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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의 숨결따라] 한산도- 학익진의 승리,조선수군들의 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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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일반

    [충무공의 숨결따라] 한산도- 학익진의 승리,조선수군들의 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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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특집 ② ] "견내량은 좁다.한산 큰 바다로 유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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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는 충무공 이순신 탄신 466주년 되는 해이다. CBS는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이충무공의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기획특집:충무공의 숨결따라]를 마련했다. 여수좌수영과 한산도,거제 칠천량과 진도 울돌목, 남해 관음포 등 주요 전적지를 돌며 오늘 이충무공은 우리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가,그리고 어떻게 기억되야 하는가를 살펴보고자 했다.[편집자 주]


    1.여수 - 이충무공의 효심이 살아숨쉬는 곳
    2.한산도- 학익진의 승리,조선수군들의 노고
    3.칠천량- 패배의 쓰라린 기억, 역사의 교훈삼아
    4-1.진도- 왜덕산, 적장후손들이 찾는 평화의 무덤
    4-2. 진도- 명량해전에서 쇠사슬 사용은 사실인가?
    5.남해 -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2011년 5월 18일. 맑음. 통영여객선터미널에서 아침 7시 배편으로 30분 나아가니 한산도 선착장에 닿았다.선착장에서 오른편 해안을 따라 들어가니 제승당 첫 입구인 한산문이 나왔다. U자형으로 움푹 들어간 왼편 해안가로는 연보랏빛 잎사귀 큰 꽃들이 죽 늘어선 가운데 찰방찰방 바닷물이 출렁거렸고,오른편 산언덕쪽에는 동백나무들 속에 아직 지지 않은 동백꽃이 드문 드문 선연히 붉은 색깔로 빛나고 있었다.굽은 해안이 반대로 꺾이는 지점에 이르자 실제 살아있는 듯한 두명의 수군조각상이 지키고 서있는 대첩문이 나오고, 위쪽으로 올라서니 제승당과 수루가 한눈에 들어왔다.

    ◈ 한산도를 삼도수군 본영으로 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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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승당(원래 이름은 운주당)은 충무공 이순신이 한산대첩을 이룬 후 지은 것으로, 1597년까지 이곳을 삼도수군의 본영으로 삼아 제해권을 장악하고 국난을 극복한 유서깊은 곳이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영이 여수에 위치해 부산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일본군을 제압하기에는 너무 멀다고 판단한다.이에 1593년 7월 15일 지휘의 효율성을 기하기 위해 한산도에 기지를 건설하고 진을 옮겼다. 한산도는 견내량 아래 고성과 거제도 사이에 있는 작은 섬으로 당시는 무인도였다. 한산도는 산 하나가 바깥굽이를 껴안아 안에는 배를 감출 수 있고, 밖에서는 그 속을 들여다 볼 수 없는 천혜의 요새였다.또 왜선들이 전라도로 침범하려면 반드시 이길 길을 거치게 되는 곳이라 적을 기다렸다가 깨뜨릴 수 있는 요로였다. 3도수군을 총괄 지휘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한지 한달 후인 8월 15일에 이순신은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다.

    ◈한산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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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도 앞바다는 1592년 7월8일 조선수군이 한산대첩으로 일본군을 대파한 곳이다. 이곳에서 이순신은 그 유명한 학익진 전술을 펼친다. 통영과 거제 사이의 견내량은 최소폭이 180미터로 협소해 대선으로 싸우기에는 적합치 않음에 따라 일본 함대를 한산도의 넓은 바다로 유인한다.유인하며 도주하던 이순신의 함대는 돌연 적 앞에서 방향을 180도 선회하면서 양쪽으로 날개를 펼치는 학인진으로, 적을 포위해서 섬멸했다. 이 상황을 이순신은 "장수들과 군사들이 승기를 타고 서로 다투어 돌진하며 철환과 화살을 발사하기를 풍뢰와 같이 하여 적선을 불사르고 적병을 사살하는 것을 일시에 모두 해버렸다"고 보고하고 있다. 한산대첩 결과 일본의전선 59척을 격파했고, 적선 14척이 겨우 탈출해 갔다. 이날 격침된 군선에 승선한 병력 수는 전투원과 선원을 합해 3,4천명으로 추정된다. 한산 대첩을 거둔 이날은 장병이 피로하고 날도 어두워져 견내량 안 바다에 진을 치고 밤을 보냈다.조선수군은 한산대첩으로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일본군의 수륙병진 전략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더 이상 일본 수군이 해전에 나서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제압하였다.

    ◈제승당과 한산정, 한글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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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승당 경내에는 바다가 잘 보이는 제승당 오른편에 수루가 있고, 제승당 뒤편에 활을 쏘던 한산정, 왼편 윗쪽으로는 유허비와 충무사가 자리잡고 있다. 제승당(원래 운주당)은 1597년 칠전량해전 때 불타 없어져 폐진되었다가 영조 때(1739년) 통제사 조경이 운주당 자리에 ''승리를 만드는 건물''이라는 뜻의 제승당으로 중건했다. 1975년 박정희 대통령 때 구역을 확장하고 보수하여 오늘의 모습으로 정화하였다. 제승당은 이장군이 전란 중 장수들과 작전회의를 하고,총통 등 신무기를 제작해 보급하던 곳으로 1597년 한양으로 붙잡혀가기까지 3년 8개월동안 머물렀다.노량해전도와 진중생활도, 한산대첩도, 우국충정도,사천해전도 등 벽화가 그려져있다. 적선의 침입을 살피는 망루인 수루에 오르면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찰싹거리는 물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와 이충무공이 이곳에 앉아 시를 읊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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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터인 한산정으로 가면 독특한 풍경을 접하게 된다.과녁 세개가 바다 건너 맞은편 산에 놓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거리는 145미터. 이 거리는 당시 해전에서 적을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사거리였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이순신의 건의에 의해 최초로 지방무과특별시험이 치러졌다. 전란 중에 육지로 무과시험을 치르러 가는 번거로움을 덜기 위한 것이었다. 제승당 왼편위쪽으로 가면 제승당 터임을 알리는 유허비들이 있고, 그 맞은 편에는 한글로 된 비가 있다.이 한글비는 1948년 광복을 기념해 경남도내 초중고 학생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것으로, 위당 정인보 선생이 글을 지었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비를 새긴 날자를 <대한민국 30년="" 2월="">로 기록한 점이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원년으로 삼은 것이다.

    ◈ 충무사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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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 위쪽의 충무사에는 이충무공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그 영정 초상은 이제껏 보아왔던 온화한 표정의 표준 영정과는 사뭇 달랐고, 위엄이 서려 있으면서도 인자한 모습이었다. 이 영정은 1978년 정형모 화백이 그린 것으로, 종이품 통제사 관복 차림으로 그려졌다. 이충무공 표준영정은 1952년 월전 장우성 화백이 그린 것으로 현충사 본전에 모셔져 있다. 충무공의 영정은 실물에 기초하여 그린 것이 아니고 유성룡의 <징비록>에 "말과 웃음이 적고 용모가 단정하여 근신하는 선비와 같았으나 안으로는 담기가 있었다"는 기록에 기초하여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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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명록에는 전날 서울 송파구,영등포구, 대구, 울산, 부산 등지에서 다녀간 이들의 서명을 볼 수 있었다. ''아들의 안전한 전역을 빌며'', ''아들,딸이 충무공 정신을 이어받기를'' 기원과 함께. 나는 ''5.18 31주년 기념일에 이충무공의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겨봅니다''라고 적고 제승당을 나왔다. 나오는 길에 이곳을 찾은 서울 봉촌동 인현중학교 3학년 남녀 학생 100여명과 마주쳤다.''여기가 어디야?'' ''충무공 유적지이지'' 그들이 오가는 대화 속에서 이래서 역사는 배워야 한다는 것을 실감했다. 한산문 매표소에서 만난 해설사 진은하씨는 "이곳 한산도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한산대첩이 있었던 날 무더위에 20kg이나 되는 무거운 갑옷을 입고 주먹밥과 물도 먹지 못하고, 10시간 동안 싸운 수군과 격군들의 노고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를 바란다"고 했다. 다 떨어지고 몇송이만 남은, 선연히 붉은 동백꽃이 수군과 격군들의 유언인듯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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