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신문' 발행위원회 제공왜 위로 올라가는가. 어느 철학자는 고고하게 말한 적 있다. 가장 높은 산을 오른 자는 모든 비극을 비웃는다고. 조잡하고 부조리한 세상을 통찰하고 초월하겠다는 것인데, 산을 실제로 고통스럽게 올라본 사람은 이런 말을 차마 하지 못한다. 메마른 삶을 살아가는 자는 한걸음씩 위로 오를 때마다 자신에게 걸린 세상의 그림자를 같이 끌고 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올라가야만, 그 그림자가 온전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일하는 사람들이 왜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가. 올라가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일하는 사람이 겪는 속 터지고 억울한 일은 그림자 속의 그림자다. 보려 하지 않고 보이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올려다보는 곳에 프래카드를 내걸어야, 그곳의 일이 이른 새벽의 빛처럼 조금씩 드러난다. 왜 올라가는가. 올라가지 않으면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일터, 그곳의 비명과 울음은 좀체 들리지 않는다. 야생의 동물처럼 울부짖어도 이웃집 텔레비전 소리만큼도 들리지 않는다. 올라가서 외쳐야, 그제서야 아련한 소리로 들린다.
세상의 하늘은 오늘도 맑았지만, 그 하늘 아래 누군가는 30미터 철탑 위에서, 누군가는 불탄공장 옥상에서, 또 누군가는 명동역 지하차도 철제 구조물 위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땅 위에서 외면당한 이들이 하늘 위로 올라간 건, 단지 더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단지 "살고싶다"는 가장 인간적인 절규를 전하기 위해서다.
박정혜, 고진수, 김형수. 이 세 이름은 더 이상 특정사업장의 개인이 아니다. 그들은 법의 빈틈을 꿰뚫고 살아남은 기업 논리 앞에서, 제도라는 이름으로 방치된 수많은 일하는 사람의 얼굴이다. 불이 난 공장에서 보험금만 챙기고 사라진 외국기업, 정리해고의 명분이 사라졌는데도 침묵하는 경영진, 그리고 하청노동자의 입을 틀어막고 손해배상으로 짓누르는 대기업. 이들이 남긴 공통의 흔적은 '책임 없음'이다.
그러나 이 책임은 누구의 몫인가. 세 사람은 말한다. 이건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국회가 만든 문제라고. 고용승계를 막을 수 없고, 정리해고를 되돌릴 수 없으며, 파업을 하면 곧바로 손해배상을 청구 당하는 이 제도는 누가 만든 것인가. 바로 우리의 대표들이 만든 법의 구조이고, 그 구조 속에서 노동자들은 떨어지지도 못할만큼 위태로운 철탑 위로 몰려가고 있다.
500일, 98일, 68일(5월 21일 기준). 숫자는 차갑지만 그 속엔 추위와 더위, 고독과 분노, 그리고 절박한 희망이 켜켜이 쌓여 있다. 누구도 쉽게 오르지 못할 그곳에 올라서야만 들리는 이 목소리를, 우리는 얼마나 오래 외면할 것인가.
어느 시인은 말했다. 산은 오르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려오기 위해 있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다만, 그 산을 내려오게 하는 것은 이미 춥고 더운 곳에 오른 그들이 아니라, 땅 위에 머물러있는 자들의 몫이다. 하늘 위로 떠밀려 올라간 노동자들의 절규가 더 이상 고공에 머무르지 않도록 이제는 땅 위의 우리가 책임져야 할 시간이다.
내란이 시민의 권리를 송두리째 앗아가는 행위라고 한다면,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일터에서 내란의 일상을 겪는 노동자들이 많다. 그들이 더 이상 위험하고 높은 곳에 오르지 않게 해야 하는 것이 내란 종식의 진정한 시작이다. 그래서, 오늘도 내가 있는 ILO 본부 창밖으로 보이는 한국사회의 선연한 중심은 박정혜, 고진수, 김형수가 오른 고공의 삶이다.
*이 칼럼은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박정혜 여성노동자의 고공농성 500일, 세종호텔 고진수 98일, 한화오션 김형수 68일을 맞아 제작된 <굴뚝신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굴뚝신문> 제작에는 고공농성 해결을 촉구하는 14개 언론사 현직 노동기자들과 사진작가, 교수, 노동운동가들이 참여했습니다. ☞ <굴뚝신문> 구매 https://url.kr/wlcun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