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영도에 입항항 중국발 크루즈 '아도라 매직 시티'호. 부산항만공사 제공"예전엔 가이드만 따라다니며 면세점 명품을 쓸어 담았다면, 요즘 중국 젊은 관광객들은 소셜미디어(SNS)에서 본 한국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를 직접 찾아옵니다. 가방이나 화장품 브랜드 이름을 정확히 찍어서 물어보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9일 오후, 부산 신세계 센텀시티에서 만난 한 매장 직원의 말은 달라진 '유커(중국인 관광객)'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중국 최대 명절인 춘절(2월 15~23일)을 앞두고 부산 유통가가 맞이한 풍경은 과거와 사뭇 다르다. 가이드의 깃발을 따라 명품관을 휩쓸던 단체 관광객 대신, 태블릿과 스마트폰으로 무장한 채 'K-로컬 브랜드'를 찾아다니는 젊은 개별 관광객(FIT)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2월 부산항 '크루즈 대잔치'…상륙 인원만 5만 명 넘어
9일 오후, 신세계 센텀시티점 외국인 전용 안내 데스크는 평일임에도 세금 환급을 받으려는 중화권 쇼핑객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대기 번호표를 뽑고 10분 이상 기다리는 것은 기본이다. 백화점 쪽은 중국인 관광객이 급증하자 안내 데스크에 중국어 전담 직원들을 전면 배치해 대응하고 있었다.
눈에 띄는 점은 쇼핑객들의 면면이다. 과거 단체 관광객의 상징이었던 '깃발'은 보이지 않고, 스마트폰을 든 2030 세대 개인 여행객들이 주를 이뤘다. 이들의 양손에 들린 쇼핑백에는 명품 로고 대신 한국 MZ세대 사이에서도 줄을 서서 사는 이른바 '핫한' 패션 브랜드와 인기 베이커리 로고가 선명했다.
상하이에서 왔다는 한 중국인 관광객은 "상하이에서 부산까지 직항편이 많고 쇼핑 환경도 쾌적해 자주 찾는다"며 "한국의 패션과 뷰티 트렌드에 관심이 많아 올 때마다 옷과 화장품을 가방 가득 사 가곤 한다"고 웃으며 말했다.
과거 유커가 백화점 매출의 '큰 손'이었던 이유는 단가가 높은 명품 덕분이었다. 하지만 최근의 흐름은 '브랜드'보다 '취향'과 '트렌드'다. 실제 춘절을 앞두고 이달 들어 1일부터 8일까지 외국인 매출액 중 중화권 비중은 50%다. 중화권 고객 매출의 신장률은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200% 늘었다. 지난해 전체를 살펴보면 중국인 매출이 전년보다 100% 급증했다.
성장을 견인한 것은 명품이 아닌 국내 신생 브랜드들이었다. K-뷰티의 선두주자인 '탬버린즈'는 퍼퓸 카테고리에서 쟁쟁한 해외 브랜드를 제치고 매출 1위에 올랐으며, K-패션을 대표하는 '이미스'와 '젠틀몬스터' 역시 100% 이상의 가파른 신장률을 기록했다. 이들의 활약에 힘입어 신세계 센텀시티의 전체 매출 중 외국인 비중은 사상 처음으로 5%를 넘어섰다.
신세계 센텀시티 외국인 서비스센터 모습. 김혜경 기자 2월 부산항 '크루즈 11척'…5만 5천 명의 'K-라이프스타일' 쇼핑
이번 춘절 특수는 규모 면에서도 압도적이다. 부산항만공사(BPA)에 따르면 2월 한 달간 부산항에 입항하는 중국발 크루즈는 총 11차례로 관광객 약 5만 5천명이 부산에 내린다.
주목할 점은 이들이 단순 쇼핑을 넘어 한국의 일상을 '체험'하려 한다는 것이다. 유통업계는 이에 맞춰 마케팅의 체질을 바꾸고 있다. 신세계 센텀시티는 22일 'K-푸드 쿠킹 클래스'를 열어 유커들이 직접 떡국과 잡채를 만들어보게 하는 등 '문화적 접근'을 시도한다. 광복동과 서면 상권 역시 전통시장과 연계한 온누리상품권 프로모션과 위챗페이 등 디지털 결제 편의성을 강화하며 '생활 밀착형' 마케팅에 나섰다.
전문가들은 유커의 소비 패턴 변화를 부산 관광 산업이 '양적 팽창'에서 '질적 성장'으로 전환하는 신호탄으로 보고 있다. 특정 명품 브랜드에 의존하는 기형적 구조에서 벗어나, 지역 기반의 다양한 K-브랜드가 동반 성장할 수 있는 생태계가 마련됐다는 평가다. 단순한 '관광객'을 넘어 한국의 '트렌드 세터'로 진화 중인 유커의 귀환이 침체된 지역 내수 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