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 정당화로 얼룩진 윤석열 대통령의 최후 변론에 국민의힘 지도부의 딜레마는 더욱 깊어졌다. 윤 대통령이 통합이나 진정성 있는 사과 대신 반탄파(탄핵 반대파)에 지지를 호소하면서다. 당 지도부는 중도 보수와 반탄파 사이 외줄 타기를 이어가야 하는 상황이다.
당 지도부 尹 두둔, 또 尹에 끌려가
국민의힘 권영세 비대위원장은 26일 윤 대통령의 최후 변론에 대해 "대통령의 진정성을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고 두둔했다.
권성동 원내대표도 "논리적 일관성을 갖춘 변론이었다. 헌법재판소가 내릴 결론에 잘 반영되길 바랄 뿐"이라며 탄핵 반대 의사를 표했다. 3.1절 대규모 집회를 앞두고 더더욱 맹렬해지는 강성 지지층을 의식하는 듯한 반응이다.
주류세력인 영남권 의원 일부와 원외 위원장들, 책임당원들이 당 지도부의 행보를 비판하고 있는 데 대한 부담도 덩달아 커지고 있다. 강성 지지층은 당 지도부가 탄핵 반대 집회에 참석하지 않는 것을 문제 삼고 있다.
하지만 중도층은 서울구치소를 찾아 윤 대통령을 접견하거나 계속해서 헌법재판소에 항의 방문을 한 여당 중진들의 행보를 보며 급속도로 돌아서고 있다.
한국갤럽이 지난 18일부터 20일까지 전국 만 18세 이상 유권자 100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3.1%p, 응답률 14.1%) 결과, 중도층 사이 정당별 지지율은 국민의힘 22%, 더불어민주당 42%, 무당층 28%였다. 직전 조사와 비교해 국민의힘은 중도층에서 10%p 빠졌고, 민주당은 5%p 늘었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참조).
보수·진보 진영이 각각 강하게 결집함에 따라 이번 조기 대선에서는 중도층 표심이 여느 때보다 중요하다. 당 지도부가 윤 대통령을 향해 최후 변론에서 계엄을 정당화하는 것에 치중했던 기존 변론 내용을 반복하기보다 사과의 뜻을 밝히는 것에 주력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우회적으로 표명했던 것 역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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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임기 단축 개헌 등을 언급하며 정계 복귀를 시사하는 듯한 윤 대통령의 발언에 당 지도부는 또다시 강성 지지층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권성동 원내대표가 윤 대통령의 최종 변론을 옹호하면서도 "수미쌍관으로 처음과 끝이 서로 관통하며 논리적 일관성을 갖췄다 본다"는 다소 엉뚱한 답변을 내놓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선 국면 전환 못하고 중도 후보들 기 못펴
윤석열 대통령이 25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윤 대통령 탄핵심판 11차 변론에서 최종 의견 진술을 하고 있다. 헌법재판소 제공일각에서는 당 지도부가 강성 지지층과 중도층을 붙잡아두려고 하면 할수록 둘 사이 간극이 커져가고 지도부에 대한 불신도 깊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당 지도부가 반탄파와 중도를 표방하는 세력 사이를 잇는 통로였는데 신임을 잃으면서 보수 진영 내 단일대오가 느슨해지는 건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윤 대통령이 계엄을 정당화하려는 입장만 반복하면서 당 지도부가 보수 진영의 파이를 키울 수 있는 새로운 아젠다를 던질 여지가 막힌 측면도 있다.
당초 당 안팎에서는 탄핵 심리 중에는 전략적으로 '우향우'를 하더라도 헌재 결정이 나오는대로 중도층을 향한 외연 확장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원내 관계자는 "소위 '배신의 아이콘'이든 '명태균 묻은 후보'든 경선 과정에서 겨루다 보면 이재명 대표를 상대로 한 경쟁력이 드러날 것이고, 자연스럽게 중도층에도 소구력이 생기지 않겠느냐"고 분석했었다.
강성 지지층이 지금은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을 지지하더라도 중도층에 소구력이 있다고 평가받는 오세훈 서울시장, 한동훈 전 대표 등도 경쟁력만 입증한다면 다시 세력이 붙을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당 지도부와 강성 지지층 간 밀착 기간이 길어지면서 가뜩이나 당내 입지가 좁은 중도 보수 후보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됐다. 맹윤(맹렬한 친윤)으로 분류되는 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이 보수 진영내 부동의 1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이같은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오 시장은 이날 '사퇴 후 대선 출마 선언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취지의 취재진 질문에 "본격적으로 (출마) 준비를 하는 것이 여의치 않은 분위기기"라며 "미리부터 (사퇴 여부를) 말씀 드리는 건 저로서는 이르다"고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윤 대통령의 탄핵 변론이 끝났는데도 당과 대선주자들이 역설적으로 계엄 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해 영남권 한 재선의원은 "지금까지 지도부가 균형을 잡으면서 당이 분열되는 것을 계속 막으려면 계엄이 아닌 새로운 서사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며 "이대로라면 반탄 집회에 나가지 않는 의원들은 (강성 당원들로부터) 더욱 더 (강경한 입장을 취하라는)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