특히, 올 하반기 280여개 공공기관과 그 산하기관장 200여명의 임기 만료를 앞두고 청와대 인사비서관실에는 투서가 잇따라 접수되고 있다.
하지만, 특정한 자리에 누군가 임명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투서는 싹 사라진다. 투서는 주로 우편을 통해 전달되고 있고 이따금씩 팩스를 통해 접수되기도 한다.
투서의 내용은 ''인사검증대상에 오른 누가 뇌물을 받았다''는 금전관계나 이권개입, ''바람을 피운다''식의 여자문제, ''직장내 부하직원들에게 고압적이라거나 주사가 심하다''는 내용의 공직자로서의 자세를 지적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인사철마다 투서가 수십통씩 날아들지만 사실관계를 파악해보면 정작 진실로 판명되는 경우는 1%도 안된다"고 말했다.
◈ 누가 무슨 목적으로 투서를 하는가?투서의 진원지는 특정 인사의 이해당사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해관계가 없다면 굳이 투서를 할 이유가 없다.
장차관 인사의 경우 투서가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지만 정부나 군, 경찰 등 정부 고위직이나 공공기관 인사의 익명투서자는 대부분 경쟁자라는 것이 청와대 관계부서의 설명이다.
인사팀 한 간부는 "(투서대상자)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제일 잘 아니까 투서를 하게 되는 것이다"고 말했고 다른 청와대 관계자는 "자리는 한정돼 있는데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투서가 생기는 것"이라고 밝혔다.
대리인을 앞세운 투서관행도 있다. 노조를 부추겨 노조나 노조원의 이름으로 투서를 접수하게 하는 경우다. 예를들어 "우리 조직에는 특정 유형의 사람이 필요한데 낙하산이 오면 안된다"거나 "우리 조직은 바람막이가 필요하니까 좀 힘있는 사람 보내달라"며 내부승진을 가로막기도 한다.
국방부 고위관계자는 "군은 계급장을 통해 지위가 드러나기 때문에 일반 공직사회보다 경쟁이 더 치열하고 투서관행도 더 심한 것이 사실"이라고 전했다.
공기업과 준정부기관 인사를 둘러싼 투서관행은 더욱 심각하다. 이명박정부 들어 공기업 선진화가 추진되면서 사장과 감사 자리는 외부공모나 내부승진으로 채워지는 경우가 늘어났다. 때문에 기획재정부나 지식경제부 등 부서에서 퇴직한 공무원 ''낙하산''은 그만큼 줄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밥그릇을 뺏길 처지에 놓인 정부부처 공무원들이 외부영입인사나 내부 대상자들을 상대로 투서공세에 나서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부처 모 인사담당 간부는 "공무원들이 투서나 여러 형태를 통해 외부영입이나 내부승진자를 흔드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고 심지어 노조마저 취임반대에 나서는 경우까지 있다"고 말했다. 이 간부는 그러나 "공공기관의 상급기관 공무원 출신이 가게 되면 상급부서이니까 노골적으로 반대할 수 없다"고 밝혔다. 오랜 낙하산 관행의 결과라는 지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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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와대 인사팀도 투서 확인하기에 바빠이름과 연락처가 없다는 점에서 익명 투서는 민원의 형식요건을 제대로 갖추지는 않았지만 일종의 민원으로 볼 수 있다. 또 인사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투서를 무시하고 인사를 진행했다가 나중에 문제가 되면 곤혹스러운 처지에 빠질 수 있다.
정부내에서 가장 포괄적인 인사와 검증권을 가진 청와대의 경우 투서내용을 실제 인사에 참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사비서관실 관계자는 "투서가 꼭 인사나 승진에 영향을 미친다기보다는 들어오면 확인을 안 해볼 수 없으니까 민정에 부탁해 사실관계를 확인하게 된다"고 말했다.
민정수석실 관계자는 "인사철에 나온 투서 가운데 신빙성이 있어 보이는 것은 혹시 모르니까 사실관계를 조사해 본다"며 "투서가 인사에 완전히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고 내부관행을 전했다.
투서 가운데 사실관계에 부합하는 내용은 인사에 반영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검증을 통해서도 사실관계를 명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사안의 경우 자칫 인사를 왜곡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할 개연성이 다분하다는 지적이다. 투서가 인사에 혼선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 투서는 공직이기주의 전달수단투서가 인사관계자의 의사결정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인사왜곡의 여지는 상존한다.
인사철마다 날아드는 수십 수백통의 투서는 인사행정의 효율성을 떨어트리는 원인이다. 인사담당부서에 투서를 보내는 것도 모자라 검찰 등 사정당국에 관련 정보를 흘릴 경우 내사가 진행돼 이 기간 동안 인사는 멈춰 설 수밖에 없다. 짧게는 2~3개월에서 최장 5~6개월까지 인사가 지연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이 기간동안 해당 공기업이나 준정부기관은 최고경영자 공석 상태로 운영되고 그만큼 업무효율성이 낮아지게 된다. 아울러, 피투서자의 입장에서는 근거없는 내용들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고통을 받게 되고 프라이버시를 침해당하는 문제가 생긴다.[BestNocut_R]
정부 민원사무처리법에 따르면 "민원신청이 있을 때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접수를 거부할 수 없다"고 규정돼 있지만 익명 민원 즉 ''투서''는 접수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다.
서울시 종로구청 민원실 관계자는 "현장민원이든 일반민원이든 신고인의 인적사항이 있어야 접수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청와대와 정부기관의 인사담당자들이 굳이 이같은 법규정을 어겨가며 투서를 인사참고자료로 활용하지 않는다면 쉽사리 투서관행을 근절할 수 있다.
또, 투서는 권력핵심부의 인사철학에 반해 철밥통을 지키려는 ''공직 이기주의''의 전달통로로 기능하는 만큼 청와대가 근절에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