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연구과제 중심 운영제도(PBS, Project-based System)가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과 학계 등의 과도한 '집안싸움'을 불러일으킨다는 지적이 계속되자 정부는 '과제 대형화'를 통해 해결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하지만, 과제 대형화에 따른 '연구 카르텔화' 등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은 만큼, 정부가 보완책을 비롯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보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0년 바라보는 제도, 해묵은 불만…'AI 시대' 맞이해 또 주목
PBS는 정부가 연구생산성 등을 높이기 위해 1996년 도입한 오랜 제도다. 정부 출연금을 받는 출연연은 이에 따라 정부로부터 연구자 급여의 일부만을 지급받고, 나머지는 연구자가 직접 정부수탁과제 등 외부 프로젝트를 수주해 충당해야 한다.
하지만, 이 때문에 출연연 입장에선 인건비를 벌기 위해 전문 분야와 맞지 않는 분야에서도 마구잡이식으로 프로젝트 수주전에 나서야 하는 연구자들의 이른바 '앵벌이'가 고질적인 문제로 대두됐다. 동시에, 이들과 마찬가지로 정부 사업 수주에 나서는 학계 등 입장에선 국내 전문가들끼리의 과도한 '집안싸움' 등 출혈경쟁이 이뤄진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연구자들이 단기적 성과에 집중하면서 과제가 소형화, 파편화되는 점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문제는 최근 중국의 '딥시크'를 비롯한 AI 기술, 미국의 양자컴퓨팅 등 급속한 기술 발전이 우리나라 입장에서도 국가적 과제로 대두하면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마침 정부가 최근 출연연 운영 규정을 새로 제정하면서 해결책이 제시될지 기대를 모았지만,
정부는 우선 PBS 제도 개선 대신 '과제 대형화'로 해결에 나서겠다는 입장이다.
PBS 제도와 취지 자체를 본질적으로 바꾸기보다는, 정부가 제시하는 사업 과제를 대형화해 여러 분야 연구자가 대단위 정부 프로젝트에 참여하도록 해 과제의 파편화, 국내 연구자끼리의 소모적인 경쟁에 매몰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과제 대형화, 부작용 대응책 포함 청사진 제시해야"
하지만 현장의 답답한 호소는 이어진다. 정부가 몇 가지 예시 외에 아직 구체적인 대형화의 규모, 분야, 방법 등 청사진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PBS 도입 이래 꾸준히 제기돼 온 현장의 문제의식과 비판을 고려하면, 더 적극적인 구상이 요구되는 것이다.
현장의 연구기관들은 정부가 밝힌 과제 대형화 방침에도 우려되는 지점이 있는 만큼, 구체적인 방향과 보완책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 연구기관 관계자는 "아무도 'PBS를 폐지하고 경쟁 체제를 없애자'고 말하진 않을 것이다. 큰 틀에서 정부의 과제 대형화 취지에 공감하지만, 그게 해결책의 전부가 돼선 안 된다"며 "과제가 대형화하면 소위 '메이저' 등 기관의 컨소시엄에 연구기관‧연구자가 몰리고, 어떤 경우는 아예 컨소시엄 자체를 구성하지 못하고, 당해 (수익성) 목표치를 채우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학계의 또 다른 연구자 역시 "과제가 대형화하면 연구 컨소시엄 구성은 불가피한데, 그럴수록 신규 연구자들은 이에 참여하기 굉장히 어려워지고, 잘못 운영할 시 '카르텔화'할 우려가 있다"며 "과제 과제를 대형화한다면 인맥 없이 연구과제 수주가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 과제 기획(발주 전)과 운영(발주 후)을 완전히 분리하는 등 보완책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과제의 파편화에 대응한 대형화가 연구의 유연성을 떨어뜨릴 수 있는 양날의 검인 만큼, 대형화 계획에 관한 구체적인 그림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한 출연연 관계자는 "10년 전 '챗GPT'가 세상을 바꿀지 몰랐던 것처럼, 10년 후에 어떤 기술이 떠오를지 섣불리 예단할 수 없다"며
"과제 대형화로 운영의 유연성이 떨어지고, 그러한 사업에 연구 수요가 쏠려 현장의 창의적 아이디어, 특히 기초과학이 고사(枯死)하지 않도록 하는 구상이 필요하다"고도 지적했다.
이런 가운데 출연금 확대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도 있지만, 빡빡한 예산 사정을 고려하면 이 역시 녹록지 않다. 기관마다 인건비를 충당하는 출연금과 PBS의 비중이 제각각인 상황이라 기관마다 입장이 다르기도 하다.
또 다른 출연연 관계자는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은 이미 정해져 있고, (인건비 비중 상) PBS가 큰 기관이 적은 기관에 빼주도록 조정하긴 쉽지 않다"고 말했다.
다만 정부가 성과 분산 문제에 관한 대책을 장기적으로 모색 중이라고 밝힌 만큼, 현장에선 우선 그 방향성을 잘 살펴보겠다는 의견이 나온다.
유상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역시 지난 달 출연연 측과 간담회에서 "PBS로 인한 성과 분산 문제를 해결해 출연연이 국가적 임무에 집중하게 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 중"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