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장 한 시간 전부터 줄 선 관람객들. 권유빈 인턴기자목요일 오전 9시, 국립중앙박물관(국중박) 앞은 공식 개장까지 한 시간이 남았지만 이미 북적였다. 유모차를 끄는 가족, 단체 체험학습을 온 학생들, 외국인 관광객, 중장년 관람객들이 계단 아래부터 줄을 섰다. 상설전 입구는 개장 30분 전부터 겹겹이 줄이 늘어졌고, 그 옆으로는 특별전을 보려는 이들이 따로 줄을 섰다. 대기 인원은 상설전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특별전으로 향하는 발걸음도 꾸준했다. 청소 노동자 한 명이 광장 바닥에 흩어진 휴지, 과자 봉지, 음료 컵 등을 묵묵히 주워 담고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올해 처음으로 연간 관람객 600만 명을 넘기며 루브르·바티칸·영국박물관에 이어 세계 박물관 관람객 기준 4위에 올랐다. 인기의 중심에는 케이팝 세계관을 담은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가 있었다. 작품에 국립중앙박물관 유물이 등장하면서, 관련 굿즈와 전시를 찾는 관람객이 크게 늘었다는 것이 박물관의 설명이다. 박물관 측은 지난 16일 문화체육관광부 업무보고에서 "소방법상 하루 적정 인원인 1만5천명을 훌쩍 넘어, 여름철에는 하루 최대 4만4천명까지 관람객이 몰려 관람 안전에 부담이 있었다"고 했다.
같은 날 이재명 대통령도 "무료로 하면 격이 떨어져 보일 수 있다. 일정 부분 비용을 이용자가 부담하는 것이 형평에도 맞는다"고 언급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내년 상설전 예약제 도입과 관람객 수 제한, 상설전 유료화까지 함께 검토하고 있다.
CBS노컷뉴스는 18일 오전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아 상설전과 특별전, 굿즈숍, 야외 공간을 둘러보며 '유료화'에 대한 관람객과 현장 노동자들의 반응을 직접 들었다. 관람객과 현장 근무자들 다수는 과도한 혼잡을 줄이고 관람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유료화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학생·취약계층은 계속 무료라면"…적정 관람료는 5천~1만 원 사이?
국립중앙박물관 굿즈숍 '뮷즈'를 둘러보는 관람객들. 권유빈 인턴기자"요즘 사진전이나 소규모 전시도 1만 원 넘게 내고 들어가잖아요. 세계 4위 박물관이라고 하는데, 그 정도면 값어치는 충분하지 않을까요." (관람객 장철진씨)상설전 입구에서 만난 장철진(52)씨는 "목요일 오전인데도 이렇게 붐빌 줄 몰랐다"며 "무료니까 관광객도 많고, 단체도 많아서 정신이 없다"고 말했다. 상설전 유료화에 대해서는 "1만 원 선까지는 낼 수 있을 것 같다"고 전했다.
20년 넘게 국중박을 꾸준히 찾았다는 역사교사 방예슬(가명·46)씨는 "유물과 건물을 잘 지키려면 어느 정도 입장료는 필요하다"며 "5천 원 정도가 적당하다"고 했다. 그는 "무료라서 부담 없이 올 수 있는 건 좋지만, 이 정도 규모를 완전히 공짜로 운영하는 나라는 드물다. 외국 박물관은 더 비싸니까. 다만 학생, 다자녀, 취약계층 같은 분들에겐 지금처럼 혜택을 줘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외국인 학부모 세 명도 비슷한 의견을 내놨다. 베트남 출신 이은지(40), 파키스탄 출신 안젤라(43), 러시아 출신 레지나(39)는 "경복궁 입장료처럼 5천 원 안팎이면 괜찮다"고 입을 모았다. "뉴스에서 관람객 600만 명, 세계 4위라고 해서 기대하고 왔다"며 "그 정도 박물관이면 어느 정도 비용을 내는 게 자연스럽다"고 강조했다. 다만 "역에서 다소 떨어져 있고 주변 관광지와 연계된 동선도 많지 않아, 입장료가 1만 원을 넘으면 부담이 될 것 같다"는 의견도 나왔다. 또 다른 관람객들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이나 취약계층만큼은 지금처럼 무료이거나 할인 혜택이 유지돼야 한다"고 했다.
같은 자리에 있던 한국인 학부모 주은영(52)씨는 "학생들이 이곳을 많이 찾는 걸로 알고 있다"며 "학생들을 대상으로 관람 뒤 감상문을 쓰거나 그림으로 표현하게 하고, 우수작엔 작은 상을 주는 방식도 좋을 것 같다"고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이어 "그런 결과물을 책자에 담거나, 감상 제출 시 연필 같은 학용품을 기념으로 주면 공부할 때도 도움이 되고, 박물관 홍보에도 효과가 있지 않겠느냐"고 덧붙였다. 단순한 유료화 논의를 넘어서 교육적·문화적 효과를 살리자는 제안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전시를 보러 왔다는 임현정(가명·64)씨는 메트로폴리탄 소장품 전시를 보기 위해 1만9천원짜리 티켓을 미리 구매한 상태였다. "사설 전시는 이 정도 가격이 보통이지 않나"라며 웃으면서도, 상설전 유료화에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갑자기 1만 원 이상으로 올리면 거부감이 있을 것 같고, 1만 원 아래로 받는 게 좋지 않을까. 사람이 너무 많으면 아무리 좋은 전시도 잘 안 보인다"라면서도 "관람 환경이 지금보다 나아진다면 그만한 돈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람은 넘치는데 손은 그대로"…현장 노동자가 보는 유료화 이유
상설전 '사유의 방'을 찾은 관람객들. 권유빈 인턴기자광장 바닥에서 쓰레기를 줍고 있던 엄태진(가명·64)씨는 올여름을 떠올리며 "여름·가을부터 관람객이 확 늘면서 쓰레기도 눈에 띄게 많아졌다. 원래 둘이서 맡던 구역인데 지금은 저 혼자 다 하고 있다"라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계단 난간과 바닥, 야외 벤치까지 손이 닿아야 할 곳을 하나씩 짚으며 "눈에 잘 보이는 곳부터 처리하다 보면 결국 놓치는 곳이 생긴다"고 털어놨다.
국립중앙박물관은 1945년 개관 이후 80년 만에 처음으로 연간 관람객 600만 명을 넘겼다. 2005년 용산 이전 당시 133만 명 수준이던 연간 관람객은 20년 사이 약 4.5배 늘었고, 개관 이후 누적 관람객은 1억 명을 넘어섰다.
엄씨는 이런 변화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체감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
"누군가는 전시는 안 보고 너무 오래 머물다가 가요. 그런 게 꼭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지금처럼 유명해진 박물관이라면 이용 방식에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그는 "외국처럼 입장료를 받으면 적어도 전시를 보겠다는 마음으로 오는 사람이 늘어나고, 이 공간이 단순한 쉼터가 아니라 문화생활 공간이라는 인식이 생기지 않겠냐"고 전망했다. 늘어나는 외국인 관광객을 언급하며 "이제는 명성에 맞게 박물관의 쓰임새도 달라져야 한다"고도 했다.
관람 질서를 관리하던 황주성(가명·56)씨 역시 현장에서 일하며 유료화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체감해왔다.
용역으로 시작해 공무직이 된 지 14년째인 그는 지난 7~8월을 "거의 올스톱이었다"고 표현했다.
"사람이 너무 많다 보니 줄을 세워도 소용이 없고, 통로마다 관람객이 빼곡해서 애초에 정돈이라는 게 불가능했어요.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였죠."황씨는 과거 유료였던 시절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그땐 관람객이 워낙 적어서 입장료로는 인건비도 못 건진다는 말이 있었는데, 지금은 관람객 600만 명, 세계 4위 얘기까지 나오는 상황이니 유료화에 대한 전제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경복궁 입장료 정도, 혹은 그보다 조금 더 받아야 한다. 돈을 받느냐 안 받느냐는 관람 태도에도 영향을 준다"며 "외국인들도 유료일 때 박물관을 더 '가치 있는 공간'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고 했다.
박물관 내부의 분위기도 비슷하다. 한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는 CBS 취재진과의 통화에서 "관람객이 급격히 늘면서 민원도 함께 많아졌다. 사람이 많아지면 방호원이나 안내 데스크에 줄이 길게 생기고, 대기 시간이 길다는 항의가 반복적으로 들어온다"며 "차라리 유료화를 해서 입장 인원을 조절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현장에서도 나온다"고 전했다.
유료화 반대 의견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반대 전화를 받은 건 한 번뿐이었고, '너무 붐비니 적정 가격이라면 돈을 받는 게 낫다'는 취지의 의견이 더 자주 들어온다"며 "아직 논의 단계지만, 직접 찾는 관람객 사이에서는 낮은 가격대 유료화라면 공감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조금씩 형성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장의 목소리가 조금 더 위로 올라갔으면"…세계 4위 박물관의 과제
일찍 품절된 일부 '뮷즈' 상품들. 권유빈 인턴기자
국립중앙박물관 현장에서는 유료화 논의와는 또 다른 문제도 제기됐다.
황씨는 무엇보다 "소통의 문제"를 꼽았다. 그는 "현장 직원들은 가장 가까이서 관람객의 반응을 접하지만, 정작 공무원이나 학예사들과 현안을 공유할 기회는 많지 않다"고 했다.
그는 여름철 정수기 물컵 부족 사태를 대표적 사례로 들었다. 관람객이 몰리던 지난 여름, 정수기 컵이 제때 채워지지 않아 아이들이 정수기에 입을 대거나 손으로 물을 받는 일이 반복됐다는 것이다. 그는 어르신들이 버려진 플라스틱 통을 씻어 다시 사용하는 모습도 목격했다고 했다. 그는 "위생과 안전이 모두 걸린 문제였지만 내부 조율이 늦어졌고, 현장의 요청도 쉽게 반영되지 않아 안타까웠다"고 회상했다.
상설전 안내 동선에 대한 지적도 이어졌다. 황씨는 "외국인 관람객들이 화살표 표기를 오해해 반대 방향으로 걷거나 들어가지 말라는 걸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지속적으로 문제를 전달해도 수정은 여전히 더디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는 "박물관이 세계 4위 관람객을 자랑할 만큼 성장한 만큼, 전시를 기획하는 학예사와 현장 공무직, 행정을 맡은 공무원들이 더 자주 머리를 맞대고 소통했으면 한다"며 "현장에서 올라가는 작은 개선 요구들이 조금만 더 빨리 반영된다면 관람객도, 일하는 사람들도 더 안전하고 편안한 박물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