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비밀계좌에 있던 1조8천억원대의 자금이 우리나라 주식시장에 투자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 돈의 실체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스위스 당국이 이 돈의 주인을 공개하지 않는 데다 외국인의 주식매매 동향을 관리하는 금융감독당국마저 실체 확인에 나서지 않겠다는 입장이어서 이번 사건의 진실은 온갖 의혹만 남긴 채 미궁 에 빠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
수상한 돈의 국내 유입 사실은 스위스 국세청이 제3국 거주자의 자금이라며 우리나라 국세청에 58억원의 세금을 환급하면서 드러났다.
한국과 스위스 간 조세조약에는 스위스 거주자가 한국 주식에 투자하면 배당금의 15%를 한국 국세청이 원천징수하되 스위스 거주자가 아닌 제3국 거주자에게는 20% 세율을 적용하게 돼 있다.
스위스 국세청이 배당세액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배당금의 15%만 낸 투자자 중 제3국적자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덜 낸 세액 5%에 해당하는 58억원을 걷어서 한국 국세청에 보내준 것이다.
세금 누락기간, 연간 배당세 누락액, 시가배당률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스위스에서 배당세를 추가 과세한 투자자금의 원래 규모는 최대 1조8천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이중 절반 정도는 국내 음성자금, 즉 `검은 머리 외국인''이 스위스에 숨긴 돈일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세율이 낮지 않은 스위스를 거쳐 국내에 투자했다면 신분 노출을 꺼린 한국인일 가능성이 크다.
이 돈은 국내 대기업의 국외비자금이나 재벌의 재산도피자금, 정치자금 등일 개연성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 돈의 실제 주인을 밝혀낼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스위스 국세청이 계좌내역을 보내주지 않는 한 우리 국세청이 단독으로 자금 추적을 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외국인의 자금 유출입 실태를 모니터링하는 금융당국의 처지도 마찬가지다.
금감원 관계자는 16일 "국적별로 외국인의 투자자금 규모를 파악할 수 있지만, 자금의 실제 출처가 어디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스위스를 거친 투자자금이 펀드를 통해 들어왔다면 개인 투자자까지 알 수는 없다"고 밝혔다.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회 관계자도 "불공정거래와 관련돼야 자금의 흐름을 들여다볼 수 있는데, 지금으로서는 `검은 머리 외국인''이든 `노란 머리 외국인''이든 파헤칠 이유가 없다. 심의는 기본적으로 종목별로 한다. 사람별로 뽑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현실적으로 그나마 기대를 걸 수 있는 것은 국회에 계류 중인 한국-스위스 조세조약의 개정안이다. 이 법안에는 기존 조세조약에 개인이나 기업 이름으로 개설된 금융계좌의 내역을 요구할 수 있는 조항이 포함돼 있다.
이 법안이 발효되더라도 난관은 여전히 남는다. 스위스 당국이 계좌 내역을 통보해줄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국세청 관계자는 "조세조약 개정안이 비준되면 정식으로 스위스 당국에 관련 계좌내역을 요청할 계획이지만, 스위스 당국에서 우리의 요구를 받아줄지는 미지수다"고 말했다.
결국, 수상한 자금의 실체를 보여주는 진실의 문을 열 수 있을지는 스위스 당국의 의지에 달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