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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칼럼]너머의 것

    • 2025-12-2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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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중의의 가장자리톡]

    조중의 포항대학교 초빙교수·전직 언론인 제공조중의 포항대학교 초빙교수·전직 언론인 제공
    '엘'은 과자를 굽는 가게의 이름이다. 이 파티세리의 주인은 30대 여자인데, 프랑스 영화배우 레아 세이두처럼 예쁘다. 3년 전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던 어느 날 우연히 새로 문을 연 '엘'을 찾아갔다.

    "엘의 뜻이 뭐예요?"
    "엘요? 어릴 때 친구들이 저한테 붙여준 별명에요. 뭐 특별한 뜻이 있는 건 아닌데, 애들이 나를 부를 때 엘아! 엘아! 그렇게 불렀어요"

    프랑스에서 제과사가 되기 위해 트레이닝을 했다. 한국에 돌아와 자기 별명 '엘'을 상호로 세무서에 등록하고 과자 굽는 가게를 열었다. '엘 파티세리'

    '엘'이 사라졌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막연하고 불가시한 새해를 기다리며 약간의 긴장과 불안이 맴돌던 무렵이었다. 1월 내내 닫힌 가게 문이 열리지 않았다. 휴가를 갔거나 몸살이 났을 지도 모른다.  

    엘 파티세리는 벚꽃이 흩날리던 봄이 왔어도 문을 열지 않았다. 밤새 번개가 춤을 추며 천둥을 부둥키던 여름에도 침묵했다. 건조한 햇살에 가게 입구의 민들레 이파리가 부서지던 가을에도, 그 위로 눈이 소복이 덮이던 겨울이 왔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조중의 포항대학교 초빙교수·전직 언론인 제공조중의 포항대학교 초빙교수·전직 언론인 제공
    가게 앞을 지나올 때마다 가려진 통유리 너머가 궁금했다. 하얀 블라인드로 가려진 유리창 너머에서 과자를 굽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다. 그렇게 삼 년이 지났다.

    엘 파티세리의 여자 주인은 창 너머에서 무얼하고 있는 걸까? 그녀는 삼 년의 시간이 필요할만큼 이곳 너머에서 무얼 찾고 있는 걸까? 이곳에서는 불가능한 현상과 감각을 벗어나 초월의 지경에서 행복한 걸까?
     
    20여 년 전, 도시 외곽의 시골에 집을 짓고 살 때였다. 함께 살던 '동지'라는 이름의 개가 있었다. 주말이면 함께 산책을 했다. 집 앞으로 이어진 산길을 따라 얕은 능선을 돌아오는 코스였다. '동지'는 목줄을 풀어주면 전력을 다해 달린다. 한 주의 답답함을 해소하려는 듯, 붉은 혓바닥이 수제비처럼 축 내려오도록 달리고 달렸다.

    '동지'는 초겨울 어느 주말 산책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산길의 으슥한 숲을 향해 "동지야!" 불러 보았지만 고요했다. 마른 나뭇가지를 때리는 좀 으스스한 바람 소리뿐이었다.

    혼자 집으로 돌아오며 '동지'를 믿었다. 돌아올 거야. 산 아래 가까운 집인데 어찌 길을 잃겠어? 새벽이 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랜턴을 들고 외투를 단단히 입고 집을 나와 산길을 거슬러 올랐다. 검은 숲을 향해 "동지야!" "동지야!" 불렀다.

    조중의 포항대학교 초빙교수·전직 언론인 제공조중의 포항대학교 초빙교수·전직 언론인 제공
    능선 너머 이웃 동네까지 갔다. 집마다 잠을 깬 마당의 개들이 새벽 공중을 향해 짖어댔다. '동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한 달이 가고 일 년이 가도 '동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불가시한 이곳 너머에서 무얼 만났기에 거기 주저앉은 걸까?

    며칠 전 같은 골목에 있는 우동집 주인에게 '엘'의 소식을 들었다. 몸이 아프다고 했다. 그것 뿐이었다. 구체적인 건 몰랐다. 그도 뜬 소문을 엿들은 것이다. 가까이 있는 해물탕집 주인도, 커피집 주인도, 라면집 주인도 모른다고 했다.

    몸이 아파 가게 문을 열지 못하게 됐으면 폐업을 하거나 간판을 내릴 법도 한데, 엘 파티세리는 지금도 여전하다. 저녁 어둠이 깔리면 간판에 불이 켜진다. 삼 년이 지났어도 어둠이 찾아오면 타이머에 의해 자동 점등된다. 어느 날 밤 외등이 비추는 빛 속의 창문 앞으로 다가가 몰래 실내를 살폈다. 모든 것이 그대로다.

    메뉴판, 과자 진열장, 벽에 걸린 프랑스 어느 해변의 새파란 여름 풍경……. 가게 주인 '엘'만 보이지 않는다. 엘 파티세리의 이상과 꿈은 현실 너머에 있다. 내가 알 수 없는 너머의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시골집에서 함께 살았던 '동지'도 너머의 곳에 머물기로 작정한 것이다. 산책하던 산 능선 너머로 자신을 끌고 갔다.  

    그러고 보면 너머는 현실의 또 다른 현실이다. 모두가 너머로 가고 싶다는 유혹에 빠진다. 그 생각이 내 안에 머물 때 마음이 춤을 춘다.

    엘 파티세리의 주인 '엘'과 하얀 털을 가진 '동지'는 이제 너머의 것이다. 너머는 이곳에 머무는 이들을 이끌어가는 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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