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 테일러. 연합뉴스
김혜성. 연합뉴스 2014년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데뷔한 크리스 테일러는 2016시즌 도중 LA 다저스로 이적해 그 다음해부터 풀타임 시즌을 치르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정해진 포지션이 없었다. 유틸리티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포수, 1루수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소화하며 팀의 빈 자리를 채우는 선수였다.
팀당 162경기를 치르는 메이저리그 장기 레이스는 부상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주축 선수들에게 휴식일도 필요하다. 다저스는 그나마 걱정이 적었다. 테일러로 빈 자리를 채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느 자리에 들어가도 경쟁력을 보여줬다. 어떤 포지션을 맡아도 기본 이상의 수비력을 발휘했다.
테일러는 2년 연속 4점대 WAR(대체 선수 대비 승리 기여도)를 기록했다. 2013년부터 2016년까지 4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지만 내셔널리그를 정복하지 못했던 다저스는 -비록 우승하지는 못했지만- 2017년과 2018년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았다. 이 과정에서 테일러의 공이 적잖았다.
그는 '슈퍼 유틸리티'의 중요성을 널리 알린 선수 중 한 명이었고 이후 많은 팀들이 유틸리티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메이저리그는 2022년부터 골드 글러브 부문에 유틸리티 포지션을 추가했다. 테일러가 이 상을 받진 못했다. 김하성은 받았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소속이었던 2023년 내셔널리그 유틸리티 황금 장갑을 꼈다.
하지만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다. 다저스는 19일(한국시간) 테일러를 방출했다. 부상에서 회복한 토미 에드먼의 복귀를 위해 다저스에게는 빈 자리가 필요했다. 그동안 누군가의 빈 자리를 채워줬던 테일러가 그 대상이 됐다.
에드먼이 부상으로 빠지면서 기회를 부여받은 선수는 바로 김혜성이었다. 김혜성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메이저리그 14경기에 출전해 타율 0.452, 1홈런, 9득점, 5타점, 3도루를 기록했고 출루율 0.485, 장타율 0.581을 곁들였다. 멀티 포지션 소화 능력도 자랑했다. 주로 2루수(수비 58이닝)를 맡았지만 팀이 필요로 할 때 중견수(16이닝)과 유격수(3이닝) 포지션도 소화했다.
김혜성이 빅리그 생존에 성공하면서 다저스는 힘든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최근 오스틴 반스, 테일러 등 베테랑들을 내보낸 앤드류 프리드먼 다저스 구단 사장은 "지난 한 주는 우리에게 굉장히 감정적으로 힘든 시기였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고 입장을 밝혔다.
테일러는 다저스에서 약 9시즌을 보냈다. 다저스는 이 기간 꾸준히 가을야구를 했고 두 차례 우승을 달성했다. 테일러가 다저스의 간판은 아니었지만 없어서는 안 될 전력이었다. 하지만 30대 중반이 된 지난해부터 경기력이 크게 떨어졌고 이는 올해도 마찬가지다. 프로의 세계는 냉정했다.
다저스는 유틸리티의 가치를 잘 아는 구단이다. 이제 김혜성과 미구엘 로하스와 함께 그 역할을 맡는다. 에드먼은 주로 2루수로 뛰면서 중견수도 소화할 수 있는 선수다. 현재 다저스의 중견수 자리는 앤디 파헤스로 굳혀진 상태다.
파헤스는 시즌 첫 20경기에서 타율 0.159, OPS(출루율+장타율) 0.544에 그쳤다. 파헤스의 부진에 김혜성의 이른 콜업 가능성이 언급된 적도 있었다. 파헤스는 각성했다. 이후 23경기에서 타율 0.371, 7홈런, 17득점, 22타점, OPS 1.050을 기록했고 요즘은 다저스의 중심 타선에서 활약한다.
김혜성은 지난 4일 콜업 이후 주전으로 출전한 경우가 많았다. 앞으로는 달라질 수 있다. 김혜성은 테일러의 역할을 맡게 될 가능성이 높다. 당분간 팀이 필요로 할 때, 빈 자리를 채워주는 역할이다. 유틸리티 백업이다. 늘 준비돼 있어야 한다. 힘든 길을 걷게 됐지만 어차피 쉬운 자리는 없다. 테일러는 9시즌 동안 그 자리에서 잘 버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